여행을 사고하다

낙원에 비치는 권태(중국, 리쟝과 샹그릴라)

- 윤여일(수유너머R)

낙원에 비치는 권태(중국, 리쟝과 샹그릴라)

1.

잃어버린 낙원, 샹그릴라는 이제 실재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은 중국에 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샹그릴라를 발견했다고 대대적으로 공식 발표했다. 원난성의 중띠엔(中甸)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었다. 2001년에는 중띠엔을 샹그릴라(香格里拉, 샹거리라Xiānggélǐlā)로 개명하여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개발하였다. 도로를 포장하고 공항을 개설하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중국정부는 그저 한 장소를 샹그릴라라고 낙점한 것이 아니다. 1년간 역사, 지리, 민속, 언어, 종교 등 각 분야 전문가들 500여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하여 원난, 쓰촨, 티베트 등지를 답사한 끝에 샹그릴라가 그곳이라고 발표했다.

현지 조사과정에서 중띠엔이 샹그릴라여야 하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중띠엔은 소설에서 나오듯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드넓은 초원, 라마사원 등을 두루 갖추었다. 또한, 디칭 토속어로 샹그릴라는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을 뜻하며, 샹그릴라를 다르게 풀면 티베트의 창지역을 가리키는 ཞང와 말과 산을 의미하는 ར, 그리고 산을 통과하다는 뜻의 ལ이 합쳐진 조어인데, 바로 그 장소가 중띠엔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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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역전이 발생했다. 티베트 부근의 어딘가를 막연히 상정하여 부족한 실증적 토대 위에 창조해낸 샹그릴라라는 소설 속 장소를, 소설에 묘사된 내용을 근거로 실증적 연구를 거쳐 ‘발견’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 효과만큼은 실증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95년 한해 찾는 이가 7만 명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은 2008년에는 관광객 수가 200만 명을 넘어서는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중국만이 샹그릴라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샹그릴라 붐이 일자 인도나, 네팔, 부탄 등 히말라야에 터를 잡고 있거나 히말라야를 끼고 있는 나라들은 경쟁하듯이 자국의 어느 한 지점을 샹그리라라고 명명했다. 중국 정부는 개방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샹그리라 찾기에 나선 후발주자였지만, 물량공세를 통해 이제 사용권을 움켜쥐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맥락 안에서 샹그릴라 만들기는 소수민족 상품화의 한 과정이기도 했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소수민족의 풍속과 언어를 유지하도록 권장하며 70여 곳을 생태향진(生態鄕鎭) 지역으로 지정하여 소수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곳곳에서 소수민족의 삶터와 문화를 관광상품으로 가공하여 무대 위로 올려놓고 있다. 소수민족은 그들의 문화를 상품으로 내어주고, 삶의 거점은 점차 유입하는 한족에게 내어주고 있다. 관광지로 개발되면 한족이 들어오고, 소수민족은 고유의 복장을 입은 채 한족화된다. 즉 전통을 유지하기는 하나,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능력은 점차 상실하고 만다. 도로가 뚫리고 철로가 놓이고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호텔이 세워지면, 그들은 돈이 안 되는 계단밭 농사를 접고 야크 몰이를 그만두고, 점원으로 인력거꾼으로 일하거나 때로는 전통복장을 차려입고 폴라로이드 사진 속 풍경이 된다. 중국으로 투입된 세계자본도 한족의 권력을 타고 들어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호텔을 짓고, 소수민족의 차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코카콜라와 함께 메뉴 위에 놓인다. 샹그릴라는 그 깊은 내륙으로 그 높은 고도로 돈을 끌어들이고 사람들도 불러 모은 성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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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의 여정 위에서 내게도 샹그릴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가보기도 전에 그 이름 하나로 샹그릴라는 내게 의미과잉의 장소였다. 샹그릴라. 각각의 음절은 상큼하게 여행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필시 보고 느낄 것들로 가득한 장소, 텍스트로 다가왔다. 하지만, 막상 다녀오고 나서의 내 감상은 너무도 초라하다.

나는 콘웨이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샹그릴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티베트로 향하는 길에서 이미 여러 도시를 거쳐 간 터였다. 바로 전에 머무른 도시는 다음 장소에 다다랐을 때도 잔영을 남긴다. 샹그릴라 전에 방문했던 곳은 리쟝이었다. 그리고 리쟝은 장소에 관한 상상에서 또 다른 복잡한 사고꺼리를 안기는 곳이었다.

중띠엔이 샹그릴라라고 중국 정부가 발표하기 전년인 1996년, 리히터 규모 7이 넘는 강진이 리쟝 일대를 강타했다. 이 지진으로 36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하고 16,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지진으로 신시가지는 크게 파괴되었지만, 전통적인 나시족의 건축물은 견디어냈다.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세우면서 중국 정부는 전통적인 나시족 건축 방식으로 건물을 올렸다. 시멘트를 자갈과 나무로 대체하려고 수맥만 위안을 투자했다. 그리고 나서 리장현 전체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리쟝의 고성은 곳곳으로 뻗은 좁은 골목과 골목을 수놓은 매끈한 바닥돌, 옛날이야기가 걸어 나올 것 같은 기와지붕의 목조건물로 밝고 차분한 인상이었다. 도시 전체 구석구석으로 인근의 위롱쉐샨(玉龙雪山)에서 흘러내려온 맑은 물들이 스며들었다. 바닥이 보일 만큼 얕고 폭이 좁은 개천을 돌다리로 천천히 건너면 도시는 고풍스러움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면 리쟝은 돌변한다. 고성 안 2층 가옥은 기념품점과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로 개조되어 개울에 흐르던 물소리를 사방에서 틀어대는 음악 소리가 대신하고, 고즈넉하던 도시는 환락의 분위기로 물든다. 마치 지나간 옛 도시가 저녁을 경계로 수세기를 건너뛰어 디즈니랜드가 된 듯한 느낌이다. 리쟝의 낮과 밤은 여행자에게 이상적 장소의 이중적인 면모를 모두 제공한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낮 풍경의 고즈넉함은 따뜻하고 조화롭고 부드럽고 차분하며, 어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저녁 밤공기에 감도는 활기는 즐겁고 들뜨게 만들며 현실을 환상으로 바꿔놓는 유희문화의 물신성을 과시한다.


리쟝의 낮과 밤. 미로처럼 뒤얽힌 길, 가느다란 실개천, 시간이 얼룩진 돌담, 늘어진 능수버들이 태양빛 아래서 만들어내던 낮 풍경은 밤이 되면 인공조명의 현란함과 함께 일변한다. 리쟝은 에니메이션 < 센과 차히로의 행방불명>을 기획할 때 모티브가 되었다던데, 단지 건물이 고풍스러워서가 아니라 카멜레온 같은 이 이중성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그 낙차가 너무 커서 내게는 정 붙일 데가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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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쟝 다음이 샹그릴라였다. 리쟝에서 약 200km 떨어져 있고, 고도는 해발 3,200m로 훌쩍 높아졌다. 소설의 묘사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하늘을 가까이서 받아 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글을 쓸 것이라는 예감에 차마고도 위의 어떤 도시보다도 오래 머물렀지만, 남아있는 것이라곤 그곳으로 향할 때의 두근거림보다 덜 자극적인 단 두 가지 이미지뿐이다. 한 가지는 고성에서 한 시간 쯤 자전거로 내달린 곳에서 만났던 라파하이 초원의 풍경이다. 그곳의 모든 것은 두 가지 색으로 수렴된다. 초록과 푸른 색. 들판과 하늘과 하늘을 닮은 호수가 있을 뿐, 카메라를 들어도 초점을 맞출 피사체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야크를 모는 목동, 말을 탄 아낙이 있지만, 드넓은 풍경 속으로 그저 녹아들었다. 풍경은 그 넓이만큼의 사고력을 요구한다. 라파하이의 품은 내겐 너무 넓었고 그래서 생각은 도리어 그 장소에 머물지 못해 잡념으로 옮겨갔다. ‘이 평안과 한가로움이 소설에 묘사되고, 내가 찾던 그것일까?’

고성으로 돌아가니 전통춤이 한창이었다. 묘하게 사람을 끄는 그 단순한 장단에 맞춰 장족 사람들이 그저 발을 들었다 놓았다, 앞으로 한 발 뒤로 한 발 움직이며 춤을 춘다. 그 풍경 속으로 해가 저물었다. 이미 사진을 건지기에는 빛이 부족하다.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내 딴에는 그들을 흉내 낸답시고 보릿대춤을 춘다. 춤에 흥건하게 젖었다. 이 또한 전통춤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사람의 온기가 이렇게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어떠랴 싶었다.

이것이 샹그릴라에서 남은 두 장면이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다. 춤판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사로 파헤쳐진 도로는 밤길에 더욱 조심스럽다. 건물들도 보아하니 여러 채가 수리 중이다. 망치로 깨놓은 대리석 파편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샹그리라는 공사 중이다. 이렇게 거듭되는 공사 끝에 샹그릴라는 어떻게 변할까. 혹시 먼저 보고 왔던 리쟝이 샹그릴라의 다음 모습인 것일까. < 잃어버린 지평선>의 샹그릴라는 마치 영원 속에 살아가는 시간이 정지된 장소처럼 묘사되었지만, 현실의 샹그릴라는 그 이미지에 도달하고자 나날이 바뀌고 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온다면 이미 다른 풍경이 되어 있을 텐데, 나는 여전히 이곳을 샹그릴라라며 찾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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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 떠나기도 머물기도 뭣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짐을 쌌다. 샹그릴라를 내 마음에 각인시킬 풍경도 결정적 사건도 건지지 못한 채로 말이다. 무언가를 찾아 도시를 헤맸지만 무엇을 찾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막연히 샹그릴라가 내어줄 것이라 여겼고, 그것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떠나고 나서부터였다. 샹그릴라에 관한 다른 여행자들의 감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여행기를 보며 내 체험 속의 잔해라도 건져올려 다시 음미해 보고 싶었다. 결국 스쳐 지나간 곳이 되고 말았지만, 샹그릴라를 갈구하던 내 마음의 풍경만이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여행기들도 대개 샹그릴라라는 말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감상은 세 가지로 갈라졌다. 먼저 방랑자가 찾아 헤매다가 만난 낙원처럼 샹그릴라를 묘사하는 경우였다. 이때는 샹그릴라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자신의 감흥에 취한 표현이 많았다.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고달픈 심신을 달래고 싶고, 혹은 여행의 열병을 앓아서, 잠시 주위의 인연을 털어버리려고 나섰던 길에 문명의 이기를 벗어난 샹그릴라를 만나 콘웨이처럼 그 장소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는 이야기.

둘째, 샹그릴라에는 샹그릴라가 없다는 경우였다. 대개 중국 정부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한 내력을 알고 있는 이들의 글이었다. 중국의 샹그릴라는 진정한 샹그릴라가 될 수 없다. 공사판에, 호객행위에 자신이 원하던 순수성의 함량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이야기.

셋째, 자기 마음 속의 샹그릴라를 찾겠다는 경우였다. 여기서도 감상적인 문구가 눈에 많이 띄었다. 인간은 어쩌면 늘 이상향을 찾아 헤매나 결국 도달할 수 없다. 하기에 샹그릴라를 저 멀리 있는 어떤 곳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위로를 안기는 자신만의 장소, 혹은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그 모든 곳을 샹그릴라로 삼자는 이야기.

6

르 부리의 문구가 내 안에서 빛을 잃었듯이, 정감이 짙게 깔린 여행기를 읽고 있어도 금세 시들해지고, 차라리 허탈감이 찾아왔다. 글들에서 샹그릴라는 그저 부유하는 텍스트였다. 사실 내 감상도 저 몇 가지 패턴들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다만 그 글들에서 내 안의 허탈감이 확인되었을 따름이다. ‘샹그릴라’를 다시 검색어로 놓고 찾아보았더니 이런 문구가 떴다. “지구상의 마지막 샹그릴라 부탄이라는 나라를 아시나요? 개별여행도 금지되어 있고, 한해 7500명 이상은 들어갈 수 없는 자연의 나라 부탄. 전 세계에서 한국인이 갈 수 있는 나라 중에 유일하게 …”

그 문구를 보고 알아차렸다. 샹그릴라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샹그릴라를 생산하는 것은 누군가의 갑갑함과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갑갑하고 외로울 때 전에는 낙후하다며 눈을 내리 깔던 대상을 이번에는 순수하다며 동경한다. 갑갑함과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샹그릴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샹그릴라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샹그릴라에 대한 실망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샹그릴라를 찾는 이는 분열된 의식을 지닌 어른이기 때문이다. 순수함을 구하지만, 그 순수함을 만나면 얼마나 순수한지 또 재고 있을 것이다.

상상된 동양은, 미지의 세계이며 여성적이고 육감적이고 자극적인 동양은, 서양의 무의식을 풀기 위한 암호를 간직하고 있었다. 상상된 동양은 유럽 세계의 갑갑함과 외로움을 달래는 장소였다. 유럽인의 백일몽이며, 유럽인이 지닌 권태감의 징후였다. 그리고 샹그릴라는 나에게 그런 징후였다. 나는 이제 르 부리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르 부리의 진술은 이제 유럽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만큼 우리도 권태롭고, 그들만큼 우리에게도 샹그릴라가, 소비할 수 있는 동양이 필요하다.

– 윤여일(수유너머 R)

응답 1개

  1. cman말하길

    샹그릴라까진 가지 못했는데 리장과 다리는 낮과 밤에 돌아 보면서 나름 행복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도시처럼 다소간 상업화가 되더라도 그리고 인위적인 변경이 되더라도 방문객에게 전통과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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