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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속으로>, 반전을 날려버린 반공영화

- sros23

2010년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병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개봉된다고 하면 어떤 영화가 상상되는가? 반전의 메시지나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기대했다면 < 포화속으로>를 보지 말기 바란다. < 포화속으로>는 반전이 아닌 반공 메시지를 담은 ‘무용담’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냉전시대 ‘공식입장’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으며, 어머니를 비롯한 온갖 클리셰들이 포탄처럼 떨어진다. 국가보훈처가 150억원 예산으로 극장판 < 배달의 기수>를 찍는다면 이와 흡사할 것이다.

첫 자막부터 영화의 시각을 말해준다. “1945년 광복…소련과 미국의 남북한의 점령…북한의 남침…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전역 함락…” 지겹게 듣던 풍월 아닌가. 하지만 한국전쟁의 기원이 그리 명쾌한 건 아니다. 개전 당시부터 현재까지 남침설,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논란이 있었으며, 현재에는 북한이 먼저 발포한 것은 맞지만,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가 전쟁의 기원을 설명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정도로 해방이후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남한단독정부 수립이후 38도선 상에 교전이 빈발하는 상태였음이 주지된다. 따라서 ‘평화로운 남한을 전쟁준비를 마친 북한이 기습 공격하여 전면전을 벌였다’고 간단히 말해버리는 것은 반공교육 이상의 숙고가 없는 시각이다.

영화는 1950년 8월 포항여중을 사수하던 학도병들이 인민군과 접전을 펼친 실화와 당시 발견된 ‘학도병의 편지’를 뼈대삼아, 학도병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독의 상상을 살로 입힌다. 첫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전투장면은 학도병(최승현)을 시점의 주체로 놓아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부대는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고, 학교 운동장에 일군의 학도병들이 한 트럭 내린다. 영화는 이들의 ‘군기가 들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주며, 곧이어 학도병들 간의 껄렁한 갈등이 이어진다. 권상우는 < 말죽거리 잔혹사>에서의 “한판 뜰까?” 모양새 그대로이고, 최승현은 ‘범생이’ 반장역을 꾸역꾸역 해낸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한판 뜰’ 때 서로 “겁나면 도망가라” 외치는 장면은 이들이 자신의 공포를 외화하고 있을 뿐, 이들 간 갈등은 허깨비임이 드러난다. 즉 영화가 살로 입힌 드라마가 ‘공연한 뻘 짓’이었음이 드러난다.

영화는 학도병, 즉 ‘어린 군인’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두 번 드러낸다. 북한 소년병을 마주한 남한 학도병이 갈등하는 장면과 인민군 소좌(차승원)가 남한 학도병에게 ‘간지나게’ 투항을 권유하는 장면이다. 턱없이 어린 적을 대할 때 증오보다 연민이 앞서는 휴머니즘이 그려지는가 싶지만, 곧바로 정리된다. 북한 소년병은 ‘군인으로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는다’는 말을 외치고 죽고, 남한의 학도병 역시 스스로를 ‘군인’으로 인식한다. 즉 ‘아무리 어려도 총을 든 이상 군인이요 적(敵)’임을 영화는 어린 군인들의 입을 통해 스스로 확언하게 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영화의 서사를 통해서도 관철된다. 어리고 경험이 없어 도통 못 싸울 것 같던 학도병들도 적과 마주하자 한시간만에 작전을 짜고, 무기를 제조하고, 진지를 구축하며, 백전노장 뺨치는 전투실력을 보여준다. 람보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 드높은 사기와 자살폭탄테러도 마다않는 적대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인민군 소좌는 죽어가는 학도병에게 말한다. 이 비극은 너는 남조선에서, 나는 북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남한군 대위(김승우)는 “자기들 나라이니, 자기들이 지키겠지”라 말한다. 영화는 이들의 입을 통해,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애국심으로 싸우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전쟁에 있어서 사실이 아니다. 이들은 남조선과 북조선이라는 각자의 ‘나라’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모두 1920-30년대 식민지조선에서 태어났다. 불과 2년 전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분단을 우려하긴 했지만 조선인 누구도 ‘하나의 조선’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선 상태에서도 북한은 평화통일을 남한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 내내 서로를 ‘괴뢰’로 부를망정, 안정되고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진 않았다. < 포화속으로>는 한국전쟁을 마치 확고한 국경선을 사이에 둔 두 개의 민족국가 간의 전쟁인양 그린다. 이를테면 남한의 학도병을 프랑스를 쳐들어온 독일에 대항하는 프랑스 애국 청년들인 양 그리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한반도에 어떤 정체(政體)를 수립할 것인가를 사이에 둔 이념적 갈등이었건만, 영화는 이념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뗀 체, 마치 함경도에서 태어났나 경상도에서 태어났나 하는 지역 갈등이 본질인양 그린다. 이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 남로당, 빨치산, 월북인사 등의 존재로 드러나는 이념갈등과 이로부터 야기된 ‘내전이자 세계전쟁’이라는 한국전쟁의 독특한 위상이 전혀 숙고되지 못한 결과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나 1960년 4.19 학생운동에서 보듯이 당시 중․고생은 어리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판단 주체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학도병들이 무슨 마음으로 참전했는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참전동기가 설명되는 이는 부모가 빨갱이에게 죽어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미군물건을 팔던 시장 통 깡패로 학생신분을 선망해 왔으며, 사람을 죽여서 소년원에 가느니 참전을 택했다는 ‘가짜’ 학도병(권상우)뿐이다. 영화 속 학도병들은 자신이 참전한 이 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과 인민군과의 전투행위가 과연 옳은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두렵다, 하지만 용기를 내자’ 사이의 1차원적 진동을 오가다, 느닷없이 람보로 변신할 뿐이다.

영화 속 (가짜)학도병들은 호기심에 무기를 집어 들고 좋아한다. 감독 역시 마찬가지이다. 클로즈업과 콘트라스트로 디테일을 살린 영상미학에 매료되어, 전쟁영화라는 장르를 집어 들고 좋아할 뿐 한국전쟁의 의미를 사유하지 않는다. 스펙터클을 중시했던 < 태극기 휘날리며>조차 학도병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고, ‘보도연맹사건’의 민간인 학살과 주인공이 국방군에서 인민군으로 갈아타는 것을 보여주는 금기위반을 통해, 남북을 선악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반공이데올로기를 교란시켰다. 그러나 < 포화속으로>에는 아무런 위반도 없다. 인민군은 호전적인데다 김일성 1인 숭배에 ‘쩔어’있고, 남한군은 전쟁을 원하진 않지만 용감하게 응전한다.

해방정국의 역사를 말소한 채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매끈한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한국전쟁을 국가 간 전쟁인양 사유하며, 북한을 통일의 당사자가 아닌 적대국으로 돌려놓고, 평화를 위해선 ‘어린 학생들조차’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 영화의 사관은 건국절, 통일부 존폐논란, 북한 주적론, 전쟁불사론 등으로 드러나는 현 정권의 ‘뉴라이트’ 사관과 닮았다. 하지만 12살에 도미하여 ‘아메리칸 스탠다드’의 사고를 체화한 감독에게 이를 묻는다면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

모든 것은 가치중립적이지만,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있다면 그건 전쟁일 것이다.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주말연속극 < 전우>를 비롯해 각종 매체에서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작업이 마련 중이다. 이들이 부디 ‘반공’이 아닌 ‘반전’을 전하는 작품이 되길 기원한다.

– 황진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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