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2호] 그 어떤 ‘혁명’보다 위대한 것은 오늘의 ‘일상’이다

- 기픈옹달(수유너머 R)

W-ing의 인문학 실험

그 어떤 ‘혁명’보다 위대한 것은 오늘의 ‘일상’이다

그 어떤 ‘혁명’보다 위대한 것은 오늘의 ‘일상’이다

해마다 연말이면 늘 그렇듯이 많은 시상식들이 열린다. 2009년의 연말 시상식, 그 중에서 내가 관심 있게 본 것은 예능부문의 시상이었다. 각 방송사마다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리얼’, ‘야생’, ‘도전’ 이라는 타이틀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웃음을 보여주는 컨셉이다. 때로는 오락프로그램인지 휴먼다큐멘터리인지 어리둥절할 만큼 온 몸으로 진지하게 보여주었던 그들의 노력만큼 시청자들도 웃었고, 그에 따른 상도 푸짐하게 돌아갔다. ‘몸’으로 고생한 만큼의 인기와 보상이 주어진 그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수상소감을 하는 모습을 보자니, ‘몸’으로 부대꼈던 우리의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문학 수업, 새로운 것을 시작했다는 자부심은 오래가지 못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고민은 더해 갔다. 왜 우리의 몸에 인문학이 체화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주위 분들과 고민을 나누었고,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공부는 어느 정도의 강제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우리는 그동안 우아하게 인문학수업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책읽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고미숙선생님의 ‘호모쿵푸스’를 시작으로 매주 수요일 오전 9시에 모여 함께 큰소리로 책을 읽었다. 책을 잘 읽는 사람이나, 책을 못 읽는 사람이나 모두 하나가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한 장 두 장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는 공명 속의 짜릿한 우정을 맛보게 되었다. 그렇게 책 읽는 소리를 들으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내 귓가에 울려오며, ‘너는 어떻게 살았니?’ 라며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몸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공부는 머리로부터가 아니라, 몸으로부터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등산과 길벗서당! 그렇게 우리의 일상을 바꿔보려는 움직임은 하나씩 시작되고 있었다.

그동안 등산이라고는 연례행사로 5월1일 근로자의 날에 등산을 했던 것이 전부였는데, 1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하자니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 등산 코스인 북한산, 정작 산 입구에도 가기 전에 이미 힘이 빠져버려 한숨을 내쉬던 우리들이었지만, 한 번, 두 번 가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산에 오르는 재미도 늘어갔다. 함께하거나 혼자이거나, 땀 흘린 뒤에 마시는 물 한잔의 시원함과 도시락을 나누어먹는 소소한 재미, 길을 잃어 절대고독의 순간을 맛보기도 하며, 때로는 큰 소리로 고전을 암송하며 내려오는 떠들썩함과 더불어 우리들은 어느 덧 북한산을 거쳐 도봉산을 오르게 되었고, 이제는 등산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1주일에 두 번가는 길벗서당, 1시간 30분씩 요가를 하고, 고전을 공부했다. 요가를 하는 도중에 웃음보가 터져서 혼이 나기도 했고, 가끔씩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지만, 내 몸을 알아가고, 내 몸과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움이 생겼다. 또한 오랜만에 해보는 암송은 분명 지금의 나이를 실감케 했지만, 녹슬었던 머릿속을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날 배운 것은 모두 암송을 해야만 방을 나갈 수 있기에, 우리는 열심히 암송하고 또 암송했다. 그러다보니 공부에 자신이 없던 친구나, 검정고시에 계속 떨어졌던 친구에게는 새로운 자신감을 찾게 해주었고, 함께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해주었으며,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W-ing에 찾아온다. 왜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강사들은 어떻게 소개받았는지, 커리큘럼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강사와 커리큘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의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공부하는 것이며,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만큼 몸도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만이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러한 확신을 갖기까지 우리는 많은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기본 학습도 부족한데 무슨 인문학이냐고, 조직에서 어떻게 1주일에 한 번씩 등산을 가냐고, 친구들은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실무자들은 사회복지의 권위를 내세우며 떠났다.

‘의식은 바뀌었지만, 몸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일상으로부터의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과거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일을 얼마나 어렵고 두려워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혁명을 꿈꿨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주도적인 여성이 되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기에 함께 인문학 공부를 해보자고 시작한 것인데, 세상의 그 어떤 혁명보다도 어려운 것이 바로 나의 일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소박한 나의 일상이 모여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10년에도 여전히 우리는 인문학 공부를 할 것이다. 화요일 오전에는 인문학 강좌를 듣고, 수요일에는 길벗서당에 가며, 목요일은 등산을 가고, 금요일에는 함께 책을 읽을 것이다. 일상의 위대함을 알기에 우리가 가는 길이 그 어떤 혁명가의 길보다 의미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공부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싶다.

– 최정은(W-ing 대표)

응답 13개

  1. 지장보리말하길

    여러 아우성에도 뚝심있게 버티는 힘이 공부의 정수로군요. ^^

    버티는 건 힘들다. 그러나 친구랑 같이 하면 덜 힘들다.
    역시 공부와 친구는 한 쌍이군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2. 레비나스말하길

    최대표님, 열정과 비전에 늘 도전받고 감동하고 있습니다. 윙의 더큰 도약과 발전을 기대하겠습니다.

  3. 온고지신말하길

    인류 역사의 수많은 학자들, 그중에서도 상아탑에 갇혀 진리 연구에만 매몰되어 진실을 깨우치지 못한 그 어떤 사람들 보다도 의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최정은 대표가 진정한 혁명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욱스말하길

    그 어떤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일상을 바꾸는 것이라는 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5. 안티고네말하길

    아… 정말 감동입니다!! 새삼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네요^^;;;;;

    • 줄리말하길

      감동은요 뭐, 우리는 그냥 이렇게 지지고 볶고 살아요~

  6. 무지개꽃말하길

    저역시 머리로 하는 공부의 한계를 넘어
    부모와 교사가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현장에서
    공부를 몸으로 일상에 녹여내는 즐거움에 뒤늦게 픅 빠져들게 된 사람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머무는 공간에서
    일상을 나누며 함께 공부하면서 성장해간다는 일,
    제게는 정말 진정성이 느껴지는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수유너머 공간과의 인연을 놓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7. 고추장말하길

    정말 배운다는 건 무얼까,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네요. 제 스스로 공부를 업으로 삼는다 생각하지만, 정작 그 공부란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윙의 여러 이야기들이 여기 많이 실렸으면 좋겠어요. 댓글이라고 쓰여있지만, 그냥 짤막하게나마 이러저런 이야기를 여기서 나누면 좋겠네요.^^ 좋은 칼럼 고맙습니다.

    • 줄리말하길

      우리가 앎으로 연대한다는 것은 곧바로 서로의 삶에 연대하는 일… 이라고 말한 고추장의 말을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8. 쿠카라차말하길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라는 말이 절실하게 와 닿네요. 말은 참 쉬운데, 실천하기는 참 어려운 거 같아요. 좋은 거 배웠습니다.

    • 줄리말하길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라는 말, 저도 수유너머에서 배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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