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이데이

닥치고 편지

- sros23

어느 정신분석학자의 육아일기: 매이데이

닥치고 편지

“아빠, 근데 이거 뭐야?” 냉동실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꺼내겠다며 들어 올려달라던 매이가 냉동실 문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묻는다. “응? 아! … 칸차나 언니야” “괜찮아?” “아니, 칸차나라고 저기 멀리 스리랑카에 사는 언니랑 그 언니 엄마야”

그동안 그 사진이 거기 붙어 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매이가 일깨워줬다. 칸차나는 2005년부터 우리 부부가 ‘플랜 코리아’라는 NGO를 통해 1:1 결연을 맺어 후원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11살 소녀이다. ‘플랜 코리아’는 개발도상국 어린이를 돕는 국제 NGO 단체인데, 후원자와 아동 사이에 사적인 친밀감을 형성하면서도, 아동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동이 사는 지역에 상수도나 학교를 만들어주는 사업을 펼친다고 한다. 2005년에 TV에서 후원독려 콘서트를 보고 뭉클해진 아내가 가입하자고 해서 그러자 하였는데, 이후 칸차나의 인적 사항과 사진이 왔고, 그 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칸차나의 사진이나 칸차나가 그린 그림, 그리고 칸차나가 사는 지역 아동들의 근황과 환경 개선 소식이 우편으로 날아온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칸차나에게 우리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아내도 처음엔 사이트에도 방문하고 어떤 사진을 보낼까 같은 걸 묻기도 하더니, 요즘은 연말정산 때나 후원금 영수증을 챙길 뿐이라고 겸연쩍게 말한다. 개인적인 선물은 후원아동과 다른 아이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참으로 지당한) 이유로 얼마전부터 금지되었지만, 후원자의 소식과 연대의 인사는 ‘플랜 코리아’가 적극 권장하는 사항임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한 번도 편지를 쓰거나 사진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물론 순전히 게으름의 소치이지만, 한편으로는 칸차나가 공연히 우리의 사진이랑 편지를 보고 ‘와, 한국 사람들은 꽤 잘 사는구나.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가보고 싶다’ 는 식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마뜩지 않고, ‘꿈이 뭐니? 용기를 갖고 꿈을 일구라’는 식의 무책임하고 상투적인 인사말 따위를 건네는 것도 멋쩍다는 느낌이 있는 탓이다.

미국에 사는 아내의 친구와 아내의 대화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을 때 그 집에서 며칠 묵기도 하고, 그 친구 역시 미국인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우리집에서 묵을 정도로 아내와 절친한 그녀는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iveness)’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미국의 민주시민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연구소에서 취업을 하고 미국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사는 십수년동안 미국시민권을 얻지 않고 살다가 순전히 오바마를 찍기 위해 ‘한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고 말할 정도로 예민한 정치의식의 소유자이다. 한국에 있는 그녀의 언니도 지역활동을 하는 민주시민인데, 그녀의 언니가 “이제 한국의 시민들도 국내의 빈곤계층보다 해외의 빈곤아동에 더 많은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니, 과연 그러한지, 한국은 물론 미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제3세계의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황이 낫다는 이유로 그 문제는 이제 덮어도 되는 것이지 혼란스럽다며 아내와 길게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언니의 말은 한국의 진보세력도 민족주의에 갇히지 말고 세계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 빈곤계층에 대한 관심의 이동을 언급한 대목은 마음에 걸렸다. 이는 빈곤문제를 시혜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한국도 웬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외국의 못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신자유주의 이래 미국이나 한국이나 국내 빈곤계급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빈곤 문제를 정치 문제로 사유하지 못하고 투쟁의 기반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안일한 문제의식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몇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한 슬라보예 지젝은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을 근본주의자들이 더 싫어하는데, 그에 의하면 미국의 ‘민주시민’들은 흑인이나 동성애자, 해외의 인권 약자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용과 관심 속에서 정작 자국의 계급문제를 은폐하고 있다고 한다. 아내가 전한 그 친구의 고민을 접하노라니, 새삼 지젝의 지적이 떠올랐다. 나와 아내는 먼 나라의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은 동정 받아 마땅하지만, 옆집에 사는 노동자 계급의 ‘폭력적인’ 이념과 항거는 참을 수 없다는 식의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정말 문제가 아닌가 하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때 엄마 젖을 물고 곤한 잠을 청하려던 매이가 소리를 빽 지른다. “아빠, 시끄러워.” 하긴 정신분석은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할 때가 있다. ‘진짜 행위(국내의 계급투쟁을 활성화)를 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가짜 행위’(바깥의 소수자에게 관용의 태도를 갖는)의 논리는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매달 3만원의 후원금만 아내 통장으로 자동이체 시켜놓은 채 칸차나란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진 나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으로, 해외 빈곤아동 돕기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데 이토록 열을 올리는게 아닌가?

지젝은 모두가 (상황의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는) 거짓 행위에의 참여를 강요할 때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급진적일 수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난 이말에 동의하진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틀리더라도 뭔가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나 ‘멈춰 있는 시계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말은 나쁜 말이다. 그건 삶(운동)을 부정하고 죽음(정지)을 예찬하는 말이다. 멈춰 있는 시계가 맞춘 하루 두번의 시각은 사후적으로 추인될 뿐, 현재의 시계 바늘은 아무런 의미도 지시하지 못한다. 반면 5분이건 10분이건 빠르거나 늦는 시계는 언제나 틀린 시각을 제시하지만, 매번 5분을 빼주거나 10분을 더하거나 심지어 조금씩 더 늦거나 빨라지는 정도까지 감안하여 읽는 방식을 통해, 활용가능한 근사치를 생산해낸다. (멈춘 시계가 낫다는 말은 아마도 멈춘 시계는 멈춘 것이 보이므로 잘못된 시각을 인지할 위험이 적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 논리대로 라도 멈춘 시계는 빨리 폐기되는 것이 상책이다. 혹시라도 작동되는 시계로 오인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펠레의 저주’가 화제다. 펠레가 월드컵 우승이나 선전을 예언한 팀은 항상 예상 외로 부진하다는 얘기다. 펠레의 예언은 언제나 틀리지만, 거꾸로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아들인지 딸인지,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묻는 질문에 60%의 적중률을 보이는 점쟁이보다 10%의 적중률을 보이는 점쟁이의 말이 더 가치 있다. 전자는 ‘랜덤’에 가깝지만, 후자의 예언은 특이성이 있으며 뒤집어서 받아들이면 90% 적중률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정밀도가 높은 총은 영점보정을 통해서 사용할 수 있다. 진리를 맞추지 못하더라도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주체의 행위는 의미를 생산할 수 있으며, 액션과 리액션을 거친 꾸준한 보정을 통해 진리에 근접해갈 수 있다.

진리를 실체(존재)와 그 표상(관념이나 이미지)의 일치에서 찾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게 어떻게 표상될지 염려한다. 표상작용에 신경쓰다보면 주체의 실천과 변화는 억제되기 마련이다. 타자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할 때 타자는 주체를 꼼짝 못하게 하는 지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요즘 매이는 자기 옷이 얼마나 예쁜지가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어린이집에서 데려올 때마다 “아빠, 허네님(하나님? 아니 ‘선생님’ 발음이 그렇게 들린다)이 이 옷 예쁘다고 그랬어.” 한다. 그저께 매이가 유나를 만나자 마자 “유나 언니, 이 옷 예뻐?” 하며 두 손을 어깨에 올리고 엉덩이를 살랑살랑하며 이쁜 척을 했다. 그러자 유나는 피식 웃으면서 “따른 사람 앞에서 자기가 예쁘다고 자랑하네. 히히. 매이야. 그러면 친구들한테 왕따 당해” 라고 선배다운 충고를 했다. 깜짝 놀랐다. 타자에게 자기가 예쁘게 보이는지 신경 쓰기 시작한 매이도 이제 1년 반이 지나면 그런 과시 행위가 타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경지에 이르겠구나.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게 타자에게 어떻게 보일지 염려하는 ‘이상한 거울 나라’에 들어가게 되겠구나. 부디 그 타자의 표상이 진리는 아니라는 걸 알기를 바랄 뿐이다. 그 때문에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우리집 사진과 소식을 보내는 것이 칸차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공연한 고민은 그만 하고 이제 칸차나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후원자’로서가 아니라 지구촌에 같이 사는 ‘친구’로서. 어떤 메시지나 이미지를 담은 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지구촌의 한 가난한 마을과 우리집 사이에 소통과 연대의 끈이 되는 편지를 닥치고 써야겠다.

응답 2개

  1. 모모말하길

    참으로 대견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알고있고 그래야마땅하다고 여기고있고 옳은거라여기며…
    정작 실천하지못하는 한사람입니다…
    건전하고 올바른 사고도 소중하지만
    실천이 더 가치있는것 같습니다.
    늘 글을통해 배우지만
    오늘도 소중한걸 배우고 갑니다…

    • 매이엄마말하길

      그다지 대견한 일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위에 고백하였듯이, 플랜코리아에 월 3만원의 후원금을 통장에서 자동이체를 시켜놓았을 뿐, 후원아동에게 저희 소식도 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견한 일이라면, 정말 누구라도 대견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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