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황당함, 쓸쓸함, 따뜻함

- ihunnyi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황당함, 쓸쓸함, 따뜻함
– < 카스테라> 박민규 / 문학동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중등교사임용시험에 보기좋게 떨어졌다. 나는 하루빨리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빠는 집안형편을 생각해서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이 시험에 합격하자 직장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의학공부를 하고 싶어하던 동생은 학비가 들지 않는 간호사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입시를 두 번 실패하고서야 대학에 들어간 나만 여전히 부모님의 짐이 되고 있었는데 중등교사임용시험마저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임용시험을 치기 전이었다. 대학 4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가끔씩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혜숙아, 대학원은 안 된다. 이제 아버지 가게도 그렇고, 내가 하는 이 일도 그렇고 더 이상 네가 공부하는 건 무리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계속 공부하고 싶어하는 나의 마음을 읽어내신 어머니께서는 가끔씩 이런 말로 허공에 뜬 나를 땅 위로 끌어당겨 주셨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양복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가게세만 물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머니께서는 전화기 소독일을 하셨는데 육체적으로 많이 지치신 상황이었다.

그해 임용시험에 떨어진 후 학원 몇 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임용시험 재수를 하는데 필요한 돈을 직접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급한 나의 마음과 달리, 학원에서는 당장 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어 혹시 반이 늘어날 때를 대비해서 강사를 모집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정성껏 썼던 나의 이력서는 학원장의 손에 닿자마자 서랍 속에 잠자는 신세가 되었다. 몇 개월 후 교생실습을 했던 여자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게 되었다. 출산휴가로 학교를 쉬는 교사를 대신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두 달 동안(지금은 출산휴가가 석 달이지만 그 당시에는 두 달이었다.) 번 돈으로 대학 동기 몇 명과 함께 임용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임용시험 문제가 객관식에서 서술형으로 바뀌던 해였다. 어떻게 대비해야할지 난감했던 나는 서울에 있는 임용시험 대비 학원에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숙소는 신림동에 있는 독서실이었다. 나에게 숙소를 구하는데 고려할 요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기간제 교사를 하며 두 달 동안 번 돈으로 숙소에 드는 비용을 해결해야 했고, 학원비를 내야 했고, 밥값을 내야 했고, 책을 사야 했다. 그래서 가장 싼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고시원조차 사치였다. 그래서 일인실로 칸이 나누어져 있는 독서실을 구했다. 한 사람이 누우면 가득 차는 공간이었다. 밤에 잠을 자기 위해서는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야만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독서실에서는 잠만 해결했다. 너무나 갑갑했기 때문에 학원에 가지 않는 시간을 그곳에서 모두 보낸다는 것은 악몽이었다. 그래서 학원 강의가 없는 날에는 근처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밥은 학원 근처 식당가 골목에서 가장 값싸고 맛이 괜찮은 곳에서 먹었다. 식사시간이 부족해 햄버거를 먹을 때는 가장 저렴한 메뉴를 주문했다. 감자튀김을 먹는 날은 회식날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더운 여름날, 두 달을 그곳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박민규의 < 카스테라>(문학동네)를 읽으며 서울에서 보낸 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낯선 곳에서 쓸쓸했던 시간, 교단에 설 수만 있길 간절히 바라며 공부하던 시간, 그리고 과연 내가 임용시험을 통과해서 교사가 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에 젖어들던 시간……. 이 책에 실린 소설작품 속에는 우리 주변의 일상이 담겨있다. 그 일상은 남루하다. 텔레비전 드라마 화면마다 비치는, 사랑놀음에 빠져있는 청춘남녀는 없다. 잘난 주인공도 없다. 그저 88만원 세대의 자화상 혹은 현실과 타협한 채 살아가고 있는 386세대의 자화상이 있는 그대로 펼쳐질 뿐이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지난 날 혹은 오늘날의 내 모습이기도 하고 오늘도 길거리에서 나와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가까운 미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 느꼈던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황당함 외에도 각 작품 속 상황들이 황당했다. 중국인을 모두 냉장고 속으로 넣고, 목욕탕에서 너구리가 등을 밀어주고, 플랫폼에 기린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느끼는 황당함.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느끼는 쓸쓸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넘길 즈음엔 따뜻함이 느껴졌다. 소외되고 힘없는 인물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따뜻함이었다.

이 소설집은 열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좁은 방에서 소음이 큰 냉장고와 동거하는 대학생, 인턴사원으로 일하면서 정식 사원이 되기 위해 인사부장의 몹쓸 짓도 감수하는 청년, 지하철에서 푸시맨(출근길 지하철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탈 수 있도록 밀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하는 실업계 고등학생, 여러 차례 공무원 시험에 실패를 한 후 외진 유원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시 시험 준비를 하는 청년, 한때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고 시골에 내려가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 마을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삶의 대안을 찾고자 하나 외계인의 습격(외계인은 현재 우리 농촌을 초토화시키는 농촌정책으로 나에게 읽혔다.)으로 무너져 가는 386세대 등 온갖 인물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 보기엔 별 볼 일이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모두 아프고 힘겨운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누군가에게 상처주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자기 운명을, 삶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런 주인공들을 작가는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안는다.

특히 내게 가장 와닿았던 작품은 < 갑을고시원체류기>였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를 맞게 되면서 주인공의 가족들은 흩어진다. 주인공은 친구의 집에 기숙하다가 친구 어머니의 눈치를 받고는 그 집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잠시 정착한 곳이 갑을고시원이었다. 이곳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외된 사람들이다. 고시(考試)를 준비하는 고시생은 한 사람밖에 없다. 인생이 고시(苦試)인 사람들이 그 좁은 공간에서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를 억제해 가며 살아간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주인공은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 갑을고시원체류기>중에서

“샘, 방을 구하러 부산에 있는 고시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어떤 허름한 고시원의 방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좁은 방 앞의 신장에 신발이 여러 켤레가 있지 않겠어요. 한 사람이 생활해도 불편한 곳이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가난해서 오갈 데 없는 가족이 살고 있었어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일을 하며 공부하던 제자가 나를 만나러 와서 들려준 말이었다. 이제는 도시 빈민들의 안식처가 된 고시원. 내가 한때 생활했던 독서실도 이런 곳이었구나. 돈 없는 젊은이들이 낯선 도시에 와서 잠들 수 있는 곳. 아직도 그 독서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고시원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돈 없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을까? 그 시절 내 모습을 이제는 오랜만에 나를 찾아오는 제자들 모습에서 발견한다. 대학에 입학한 직후 들뜬 목소리로 대학 캠퍼스의 낭만을 자랑하던 제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이제는 졸업을 늦추기 위해 애를 쓰는 목소리만이 들린다.

< 카스테라>의 주인공은 세상의 부패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냉장고에 가장 소중한 것과 이 세상에 해악이 될 만한 것을 넣는다. 아버지, 어머니, 미국, 중국 사람들까지도……. 시간이 지난 후 냉장고의 강한 소음은 사라지고 그 속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 한 조각이 놓여있다. 이 카스테라를 씹으며 주인공은 눈물을 흘린다. 세상의 해악과 소중함을 녹여내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시선, 지친 사람들을 위해 갑을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길 바라는 마음을 간직한 작가의 시선이 우리 삶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추웠을 테니까.
많이 추웠을 테니까 말이다.
– < 카스테라>중에서

– 풍경지기 박혜숙

응답 2개

  1. 고추장말하길

    뒤늦게 댓글 답니다. 인생을 강물에 비유하는 그 흔하디 흔한 수사법의 위력을 알겠어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정말 잔잔하면서도 깊게 흐르는 무언가가 느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2. 매이엄마말하길

    이렇게 인생과 경험이 묻어나는 정감어린 글을 어떻게 하면 쓸수 있는지…20대에 가출해서 독서실에서 몇달 살았었던 삭신 쑤시는 기억이 새록새록…저는 소설을 잘 읽지 않지만, 선생님이 추천하신 저 책은 한번 도전해보고 싶군요. 박민규의 재밌는 문체도 조금 기대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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