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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또는 세계의 상실

- sros23

오사카 주소 재판

2006년 1월, 오사카 지방법원은 4년간 공원에 거주해온 홈리스 남성에게, 그 공원을 주소지로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홈리스의 공원불법점거를 인정했다는 식의 시비가 있었지만, 주소를 인정한 것은 공원 점용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그가 거기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한 것이다. 거주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거주 사실만을 인정한 것인데도 왜 그리 사람들은 난리를 쳐야 했을까. “그것은 쓰레기처럼 배제되어야 할 존재였던 홈리스들도 이 세계에 거주 자격이 있는 인간이며 시민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홈리스의 현실

‘홈리스(homeless)’란 하나의 상태를 의미한다. 길 위나 공원에서 잘 수밖에 없는 상태, 열악하고 불안정한 주거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단지 노숙자만을 홈리스라고 부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2003년 공표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에서 노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은 2만 5천여명 정도다. 하지만 대개 이 숫자는 공원이나 하천부지 등에 천막 등을 치고 눈에 띄게 노숙하는 사람들의 숫자이다.

조사에 따르면 남성이 2만여 명으로 81%, 여성이 7백여명으로 3%, 성별불명이 4천 명 가까이 되어 15% 정도이다. 성별불명이라는 것은 성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가 없을 때 천막 숫자같은 것만 세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천막도 없이 길 위에서 골판지 상자를 펴고 자며 아침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어떤 때는 겉보기에는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막차도 끊긴 시간에 버스정거장이나 지하철역, 지하도 등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즉 홈리스들은 숫자로 파악될 수도 없는 사람을 살고 있으며, 우리들 세계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존재, 비가시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홈리스, 혹은 홈이란 무엇인가

‘홈리스’란 ‘홈’이 없는 상태이지만, 그 ‘홈’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바슐라르는 “집이란 꿈을 지켜주고, 꿈꾸는 일을 보호해주고,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고 했다. 집이란 꿈을 꾸기 위해 필요한 공간,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해가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즉 홈이란 우리가 이 세계에서 장소를 점하고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조건, 한마디로 인권의 기초인 것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 세계 안에 거주하고 있다(wohnen, habitare)는 뜻이다. 그리고 거주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관여하고 융화하고, 친숙해지고, 돌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만 우리는 세계 안에 거주하는 것이고, 인간을 그런 자로서 정의하는 한에서, 우리는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런 식으로 타인과 관계맺는다. 우리가 거주한다는 것은 바로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갖는다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과 만나는 공간을 허용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홈리스가 되면 이 공간을 허락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불안하다. 불안이란 집에 거주할 수 없음(Nicht-zuhaus-sein), ‘마음이 편치 않음‘이고, 어떤 섬뜩함(친숙한 낯섬, Unheimlichkeit)을 경험하는 것이다. 결국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주의 공간을 갖지 못하는 한에서, 홈리스는 세계를 상실한 자, 세계의 박탈이라고 할 수 있다.

울타리치기와 배제

홈리스의 존재는 사실 우리 사회 자체의 성립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사람들은 홈리스들이 공공공 공간인 공원이나 하천, 지하도 등을 마치 제 것인양 사유화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홈리스의 존재 자체가 사적 소유 체제, 다시 말해 ‘사유화’에서 기인한다. 원래 세계는 누구의 것도 아닌,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겠지만, 언제부턴가 세계는 사적으로 소유가능한 것이 되었다. 사적으로 울타리 쳐진 방대한 공간의 틈새나 외부의 작은 공공 공간이나 시설에 사적 소유를 갖지 못한 이들, 거기서 추방된 자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공공 공간은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었던 세계의 흔적일 것이다. 근대 혁명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선언했지만 거주 장소를 빼앗긴 자들은 거기서 배제했다. 근대 들어 공간이 부르주아들에 의해 사적으로 독점되고 보편 권리들 역시 부르주아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허구적 공공성인 시민사회가 성립했다. 그 공동성은 집에 거주하는 자들의 공공성이고, 울타리 치기를 전제한 공공성이다. 여기서 내몰린 자들은 외부의 공공공간, 다시 말해 보호시설이나 자립센터 등의 시설에 울타리 쳐진 채 ‘격리’된다. 이는 사적인 울타리 치기의 세계에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에 대한 격리 수용 원리가 관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홈리스들은 현재 얼마 남지 않은 공공 공간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공익 보호나 공공성의 이름 하에 노숙자에 대한 강한 배제 논리가 작동한다. 공원을 산책하는 데 눈에 거슬리니까 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시 생각해보면 겨우 조금 남겨진 공공 공간을 더욱 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원을 소위 가진 자만의 회원제 공간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이는 새로운 인종차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왜 사람들은 홈리스 상태에 빠지는 걸까. 실업 등에 의한 노동 수입 상실이 일차적 원인이겠지만, 사실 실업 때문에 바로 홈리스에 빠진다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다. 공적 고용보험제도나 생활보호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면 그 도식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홈리스들 대부분이 종사하는 일용노동의 경우 노동조건도 열악하고 고용보험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기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주거가 없거나 노동능력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홈리스에 대한 생활보호가 거부되는 일도 많다. 앞서 공원 주소지를 둘러싼 법정 싸움도 연금 신청에 필요한 ‘주소’ 문제 때문이었다. 노동능력 문제에 대해서도 나고야 지방법원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이 나왔다. “노동능력을 활용할 의사를 갖고 있다해도 실제로 활용할 곳이 없다면” 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호 요건이 결여되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反)배제의 논리

왜 홈리스들이 거주 장소를 잃어야만 했던가에 대한 논리를 파고 들면, 우리는 거기서 자본주의적 토지 소유의 전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토지의 사적 소유, 자본주의 체제의 전제는 봉건적 신분관계 및 공동체로부터의 개인 해방, 거주 이전의 자유에 의해 승인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토지 소유의 전제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은 옮겨서 거주할 곳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체제를 유지하는 한, 그 대전제인 모든 사람의 거주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보상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토마스 페인은 「토지 배분의 정의」에서, 토지는 원래 ‘인류의 공유재산’이었는데 토지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어 많은 주민이 자연 상속권으로서 토지 이용권을 박탈댕했으므로, 이 ‘소유물을 가로채인 사람들’을 위해 국민기금창설을 제안한 바 있다. 자본주의 질서의 기초를 확립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자연적 권리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결국 갖지 못한 자에 대한 보상은 사회와 국민 전체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홈리스들은 사적으로 울타리 쳐진 토지에 합법적 거주가 불가능하므로 국민 전체의 책임으로 일정한 토지에 거주할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1) 공원들 공공시설에 거주할 자유를 승인해야 한다. 2) 더 나아가 공공시설처럼 인간 거주가 적당하지 않은 장소가 아니라,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의 확보를 요구해야 한다. 당장 공원에 천막을 치고 거주할 자유를 인정하라는 것은 현재의 사유재산제 논리로 보면 용인하기 어렵겠지만, 역으로 보면 사유재산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빈곤한 자가 공원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으므로 불가피한 노숙은 용인되어야 한다. 사유재산제가 용인된다면 노숙도 불가피한 경우 용인되어야 하고, 사유재산제가 보호된다면 홈리스의 거주권 역시 보호되고 안전하게 확보되어야 한다.

자립지원의 문제

홈리스를 향한 자립지원책이라는 것이 마련되고 있다. 하지만 이때 ‘자립’이란 무엇인가. 타자의 원조없이 혼자 힘으로 사는 게 자립이라면, 홈리스야말로 가장 자립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회사의 신세도 지지 않고 국가의 신세도 지지 않고 있으니. 자립과 원조를 양자택일로 파악하는 낡은 자립관념으로는, 홈리스의 자립을 위해 거주 장소나 고용 장소의 안정에 적극적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립 문제는 타자의 원조를 받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타자의 원조를 받더라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수단을 활용해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자기결정에 따라 살 기회를 보장받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제도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당사자의 활용가능성이나 활용능력이 낮다면 그들 제도를 활용해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천막이나 움막을 치고 폐품을 모아 생계를 꾸리는 홈리스의 경우 아파트에 들어가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움막보다 아파트가 쾌적한 거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일을 할 수 없어 생활보호 등에 더 의존해야 한다면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세계의 개조

홈리스가 세계를 사적으로 자르고 울타린 친 데서 발생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를 나누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만약 그런 구획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삶은 공적인 권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전체주의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울타리 치기와 배제가 아닌 세계 그리기가 가능할까. 세계를 새롭게 개조하는 것, 세계 변혁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세계는 사물이며 그 사물의 배치에 따라 그 모습이 결정된다. 그리고 세계는 사람들이 그것을 무대로 만나고 대화하고 활동하는 곳이다. 따라서 세계가 그런 곳일 수 있기 위해서는, 즉 세계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주거할 집이기 위해서는, “인간은 활동하고 말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홈리스들은 세계 위에 거주 할 장소를 점할 수 없어 다른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빼앗기고 있다. 공간에서 물리적으로 만나는 일은 있겠지만, 사람으로서 서로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장소도, 방법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실 불안은 홈리스들만의 것이 아니다. 홈리스들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사람들, 즉 ‘집에 사는 사람들’도 불안을 안고 있다. 이 불안이 이질적 타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서로 단절된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호소가 될 수는 없을까. 하이데거는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 향한 존재를 드러내 준다”고 했다. 불안이 세계 안에 있는 우리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관심을 불러일으켜, 자유로운 존재,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연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불안을 넘어, 단지 한 번 말걸기를 통해서도 서로 인간임을 깨닫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만남을 진행해가는 것이다.

실제로 홈리스들 중 일부는 자기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삶을 잇기 위해 공원에 천막을 설치하고 공원을 경작해서 작물을 재배해서 판다. 바로 거기서 만남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인근 주민들에게 값싸고 싱싱한 야채를 팔고, 우유팩 등으로 소품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내놓는다. 이런 식으로 홈리스들과 인근 주민들이 만남의 장소를 만들고 만나는 방법을 바꾸어가는 것, 이것이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 가능성을 여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부커진R 1.5호에 실린 사사누마 히로시(笹沼弘志, 시즈오카 대학 교육학부 교수. 헌법학 전공)의 논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수유너머 일본잡지읽기 세미나팀의 김영수 선생님이 번역해주셨고 논문 요약은 고병권이 했습니다.(원문 pdf파일 받기)

– 사사누마 교수 (요약:고병권)

응답 1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zune, yeo jea hoon. yeo jea hoon said: 일본의 홈리스..귀한 자료 감사합니다.RT @julymon: [22호] 홈리스, 또는 세계의 상실 « Weekly 수유너머 http://ht.ly/25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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