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덕
1.
여행을 떠나며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그렸다. 낯선 텍스트를 접한 독자의 이미지 말이다. 나는 장소를 텍스트로 삼아 한 명의 신중한 독자가 되고 싶었다. 낯선 텍스트를 대할 때 어떤 이는 자기 마음에 드는 일구만을 건져간다. 어떤 이는 행간을 읽어내기도, 전체상을 움켜쥐기도 한다. 장소가 텍스트라면, 행간은 그 장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직조해내는 삶의 논리일테며, 전체상은 역사에 값하리라.
그렇듯 장소를 텍스트로 삼는다면, 배경지식과 어학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종이로 된 텍스트를 읽을 때보다 행간과 전체상을 읽어내는 데에 더 큰 제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장소를 텍스트로 삼는다면, 그 텍스트의 템포에 발을 맞추고 굴절을 살피고 깊이를 탐사하기란 더욱 풍부하고도 민감한 감수성을 요구하리라. 그리고 그만큼 매력적이며, 그만큼 더한 사고의 훈련이 되리라.
2.
장소를 매개로 삼아 자신의 사고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자신의 사고를 매개로 삼아 장소를 옮겨 다니려면, 장소를 맞닥뜨릴 때 어떤 사고의 절차가 필요했다. 그것은 적어도 눈(보고)과 가슴(느끼고), 머리(판단하고) 그리고 몸에 배어 있는 습속(반응하는) 사이의 관계가 즉흥적이지 않도록, 그것들 사이에서 의미의 교환이 이루어질 때 그 절차를 되도록 면밀하게 살피는 일이었다.
그다지 근거를 갖고 내놓을 수 있는 발상은 아니지만, 한자어 덕(德)은 그 절차의 복잡함을 하나의 가치로서 형상화하고 있는 글자이지 않을까. 덕(德)을 행동(彳), 눈(目), 마음(心)에 복수(十)라는 의미가 결합된 글자로 이해한다면, 보고 느끼고 행동할 때 복수의 맥락을 의식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지 않을까. 괜한 해석일지언정, 어학능력도 배경지식도 부족한 자가 낯선 곳을 다닐 때 필요한 ‘미덕’이란 그 한계를 조건으로 삼아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과정 사이의 절차를 곱씹는 일이겠다.
3.
여행을 다니며 여행기를 썼다. 여행기를 쓰려면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고, 아울러 타지에서 벌어진 일을 독자에게 전달해야 했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 나는 타지의 사건과 맥락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아울러 내 체험에서 독자들과 공유할 만한 요소를 끄집어낸다는 ‘이중의 번역’에 도전해야 했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 간직해야 하는 물음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 어떻게 체험을 표현할 것인가. 가령 여행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생담’은 흥미롭긴 하지만 그저 열거될 뿐이라면 여행의 장식물로 ‘물화’되고 만다. 그것은 사고의 계기를 낳는 체험이라기보다 체험의 소멸에 가깝다. 낯선 광경을 맞닥뜨렸을 때 꺼내는 단편적인 감상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감상으로 응고된다면 사고꺼리로는 성숙하지 못하니 사고의 ‘소외태’이다. 아울러 소소하게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은 그 사건들을 아우를 수 있는 문제의식의 지평 위에 놓이지 않는다면, 그 경우 경험담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편의 나열이 되고 만다.
경험은 순간 발생했다가 사라지는데 어떻게 그 흔적을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의미 있는 형태로 가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특히 타지에 나갔을 때의 경험에는 언설의 영역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감각이 개재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놓치지 않고 거기서 구체적인 사유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경험담은 나 자신의 것이지만 내게 밀착되어 있지 않고 타인과 공유할 만한 요소를 품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표현을 일궈야 할 것인가.
4.
둘째, 타지에서 낯선 삶의 맥락과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보편주의와 문화상대주의라는 양 편향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사이 공간’에서 사고를 벼려낼 수 있을 것인가. 맥락이 다른데도 편의적인 감상이나 배경지식에 근거하여 안이하게 그 차이를 솎아내는 어설픈 보편주의는 경험의 고유성을 말살한다. 그래서는 타문화 속에서 자기 사고의 감도를 시험할 수 없으며, 타문화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없다. ‘여행의 사고’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생각의 편향이다.
한편 문화상대주의는 타문화가 지닌 고유의 논리를 인정하겠다는 태도이지만, 거기서 생각이 멈춰버린다면 타문화와의 의미 있는 접촉은 불가능하고 아울러 모어문화를 새롭게 이해할 기회도 놓치고 만다. 선생의 지적처럼 각각의 문화를 개별적인 실체로 간주하는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여 타문화를 이해할 때 모어문화를 비교항으로써 끌어온다면 모어문화는 분석할 수 없는 전제가 되어 버린다. 타문화를 체험하며 얻는 진정한 수확은 모어문화가 분절되어 하나의 실체로 간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며, 그런 인식이 있고 나서야 타문화로 진입할 수 있는 창구를 구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상대주의는 ‘여행의 사고’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5.
셋째, 타자성에 관한 물음이다. 여행이란 남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인데 여행기를 쓰다보면 타지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이라는 3인칭 복수로 뭉뚱그려져, ‘그들’의 이야기를 2인칭 단수 ‘당신’ 혹은 1인칭 복수 ‘우리’라는 막연한 한국어 사용자에게 전하게 된다. ‘그들’과는 구체적인 마주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지 알지도 못하지만 내가 ‘당신’ 혹은 ‘우리’라고 부르는 한국어 사용자보다 인식의 위계에서 더 먼 곳에 존재한다. ‘쓰면서 다니는’ 여행에서 ‘그들’과의 체험은 언젠가 ‘당신’ 혹은 ‘우리’를 향한 글감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그 여행에서 나는 ‘그들’을 만난 것일까. 그때 ‘만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6.
6년 전 중국의 한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타자는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꺼냈다. 다시 말하면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나의 바깥에 둘 것이냐, 안에 둘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어느 쪽으로 답하든 그녀는 점차 해결하기 어려운 곳으로 질문을 몰아갔다. 왜냐하면 그 물음은 딜레마여서 타자가 바깥에 있다고 하면 타자는 나의 외부에서 실체화되어 타자로서의 의미를 잃고, 타자가 안에 있다고 하면 모놀로그에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여행의 한 가지 성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그 물음에 “타자는 쉽사리 만날 수 없다는 태도로서만 만날 수 있다”라는 역설로 답하고 싶다. “만날 수 없다”라는 말은 타자와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쉽사리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겠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경계’를 ‘넘어선다’는 발상이 오히려 이쪽과 저쪽을 구분된 실체로 만들 수 있음을 경계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뒷부분의 “만날 수 있다”란 그 경우 타자는 주체의 바깥에서 실체화된 대상이 아니며, 어쩌면 그 만남에서 먼저 찾아오는 것은 아직 경험한 적이 없는 자기 자신과의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 만남이 있고 나서야, 무엇일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다른 대상과의 만남도 가능하다. 사실 여전히 답이라고 할 수 없는 물음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여행의 경험을 거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물음인 것이다.
– 윤여일
글 잘 읽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고 돌아오면 꼭 여행기를 쓰는사람으로서 마음에 와 닿고… 특히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저도 새겨보려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문화상대주의는 여행의 사고의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저도 공감합니다. 저는 현재 베트남에 살고 있고 공정여행 가이드로 일을 하고 있는데요,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 차이, 양자의 ‘다름’에 대해 설명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런 설명의 끝이 항상 ‘그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다른 것이죠’로 끝나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뭔가 부족하다 싶고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싶지가 않아요. 이러한 저를 위해서 ^^; 문화상대주의를 여행 사고의 출발점으로 두는 것에 대한 실제적인 예를 간단하게 들어주실 수는 없을까요? 한국과 베트남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저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운 글이군요. 음성지원도 되네.
근데, 2005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뭐 변화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