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너무 느긋하신 거 아니에요?

- 김대경

요즘 나는 내가 대한민국 국적이 맞는지 좀 걱정스럽다. 물론 얼마전 열심히 월드컵 응원도 했고, 6월 2일 선거에도 성실히 참여했으니 한국 국적이 맞긴 맞다. 근데 최근 만난 엄마들은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대한민국 엄마로서 내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얼마 전 옆집에 사는 초등1학년 엄마가 우리집에 차를 마시러 왔다. 일단 우리집에 아이들 책보다 내 책이 많은 걸 보고 엄마들은 무척 놀란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안 좋은 의미에서 놀라는 것이다. 애한테 기본적인 투자를 안하니까. 다른 집엘 놀러 가면 이제는 내가 놀란다. 거실과 아이 방에 빼곡히 꽂혀 있는 각종 전집들을 보면서. 물론 전혀 내색은 안한다. 무슨 아이들 책이 이렇게 많냐고 되물으면 내가 오히려 이상한 엄마 취급을 받을 테니까.

나는 애한테 전집을 사 준 적이 거의 없다. 서점에 파는 책과 전집을 파는 곳이 다르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전집을 파는 곳에 한번 가서 책을 보고서는 다시는 가지 않는다. 모르겠다. 왠지 마음에 안 들었다.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그 엄마는 여러 번 놀라워했다. 아이가 6학년인데 여름방학 때 특강을 안 보내고, 제주도에 가서 수영이나 탁구를 하겠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고, 특강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나를 보고 더욱 놀라고, 영어 학원에 안 보낸다고 했더니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엄마가 너무 느긋하신 거 아니에요?’한다.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며 내게 얘기를 했기에, 그 엄마가 집에 돌아가고 나서 혼자 앉아 한숨을 쉬며 생각한다. 정말 내가 너무 느긋한 거 아닌가? 지방에 사는 여동생에게 전화로 물어봐도, 같은 직장 동료한테 이야기해 봐도, 결론은 내가 비상식적이란다. 관리를 안 해도 너무 안 한단다. 아, 아이가 초등 고학년일 때부터 엄마가 이렇게 관리해야 하는 대한민국 시스템을 귀 아프게 듣다 보니, 나는 정말이지 내 국적조차 의심스러워진다. 그 사건 이후로 또래 엄마들을 만나면 대화를 나누기가 무척 조심스러워진다. 심지어 어떤 엄마는 내게 무슨 비책이 있거나, 대단한 철학이 있는 줄 안다. 근데 그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나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정도이다. 나더러 학교 끝나고 영어 학원 가서 수업 두세 시간 듣고 집에 와서 또 영어 숙제하고, 저녁에 밥 먹고 수학, 논술 배우러 가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난 못 할 것 같다. 그래서 학원에 안 보낸다. 애한테 물어봐도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단다.

얼마 전 저녁에 산책을 나갔는데, 아들이 대뜸 말한다. “나는 엄마, 아빠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왜?” “잘은 모르겠지만, 나한테 스트레스 안 주잖아. 우리 반 아이들은 자기 엄마 아빠 얘기가 나오면 무지 화를 내거나 미워한다고 말하거든. 난 그게 잘 이해가 안 가.” “애들이 왜 자기 엄마 아빠를 미워해?” “하기 싫은 거 자꾸 하라고 하고, 맨날 공부하라고 하니까 그렇겠지.” 그 중요하다는 공부를 안 시키는 대신, 부모 점수 안 깎이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내가 부모로서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순간이다.

또 얼마 전에는 기말 고사가 끝난 직후에 학교에 갔다 온 아들이 자기반에 어떤 여학생이 시험 성적이 떨어졌다고 부모한테 맞았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너무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팔에 얼음팩을 하고 학교에 왔더랬다.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폭력을 행한 부모의 심정과 떨어진 성적으로 괴로워하는 아이들, 전쟁같은 경쟁을 뚫고 올라가는 아이들에 치이는 아이들, 모두가 고통받는 현실, 어떻게 바꿀 수는 없을까? 상처 입고 학교에 나온 아이를 바라보는 교사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하는 생각에.

이처럼 오로지 자녀의 교육에 올인하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당당한(?) 엄마들에게 무척 혐오감을 줄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한다. 다니엘 페나크가 쓴 < 소설처럼>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의 중등 교사이자 작가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부모들에게는 외면당하겠지만, 오랫동안 학생들의 독서교육에 대해 고민하거나 학부모가 아닌 부모의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참 고마운 책이다. 경쟁과 암기의 풍토 속에서 자칫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도와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의 맨 첫 장에서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책 읽으라고 자기 방으로 내쫓긴 아이가 책에 코를 박은 채 졸고 있는 장면과 정작 부모들은 책을 읽지 않고 텔레비전을 즐겨 보면서 아이가 제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감시하는 학부모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 시간에 책을 읽어 주는 선생님이 나온다. 수업 준비는커녕 잡동사니 보따리를 학생들 앞에 잔뜩 펼쳐놓고 강의 시간 내내 책만 읽어주는 선생님(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교사는 아마 교원 평가에서 아주 낮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에게 학생들은 매료당하고, 책의 뒷내용이 궁금해 바로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뛰어간다. 저자는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제발 책 읽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말라고. 저자가 성토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책읽기의 매력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장면을 좀 길긴 하지만 몇 군데 인용해 본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들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을 한결같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 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거기에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하고 싶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어떤 학생이 어쩌다 수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교사를 만났다고 가정하자.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마치 예술의 한 영역을 가르치듯 수학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여 교사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활력으로 학생들 모두가 수학을 사랑하게끔 되었으며, 덕분에 고통스런 노력은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이 경우는 어쩌다 우연히 좋은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지, 결코 학교의 제도가 훌륭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차방정식을 통해서까지도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들만이 지니는 특질이다. 하지만 교과 과정에 그런 생명력이 포함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학교는 능력과 기능만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설사 독서가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행위는 아니라고 해도, 결국 독서는 공유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가며 신중하게 선택된 공유다. 만약 우리가 책을 선택할 때 학교며 평론이며 온갖 형태의 광고를 통해서 접하게 된 목록을 참조했을 경우와, 아니면 친구나 연인 또는 가족 덕분에 책을 읽는 경우, 결과는 자명하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로부터 천거된 책이다. 또한 책에 대한 느낌도 우선은 가장 소중한 이에게 먼저 전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언제나 소중한 사람의 얼굴만 떠오르라는 법은 없다. 어느 평론가나 선생님의 얼굴이(지극히 드문 일이겠지만)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독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피에르 뒤마예의 눈빛이며 목소리, 그의 조용한 표정이 종종 생각나곤 한다. 누구보다도 독자를 존중하던 그 덕분에 나도 그 같은 독자가 되고 싶다는 절절한 소망이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녔던 뒤마예 교수는 책에 관한 한 무한한 인내를 발휘하여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까지 했다. 늘 자신이 제일 아끼는 책을 우리에게 읽으라고 추천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제자인 우리를 존중하고 좋아했음에 틀림없다는 환상 말이다!

아이들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된 이른바 ‘교양 필수 권장 도서’ 따위는 으레 ‘고리타분’할 것이라고 속단을 해 버린다. 딱하기 짝이 없는 ‘수업 계획’의 현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수업 계획표’야말로 무엇 하나 도움되는 바가 없다(라블레, 몽테뉴, 라브뤼에르, 몽테스키외, 베를렌, 플로베르, 카뮈가 정말 ‘고리타분’하다는 말인가? 천만에, 무슨 그런 농담의 말씀을……). 정규 ‘교과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작품들이 ‘고리타분’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학생들이 안고 있는 부담감 때문이다. 읽어도 모를 것만 같은 두려움, 엉뚱한 답변을 할 것 같은 두려움, 작품 이상으로 또 다른 무언가를 작성해내야 한다는 두려움, 아예 국어라는 과목 자체에 대해서 완전히 깜깜절벽이 되어버린 것 같은 두려움만큼 문단의 행을 흩뜨리고, 의미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없다.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눈에 띈다. 현재 교육 과정을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대부분 선행학습을 해야만 하는 현실, 독서 인증제니 독서 이력철이니 뭐니 해서 학생들에게 책읽기를 마치 빚 독촉을 하듯 강요하는 현실, 방송이 개편될 때마다 찬밥 신세로 밀려나는 책 관련 프로그램들, 별 생각 없이 이것저것 짜깁기해서 만든 권장도서목록들, 의무감에서 비롯한 책읽기의 괴로움 등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면 무엇보다 먼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이 정도면 이 책이 거의 불온서적 취급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나이 들어 요즘 모처럼 즐기고 있는 독서의 형태가 바로 위에서 말한 10가지 권리에 모조리 해당하는 것을 보니, 저자의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독서의 즐거움을 해체한 독서행위가 만연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부모와 교사가 한번 곱씹어 볼 만한 많은 것들을 암시하고 있는 책이다. 아이들이 책읽기의 즐거움 대신에 숱한 학습지와 과제물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건 어쩌면 아이들이 누려야 할 행복한 시간을 우리가 무자비하게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이에게 지나치게 허용하고 있는 그 느긋함을 요즘 대부분의 아이들이 거의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느낀다면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학부모로서의 자격 미달에 해당하는 것일까.

– 김대경(고등학교 교사)

응답 3개

  1. 이야기캐는광부말하길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가 참 땡깁니다^^
    제게 이런 권리가 있는 줄 오늘 알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마리오말하길

    도서관에서 책 빌려 읽어보니 위의 내용과 똑 같습니다. 어떻게 233쪽짜리 책을 이렇게 잘 요약할 수가 있는지요? 놀라운 재능을 갖으셨네요. 부러습니다.

  3. 매이아빠말하길

    벌써 남들의 말에 귀가 얆아지는 제게 정말 샘물처럼 달콤하고 시원한 말슴 잘 들었습니다. 당장, 책 사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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