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복덩이가 된 겁쟁이 토끼

- 달맞이

달맞이의 책꽂이

-『할아버지와 나』마야 게르버-헤스 글 / 하이케 헤롤드 그림 / 유혜자 옮김 / 한림출판사

할아버지와 아이(손자)가 마주 서 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는 아이와 잘 지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뭔지 어색하다. 두 손을 무릎과 무릎 사이에 끼고 있다. 아이 역시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폼이, 어정쩡하다. 마음을 열기 전인 모양이다. 화가는 어색한 마주 보기와 빨간 색과 파란 색의 상의를 통해, 할아버지와 아이가 사뭇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할아버지와 손주 요나스의 이틀간의 동거기다. 겁쟁이 토끼가 복덩이가 되는 성장 드라마이며, 무덤덤하던 두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휴먼드라마’이다.

걸핏하면 우는 겁쟁이 토끼 요나스는, 무뚝뚝하고 잘 웃지도 않으며 친하지도 않는 할아버지와 이틀이나 지낼 생각을 하자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편치 않다. 할아버지 집은 방도 어둡고 어디선가 삐꺽거리는 으스스한 소리가 나고 거미까지 기어 다니는, 이상스런 곳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50시간 동안 겁쟁이 요나스를 ‘용감하고 씩씩한 사내아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니 요나스는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하지만 마법 같은 50시간은 요나스와 할아버지를 바꾸어 놓는다. 같이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농구를 하고, 정원을 둘러보고, 요리를 하고, 자고, 책을 읽고, 웃고, 주사위 놀이를 하고, 산책을 하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변해간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혼자 남았다는 두려움에 떠느라 무뚝뚝하게 변해버린 할아버지는 요나스를 만나 다정다감했던 본래 모습을 찾아간다. 요나스는 자신을 믿어주는 할아버지를 통해 다락방에 대한 무서움도 털어내고, 옆집 사는 친구들과 화해도 하며 자신감을 회복해 간다.

‘비쩍 마른 생쥐, 손에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 운동신경도 없는 사람, 엉터리 심판, 행운아, 읽기 박사, 엉터리 사기꾼, 수다쟁이, 호기심 쟁이, 철부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게으름뱅이, 복덩이’ 할아버지가 붙여준 별명이 늘어갈수록, 할아버지와 요나스는 점점 더 친해진다.

작가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음을 여는 과정을 자잘한 에피소드를 통해 잘 그려내고 있다. “까짓것”이라는 단골 어투를 통해 요나스에 대한 할아버지의 곡진함을 잘 드러낸다(할아버지는 요나스가 무릎이 까지자 반창고를 붙여주며 “까짓것, 이 정도쯤이야.”라고 긍정적으로 말하더니, 데니스가 복수를 할까 봐 걱정이 되어 뱃속이 똘똘 뭉치는 요나스에게 “까짓것, 데니스한테 기죽지 마!”라고 말함으로써 요나스의 걱정을 덜어낸다. 당근 껍질을 너무 늦게 벗기는 것 같아 할아버지 눈치를 보는 요나스를 “까짓것……. 시간 많은데 뭐.”라는 말로 안심시키기도 한다. 이쯤 되면 ‘까짓것’은 요나스의 마음을 다스리는 만병통치약이다).

요나스의 감정 변화 또한 짧은 문장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할아버지와 첫 식사를 할 때 느꼈던 불편하고 갑갑했던(목이 콱 메어서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었던) 감정은, 할머니 이야기를 하며 눈이 촉촉해진 ‘크고 거친 할아버지 손’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는 훈훈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자신만 생각하며 불안에 떨던 요나스가 어느 틈에 ‘보이는 모습(크고 거친 손)’ 안에 감추어진 ‘따뜻함’을 감지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훌쩍 성장한 요나스는 자신이 돌아가고 난 뒤 혼자 남겨질 할아버지를 걱정하기까지 한다. 이를 악물어야 할 만큼 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을 서운해 하며, 할아버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덩이가 되겠다는 의젓한 결심까지 한다.

할아버지와 손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가족애’라는 어휘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내 스스로 ‘가족애’라는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이 샘솟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도덕적 강박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하든, 가족이므로 넌 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건 독선과 오만, 더할 나위없는 폭력일 수 있다.

사랑은 거저 오는 게 아니다. 함께 한 시간만큼, 서로에게 공들인 시간만큼 비례하는 거다. 사랑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行’이 ‘지어가는 것’이듯, 사랑도 ‘지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왜 내게 사랑을 안 줘?”라고 묻기 전에, 먼저 사랑을 지어가고 있는지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응답 4개

  1. 둥근머리말하길

    가족애도 무언의 강제성을 띤 것 같을 때가 있긴 해요.ㅎㅎ 뒤늦게 잘 읽었습니다요.

    • 달맞이말하길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자꾸만 엇가나 봐. 가족애라는 게 찡하지만 징그럽고 너무 구질구질해. 답답하고. 그래도 늘 그 언저리에서 헤매지. 유유자작 즐길 줄 알아야 할 텐데, 말야.

  2. 말하길

    표지 그림의 색깔이 참 독특하고 예쁘네요. 샘, 잘 지내셨죠? 왠지 오랜만인 듯. 같이 지어가는 시간 더 많이 가져요. 우리.

    • 달맞이말하길

      그러게요. 샘, 늘 미안하고 감사해요. 마음은 늘 가 있는데, 몸이 못 좇아가요. 곧 합류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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