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정치의 가능성을 위한 질문들

- 정정훈(수유너머N)

-에티엔 발리바르의 < 우리, 유럽의 시민들?>과 < 대중들의 공포>이 던지는 질문들

정치의 위기와 새로운 시민권이라는 질문

“이제 ‘경계의 시민권’ 내지 접경의 시민권으로서 유럽적 시민권이라는 질문을 좀 더 확장해보고 싶다. 우리는, 장기적인 역사의 관점에 입각해 거리를 둔 가운데 사태를 다시 고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불가능성과 잠재성들의 응축물인 이런 시민권을 다시 작동시켜야 한다.” (< 우리, 유럽의 시민들?>)1

최근 국내에서 번역된 발리바르의 저작, < 우리, 유럽의 시민들?>을 관통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1990년대 유럽의 맥락에서 정치의 가능조건을 다시 묻는 것이다. 역사적 사회주의가 몰락, 제3세계로부터 이주해오는 인구들의 급증, 자본주의 질서의 전지구화, 유럽연합 건설 프로젝트의 구체화라는 정세 속에서 유럽의 정치적 환경은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유럽의 정세 속에서 인종청소로 불리는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동유럽에서 다양한 종족적 동일성을 통합하던 권력형태인 국가가 붕괴로 인해 집단적으로 심각한 동일성의 위기에 처하게 된 자들이 인종이라는 상상적 동일성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다른 인종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타자로 설정하여 그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발리바르에게 발칸에서 발생한 이 잔혹한 폭력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또한 이는 당대 유럽의 상황에서 전개되는 국가형태의 위기와 그로 인해 촉발되는 대중의 동일성 위기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될 최악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예전에 서유럽이라고 불리던 자본주의적이고, 소위 ‘민주적인’ 유럽의 내부에도 이미 이주민들이라는 타자들이 존재해왔으며, 이들에 대한 권리의 박탈과 폭력이라는 문제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내부에서 증대되는 인종주의 경향은 발칸반도의 인종적 폭력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타자를 절대적 무권리의 상태, 권리를 가질 권리를 박탈하는 상태로 몰고 가는 극단적 폭력과 배제가 유럽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발칸의 문제가 유럽의 경계 외부에 있던 것이, 사회주의 동유럽의 해체 이후 유럽으로 유입된 것, 즉 자신에게 이식된, 자신에 대해 이질적 기원을 가진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사의 한 이미지나 효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새롭게 건설 중인 유럽(하나된 유럽)이 그럴 수 없다면, “유럽은 미리 자신의 시민권에 대해 유럽 자신의 주민들이 넘어설 수 없는 내재적인 경계선을 강제하며, 자신의 주민들을 거류 외국인의 상황으로 끝없이 몰아간다. 그리하여 유럽은 자신의 불가능성을 재생산”2 하게 될 것이라고 발리바르는 경고한다.

이와 같은 발리바르의 경고에는 민족, 혹은 인종(발리바르에게 근대적 민족개념은 인종개념과 분리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동일성을 통해 인간의 권리를 규정하려는 집단적 시도들이 관철되는 상황에서는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고 신장하려는 정치적 노력들, 나아가 인간의 권리 자체를 규정하는 조건들의 변혁적 실천들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발리바르가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는 ‘유럽적 시민권=경계의 시민권’이란 개념은 정치의 조건들을 잠식하는 상상적 동일성의 폭력에 맞서서 인간의 정치적 권리를 재규정하는 새로운 형식을 구축하고자하는 그의 지적 고투 속에서 제출되는 것이다.

정치의 가능성을 위한 정치

발리바르는 1996년에 쓴 < 정치의 세 개념 : 해방, 변혁, 씨빌리떼>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밀고나가서 정치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조건을 구축하는 정치라는 주제를 보다 정교하게 제시한다. 발리바르는 이 글에서 정치의 개념을 세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해방의 정치이다. 해방이란 기본적으로 보편적 권리의 쟁취와 관련된 문제이다. 보편적 권리를 구현해 가는 인민의 집단적인 봉기의 정치는 다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의 자율성을 해방이라는 윤리적 형상에 대응시킨다. 두 번째는 변혁의 정치이다. 발리바르는 정치의 자율성을 조건 짓는 정치로서 정치의 타율성이 있으며 이를 변혁이라는 형상과 연결한다. 세 번째 정치의 개념은 씨빌리떼(civilité)의 정치이다. 이는 타율성의 타율성이라고 불리며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치이다. 발리바르에게 있어서 정치란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 씨빌리떼의 정치라는 세 가지 층위로 분화되어 있다.3

정치의 타율성이란 정치의 자율성이 실행되는 구조나 조건들을 말한다. 가령 맑스가 정치의 조건으로 말한 생산관계나 푸코가 사회적 활동이 형성되는 조건으로 말한 권력의 미시물리학, 혹은 통치성 같은 권력관계가 바로 정치의 자율성이 자리 잡는 조건들(정치의 자율성의 외부)인 것이다. 이 조건들을 변혁하는 정치가 바로 정치의 타율성으로서 변혁의 정치이다. 변혁의 정치가 정치의 타율성(hétéronomie)이라는 위상을 점하는 것은 그것이 해방의 정치를 실행되는 주체들을 생성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타율성의 타율성이라는 정치의 세 번째 층위는 정체성/동일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국민국가의 위기, 쇠퇴의 상황에서 부상하는 인종적 정체성이나 종교적 동일성에 기반하여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의 문제를 주목한다. 이 배타적 정체성에 의해 정치적 폭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폭력, 즉 잔혹으로서의 폭력이 발생하며 확산되고 있다. 발리바르는 그러한 정세 속에서 타율성의 타율성이라는 개념을 구축하고 있다. 역사적 사회주의 붕괴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된 내전은 ‘인종청소’라는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로 나타났고, 국민국가가 거의 작동을 하지 않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는 학살이 연이었다. 국민국가의 위기와 쇠퇴가 국민적 정체성의 위기와 쇠퇴로 이어졌고, 이 위기/쇠퇴에 대중들이 대응한 방식은 인종이나 종교와 같이 상상하기 쉬운 동일성에 입각하여 서로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존의 위기 상황 속에서 구축된 인종적, 종교적 정체성은 유사한 상태에 놓인 다른 정체성 집단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졌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폭력이 현대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폭력은 사회적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되어 가고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폭력을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4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잔혹으로서의 폭력은 보다 낳은 사회의 구성을 위해서나, 어떤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행사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오로지 하나의 동일성에 고정시키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제거하려는 폭력일 뿐이다.

잔혹으로서 폭력은 정치의 자율성이 자리 잡는 조건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며, 변혁으로서의 정치의 가능성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즉 권리를 잃어버린 자들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권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세력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신들을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조건들을 전복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망도 없는 폭력, 오로지 그들의 제거와 절멸을 위한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은 해방의 정치는 물론이고, 변혁의 정치 역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을 배제하도록 만드는 구조나 조건을 변혁하기 위해 투쟁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에게 배제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지 않고,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짓누르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절멸시키려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배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왜 배제된 자들은 해방의 주체나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잔혹한 폭력의 주체로 형성되는가? 발리바르는 잔혹으로서의 폭력이 주체화 양식,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대중들이 자신의 삶의 조건에 대해 가지는 상호 연계된 가상(imaginary), 집단적 가상의 문제가 일상화된 잔혹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배제된 자들이 인종과 같은 증오를 수반하는 동일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전화가 없다면 정치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잔혹으로서의 폭력을 근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배제된 대중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하는 방식인 이데올로기의 전화가 필요하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관련된 정치를 씨빌리떼의 정치라고 부른다. 이는 폭력의 주체를 정치의 주체로 전화하는 정치이며, 이것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대중적 상상의 전화, 즉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화해가는 정치이다. 배제가 일반화되는 현재의 정세 속에서 인권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실행하는 씨빌리떼의 정치가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이론의 과제, 질문의 적실성

한국에서 발리바르가 수용된 최초의 맥락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맑스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의 전화를 모색했던 알튀세르의 자장 속에서 읽혔다. 발리바르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변혁의 정치’를 위한 보다 정교화된 이론적 작업으로 발리바르는 주목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작들은, 그것과 무관한 것은 아닐지라도, 단지 맑스주의의 전화나 개조라는 문제설정과는 다른 질문들을 담고 있다. 그 질문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해방의 정치는 물론이고 변혁의 정치마저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재의 상황, 즉 잔혹성으로서 폭력의 일반화이라는 조건 자체를 어떻게 전화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발리바르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절실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잔혹성으로서의 폭력이 근대적 국민국가 형태의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동일성의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동일성에 대한 인종적 상상과 결부되어 있다면, 이 문제는 한국에서도 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경향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일단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2010년 120만명 정도의 외국인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이 되면 900만 명이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내 외국인 인구의 비율이 전인구의 20.5%가 된다. 한국 사회는 점점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배제되는 대중의 급격한 증대이다. 양극화라는 용어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 자원에 접근이 차단당하는 인구대중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실업자의 증가, 비정규직의 양산, 중산층의 몰락 등 한국 사회에서 대중의 빈곤화는 신자유주의 기조가 멈춰지지 않는한 가속화될 것이 틀림없다.

이 두 경향이 결합할 때 한국 사회에서도 인종적 증오와 폭력이 가난하고 박탈당한 자들 사이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배타적 분위기가 이미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가난한 이주민들은 한국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되기보다는 인종적 타자로 위치 지워질 것이고, 배제된 한국인들이 이주민들을 향해 인종주의적 증오를 품게 되고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유럽의 상황에서 정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하여 발리바르가 제기한 질문이 한국사회에서도 적실해지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가능 조건을 확보하는 정치로서 씨빌리떼의 정치를 우리 역시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씨빌리떼의 정치가 중요한 문제임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이 문제는 앞으로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과제가 될 듯 싶다. 그러나 정치를 사유하는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명약관화한 답변, 명석판명한 해법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관건적인 문제를 인식하게 해주는 질문의 적실성일 것이다. 제대로 던져진 질문은 어설픈 답변들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정치적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리바르가 이 두 책에서 제기하는 질문들은 이제 한국의 맥락 속에서 면밀히 검토해야할 과제를 던져주는 것이기도 하다. 발리바르의 질문은 우리에게 유효한 고민거리를 또 하나 던져주고 있다.

– 정정훈(수유너머N)
  1.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우리, 유럽의 시민들?』, 후마니타스, 2010, p.27 []
  2. 같은 책, p.27 []
  3. 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의 세 개념 : 변혁, 해방, 시민인륜」,서관모, 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
  4. 같은 글, p.59 []

응답 1개

  1. bien말하길

    글쓰기의 기본은..글읽는 자를 목표로 한다. 자아도취의 수필이나 일기가 아니라면, 상식적인 인지능력을 보유한 사람과 소통가능한 글로 다듬어서 내놓았을 때 비로소 접근하고픈 유인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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