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이어도의 꿈과 민족중흥의 사명

- 고병권(수유너머R)

지난 주 < 위클리 수유너머> 개편이 이루어졌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학술면 필자들께 감사의 말 전합니다. 디자인과 편집은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조금 엉성하고 부족한 면이 있을 겁니다. 이역만리에서 작업과 공부를 병행하고 계시는 저희 막강 디자이너, 매주 밤을 지새우는 웹팀을 믿고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 개편 축하메시지와 독자가 만드는 < 위클리 수유너머> 코너는 일주일 정도 더 받겠습니다. 이미 응모하신 분들, 경쟁률이 낮아 경품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흐뭇해하셨겠지만, 경품에는 역시 ‘흐뭇’보다는 ‘스릴’이죠.^^

정면에서 본 김영갑 갤러리


그나저나 지난 주 제주도에 다녀온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김영갑갤러리’ 가보셨습니까. 저 같은 문외한조차 이름을 들었으니 사진작가로서 너무나 유명한 분이죠. 지난 19호 김대경 선생님의 글, ‘지나치게 넘쳐서 문제가 되는 세상’에도 그 곳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생전의 선생은 자신의 화원이 더 이상 ‘예전의 그 화원’이 아니라며 기억에서조차 지우겠다고 하셨답니다. 저 같은 이들이 그곳을 찾은 이후 “노루, 오소리, 족제비, 꿩, 비둘기, 몸집 작은 텃새들과 곤충들이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갤러리 뒷문으로 들어가 본 전시관에 적혀 있는 이 불청의 말 때문에 사진을 둘러보는 일이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웠습니다.

헌데 정문으로 나와 건물을 바라보니 왼편에 눈에 확 띄는 선생의 문장이 있더군요. 사진 볼 줄은 모르고 역시 글로 불러줘야 고개를 끄덕이는 못난 서생 노릇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유토피아적 삶을 꿈꾸듯 제주인들은 수천 년 동안 상상 속의 삶 이어도를 꿈꾸어 왔다. 제주를 지켜온 이 땅의 토박이들은,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상적 삶에 절약, 성실, 절제, 인내, 양보가 보태어져야 함을 행동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꿈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나(제주)다움을 지키지 못한다면 꿈은, 영원히 꿈에 머문다. 제주인들처럼 먼저 행동으로 실천할 때 이어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제주에 함께 내려간 다섯 살 딸아이에게 문장 풀이를 하듯 읽어주다가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상적 삶에 절약, 절제, 인내, 양보가 보태어져야” 한다는 말에 이상하게 목이 메더군요. 아름다운 유토피아는 내핍의 결과라는 말이 아닐 겁니다. ‘이어도’는 가난한 이들이 일상을 헤쳐 나가며 터득한 그 덕목들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가 없는 유토피아인가 봅니다. ‘아끼면 부자된다’가 아니라 ‘아낌 속에 있는 부를 알아야’ 갈 수 있는 곳, 김영갑의 이어도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딸아이는 문장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딴청을 부리고 저는 설명할 수도 없는 ‘절약, 성실, 절제, 인내, 양보’만을 되뇌다가 그냥 왔습니다.

어떤 재치 있는 이가 앞서의 문구 아래 ‘국민교육헌장’을 가져다놓았더군요. 기억하시죠?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로 시작해서 “새역사를 창조하자”로 끝나는, 국민학교 때 달달 외워야 했던 393개의 글자. 김영갑이 꿈꾼 ‘이어도’와 박정희가 느낀 ‘민족중흥의 사명’. 정말로 절묘한 대비를 이루더군요. 제주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516도로’입니다. 아마도 우리 무의식 한복판을 가르는 도로이기도 하겠죠. 선진화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대낮에도 꾸는 꿈이고, 4대강은 우리 시대 ‘새역사’로 창조되는 중이니까요.

이어도의 꿈과 국민교육헌장

제가 갔을 때 노루, 오소리, 족제비가 먼저 떠나버렸듯이, 516도로가 뚫리고 4대강이 흐르면 우린 ‘거기’에 도달하겠지만, ‘거기’는 더 이상 ‘이어도’가 아니겠죠. 참 씁쓸합니다. 박정희도 죽었고 김영갑도 죽었습니다. 한 사람은 민족중흥과 선진화의 꿈 속에서, ‘잘 살아보세’의 구호 속에서 도무지 죽을 줄 모릅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아주 작아져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곤충이 되어’ 살겠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너무도 하찮은 존재’라고 부릅니다. 바로 ‘가난’에 대한 그런 겸손한 자각 때문에, 우주의 저 미세한 입자까지 축소된 그 겸손함 때문에, 그는 정말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곤충이 되고, 만물이, 온 세상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에게서 가난한 이들의 유토피아, 이어도의 꿈을 들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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