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현재성: 우리가 함께 하는 균열

- 하지메

‘위안부’ 문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91년에 김학순 할머니의 고발로 공식적으로 문제화되었다. 그런데 하나 상기해야 할 것은 이전에 일본 혹은 한국에서 위안부의 존재 자체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나 연구자들은 물론, 책들을 통해 그런 ‘비극’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정부 고관들의 잇따른 망언에 분노한 여성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그들의 삶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비극일 뿐 공식적으로 책임의 소재를 촉구하거나 사죄를 요구하는 일은 아니었다. 여성이라는 성을 가지면서 가족(가부장제) 바깥에 있게 된 자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학순 할머니의 고발 이후 다른 피해여성들도 목소리를 내기시작해서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해온 < 수요집회>는 900회를 넘도록 매주 수요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 어려움은 해결에 나선 민중(이렇게 말해도 적절할까? 시민이라고 해야 되나?)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냈다. 이 균열은 상황에서 떨어져서 보면 단순한 의견차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 설령 그 흐름이 고착화되어가는 마그마와 같은 것이더라도, 흐르고 있는 것이고 들어가 보면 뜨겁다. 사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도 어떤 식으로 글의 흐름과 상황에 흐름을 관계시키면 되는지 이 ‘나’라는 것이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빗나가게 되는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된다. 잘못하면 익사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이것은 말해두어야 할 거 같다. “싸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공격을 당하지 않을 수는 없다. 각오를 할 수 밖에 없다.” 라고. 좀 세련되게 말해보면 우카이 사토시의 사고를 빌리자면 “부끄러움 앞에서 제대로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어떤 감응의 미래’ < 주권의 너머에서>).

결론이 너무 앞서갔다. 일단 이 문제에는 민중(혹은 시민) 쪽에 균열이 있다. 이것은 그런데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한일로 균열이 단순히 나누어져 있지 않다. 물론 한일이라는 이항대립이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기는 한다. 일단 이 균열의 계기가 된 두 사건이 있었다. 물론 이 잘 알려져 있는 사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지고 있는 균열의 원인을 환원할 수 있는 기원 같은 것은 아니다.

하나는 1995년에 시작된 계기이다. 당시 사회당과 자민당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립정권(무라야마 내각)이 ‘양심적 지식인들’과 협력해 아시아여성기금(원래는 국민기금)을 만들었다. 여러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 이 기금은 피해 여성들에게 일본 국내외에서 모금한 돈을 ‘위로금’ 형식으로 ‘일본 국민의 마음’을 전해주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일본 정부에 공식적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 면죄부를 주는 셈이라는 비판을 받아 그들의 원했던 만큼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 채 2007년에 해체되었다. 또 하나는 2000년에 도쿄에서 열었던 여성국제전범법정(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이다. 이는 한편에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극동지역에서의 전쟁범죄를 심판했던 도쿄재판이 간과한 전시 성폭력 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버트런드 러셀과 장 폴 사르트르가 주도해서 만든 민중법정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었다. 이 법정은 국제법상 인정된 (즉 국가권력에 의해 지탱된 국제기관의 승인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정부에 대한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천황 히로히토(당시 고인)가 유죄 판결 받는 등 과거 간과된 문제에게 법적인 형식을 답습해서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졌다.

여기서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전자는 무엇보다 ‘화해’를 향한 시도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후자는 ‘책임촉구’를 위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대립은 지금까지 이 문제의 틀 속에 보이게 안 보이게 항상 균열을 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도 다시 이 균열을 가시화 시키는 일이 생기고 있다 (안타깝게도 일본 정부는 이 논쟁-대립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듯하다).

이 균열을 들어내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박유하 씨가 쓴 < 화해를 위해서: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일본어 제목: 和解のために:教科書・慰安婦・靖国・独島)>이다. 이 책은 한국, 일본에서 각각 2005년, 2006년에 출판되었고, 일본에서는 < 오사라기 지로우 론단상>라는 아사히신문에서 평론을 대상으로 주는 상을 받았고 큰 호평을 얻었다 (오사라기 지로는 사람 이름). 일본에서의 일반적인 호응에 비해 한국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거 같다 (일부 네티즌의 강렬한 반발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저자가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독자에게 민족적 혹은 본질주의적인 시각에 대해 경계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일단 한일이라는 이항을 유지시키면서도 그 관계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일 양국에서 이 책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논자들에 의해 그 사고방식과 역사적 사실관계의 오인 등 비판이 되어 왔다. 특히 정대협에 대한 공격수의는 지나치게 높아 이 책이 강한 반감을 사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예를 들어 정대협의 운동 자세에 대한 일본 우파의 반동에 대해 어떻게 정대협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나오는 한국 민족주의 비판에 아무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보다 이 책에 대한 한일에서의 서로 메아리치고 갈수록 커지는 반응방식에 대해서다. 뭐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종의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대칭적 분열생성이라고 불렀던 피드백 메카니즘의 일종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도 인터넷의 세계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오고 가는 담론이 논자의 인격적인 내면의 성질과 관련된 면에 너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있어서 일본 대중 매체와 네티즌들이(일부 비판을 제외해서) 지나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용기가 있다. 부드러움 속에 있는 강함을 가지고 있다 등등.

여기서 의문은 왜 그 용기가 그렇게 평가할 만한 것이 되었는가? 라는 문제이다.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상황에서 일종의 방어기제 또는 선제공격적인 것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글에도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일본에서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박유하 씨가 말하는 한국 민족주의는 어마어마한 것인 거 같다. 실제로 그럴 때도 있다. 어떻게 보지도 않은데 알 수 있는가? 아마 일차적으로는 모를 것이다. 아니 일차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모두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래서 그들은 안다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가상공간은 아픈 곳이라고.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전후 일본 사회의 중도-좌파가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무리 엄격한 비판성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박유하 씨를 우파로 규정하더라도(그런 경우도 있는 거 같다) 박유하 씨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외적 특징은 전후 일본의 전형적인 중도-좌파 문화의 체현자들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박유하 씨의 용기를 평가하는 것은 그가 한국민족주의라는 집단주의, 공동체에 맞서 싸우는 비판적 지식인의 이미지이다. 공동체의 횡포와 싸우는 주체, 그것도 여성 주체에 대한 환상.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숨어 있다’ 등의 묘사는 그런 전후 일본 민주주의(남성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엿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더 나의 상상력을 비약을 통해서 밀어붙이자면 이러한 상상에는 역사적 선례가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영웅적인 한국인 투사에 대한 상상력은 나카노 시게하루가 < 비 내리는 시나가와 역>에서 환기시킨 아름다우면서도 강렬한 서정성, 즉 일본 천황의 취임식전에서 천황을 죽여버리는 조선인 테러리스트들에게 쏟아 붓는 빗속에서 이별을 고하는 이미지의 계보를 이은 것 아닌가?(이 시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여기서 나오는 것이 가장 얌전한 버전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일본 전후 일본의 상징으로 거세된 것처럼(?) 보였던 천황제는 담론 공간 상 자신의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인 운동단체(불령조선인?)를 냉정하게 비판하는 한국인 여성 주체를 만들어냈다는 것인가?(물론 이것은 박유하 씨 본인의 실체가 어떻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상상하는 전후 일본 담론 공간의 안정성은 우리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고이즈미, 아베, 아소로 이어진 자민당 극우 삼인방(사실은 또 많음)이 정권을 잡은 2000년대에서 지금에 이르면서 일본 사회는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애초부터 몰랐던 거 같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을 만들어냈다. 요즘에 통칭 자이토쿠카이(재특회), 정식명은 ‘자이니치 특권을 허하지 않은 시민(!!)의 모임(!!–부분은 필자가 강조.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시민임을 자임하고 있다. 좀 이 글을 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서. 불쌍한 놈들….%#@ㅋ )이라는 그룹이 인터넷을 통해서 형성돼 오프라인에서 집회를 가지고 재일조선인 주민이나 학교 등에 소음을 통해 위협을 주거나 진보세력이 가지는 집회를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보고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력은 그들 나름의 매너(?)를 가지고 있었던 기존 우익과는 전혀 다른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아무 문맥 없이 개인 자이니치 집을 찾아가 위협을 하거나 학교 앞에서 집요하게 아이들한테 욕설을 하는 등이다. 이는 박유하 씨가 < 화해를 위해서>를 낸 2005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할 때 부끄러움이라는 감응은 적절한 전투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화해는 ’우리‘라고 하는 전체 사이에도 있을 수가 없다. ’한국인‘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전체와의 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참고문헌

< 주권의 너머에서> 우카이 사토시 지음,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 회해를 위해서> 박유하 지음. 뿌리와이파리. 2006.

추기 1. 흥미롭게도 두 저자가 자크 데리다의 화해 및 용서에 대한 논고를 거쳐서 논리를 펼쳐지고 있는데 그 촉감은 너무나 다르다.

추기 2. 지도위의 /조선국에 새까맣게 /먹칠하다 /듣는 가을바람(地圖の上 朝鮮國にくろぐろと 墨をぬりつつ 秋風を聽く). 1912년에 패병으로 사망한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가 한일합방소식을 듣고 일본지도의 색깔과 같으면서 경축을 나타내는 홍색이 아닌 흑색으로 한반도에 먹칠 한지 100년이 된 올해, 타쿠보쿠가 그 당시 세계지도에서 보게 된 니힐리즘은 여전히 아니 더욱더 깊어 가고 있는 듯하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와 미군기지 주둔 그리고 전쟁과 군사독제의 형태로 근대질서가 이 땅에 쏟아 부은 폭력의 흔적들은 치유되지 않은 채 아예 버려져 짓밟히고 있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세계화의 도가니 속으로 침투하려고 하고 있다. 십일월 찬바람이 불을 무렵이 되면 좀 일찍 산타가 아닌 G20이 온다. G8이 나란히 몰락해가는 가운데 식민지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옛 주인 나라들과 서울에 온다. 가을바람이 불었던 100년 후에……

– 이마마사 하지메(수유너머N)

응답 1개

  1. 행인 1말하길

    좀 복잡하지만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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