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축제가 된 달리기 경주

- 달맞이

달맞이의 책꽂이

–<토끼 씨와 거북이 양> 파베우 파블락 그림 / 베키 블룸 글 / 김세실 옮김 / 시공주니어

난 달리기는 젬병이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그 흔한 공책 한 권 못 받았다. 울 엄마는 다른 집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팔을 쑥 내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참 많이 부러워했다. 슬며시 다가가 팔에 찍힌 도장을 확인하고는 “오메, 좋겄다!”를 연발했다.

언젠가 한 번 정말 죽기 살기로 달렸던 적이 있다. 숨이 턱턱 차올랐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고 열심히 팔을 내둘렀다. 저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1등은 못할지언정, 3등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런데 웬걸, 결승선을 반걸음 남겨놓고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뒤에 있던 아이가 잽싸게 앞으로 내달렸다. 공책 그 까이 거는 아무래도 좋았다. 울 엄마의 “오메, 좋겄다!”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결국 난 그날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나를 제낀 내 단짝 친구에게, ‘償’자가 선명히 찍힌 공책 한 권을 샀다.

그 날 저녁, 밥상을 차리는 엄마 옆에 슬며시 공책을 밀어놓았다. 엄마는 휙 한 번 흘겨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거.” 다시 한 번 엄마 옆으로 공책을 밀자, 엄마가 그랬다. “희한타, 오늘은 웬 일로 꼴등도 다 공책을 줬냐?” 결국 아까운 내 돈만 날렸다. 난 아직도 달리기가 젬병이다.

베키 블룸은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멋지게 재해석한다. 달리기가 얼마나 멋진 일인지 잘 보여준다. 아니, 느릿느릿한 거북이를 통해 달리기가 젬병인 사람도 달리기를 통해 누군가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일러준다. 여태껏 특이점이란 ‘남과 다른 점, 남보다 특별히 잘하는 점’이라는 강박에 빠져 있던 내게, 그런 생각이야말로 ‘쓰잘데기 없는 편견나부랭이’라는 것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착하고 싹싹하고 예의까지 바른 거북이 양(토끼 씨와 대조되는 설정이긴 하지만, 이 부분은 너무 도덕적이라 솔직히 별로 맘에 안 든다)은 이기적인 숲 속 동물들을 ‘촉발’ 시켜, 하나로 묶는다. 이 책이 ‘한 사람의 힘’이 집단을 변화시킨다는 다분히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발 빠른 토끼와 느릿한 거북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솝 우화는 ‘노력, 성실’이라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승자와 패자를 구분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우화에서는 토끼와 거북이에게 승자의 영광을 나란히 줌으로써,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그래서 거북이가 자고 있는 토끼를 등에 얹고 결승선을 향해 기어가는 장면은, 거북이 혼자 땀을 질질 흘리면서 언덕을 오르는 장면보다 더 인간적이다.

베키 블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토끼와 거북이 둘의 경주를, 숲속 마을 전체로 확산시킨다. 곰 아주머니, 비버 아저씨, 수달들, 두더지 양, 오소리 할아버지, 오리들, 다람쥐들을 모두 경주에 참여시킨다. 일등, 이등, 삼등. 순위를 가리기는 하지만 경기가 끝나는 순간 승패를 날려버린다. “꼴찌는 오리들이었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아요. 오리는 새잖아요.”라는 말로 달리기 경주 자체를 무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공정하지 못한 달리기 경주였으니 순위 자체가 의미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숲속 동물들에게 달리기 경주는 경쟁이 아닌 유희의 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경주가 끝나자마자 최선을 다한 서로를 자축하며 “부둥켜안고 만세를 부르며, 시원한 딸기 주스를 나누어 먹는” 축제를 벌일 수 있었을 게다.

달리기를 통해 숲속 동물들은 변화한다.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고 걸핏하면 싸움을 벌이던 동물들은 달리기를 통해 활기와 여유를 찾는다. 달리다 보니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도 생기고, 연습에 몰두하느라 바빠서 이웃과 싸울 틈도 없다. 공동의 놀이가 생겼으니, 자연스레 서로 마음도 맞아간다. 달리기에 동참하지 않는 부엉이 아주머니조차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거북이 양의 달리기 수업을 돕는다. 그들은 그렇게 공공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간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까칠남 토끼 씨의 변화다. 이미 달리기 챔피언으로 명성이 나 있던 토끼 씨는, 챔피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볍게 운동을 하고, 느긋하게 밥을 먹은 뒤, 신문의 스포츠란을 읽고, 짧은 낮잠을 즐긴다. 오후가 되면 챔피언 메달들을 목에 주렁주렁 걸고 산책을 나간다. 그러나 럭셔리한 토끼 씨의 삶은 거품이다. 달리기 경주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숲속에서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 동물들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토끼 씨는 시내의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메달과 트로피를 사 모은다. 그리고는 매일 명목상의 챔피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간다. 그가 즐기는 챔피언의 삶이란 결국 타자의 의해 구성된 삶이며, 박제된 삶이다. 그래서인지 토끼 씨는 이웃들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싸워도 관심도 없고, 거북이가 이사 오는 것을 보고서도 시큰둥하다. 그저 점잖게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는 게 다다.

그러던 어느 날, 거북이 양이 달리기를 시작하자 토끼 씨는 긴장을 하기 시작한다. 숲 속에 달리기 선수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총알처럼 달려 나가 보지만, 달리기가 잘 될 리 없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해서 근육을 풀고 팔다리를 쭉쭉 펴며 준비운동까지 완벽하게 하고 덤벼 보지만, 소용없다. 비버 아저씨, 오리들까지 거북이 양의 달리기 수업에 합세하자 토끼 씨는 더욱 경악한다. 토끼 씨는 진짜 숲 속의 챔피언인지 누구인지 보여주고 말겠다며 이를 악문다. 끝내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자, 메달들을 팔아 새 운동화를 사서 본격적으로 연습에 나선다. 어스름한 새벽부터 깜깜한 밤중까지 달리고 또 달린다. 거북이를 앞지를 욕심에, 자신이 챔피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는 토끼 씨를 진짜 달리기 선수로 만든다.

경주가 시작되자, 마침내 토끼 씨는 모두의 예상처럼 일등을 차지한다. 실질적인 챔피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토끼 씨, 생전 처음 달리기 경주를 해서 받은 메달을 기꺼이, 자진해서 거북이 양에게 걸어준다. 이웃들이 싸우건, 말다툼을 하건 도통 관심이 없었던 까칠남 토끼 씨가 “숲속에 평화를 가져온 거북이 양에게” 수줍은 듯 몸을 굽혀 자기 것을 내주는 것이다. 이로써 토끼 씨 역시, 숲속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토끼 씨를 남성으로, 거북이 양을 여성으로 설정했을까? 거북이 양이 이사 오기 전 숲속 마을은 ‘챔피언과 다툼’으로 비유된 경쟁사회였다. 그러나 거북이 양의 출현으로 인해 숲속 마을은 ‘축제, 평화’의 장으로 바뀐다. 이를 모성, 여성성을 되살리고 싶은 상상력의 발동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응답 1개

  1. 둥근머리말하길

    달리기 경주를 이렇게 멋지게 그릴 수도 있군요.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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