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환대하고 저항하며 모이고 만들기: <주권의 너머에서>(우카이 사토시, 그린비, 2010)

- 김미정(문학평론가)

장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이들

2004년에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번화가인 신주쿠에서 본 여러 유형의 노숙인들이 인상적이었는데, 부부로 여겨지는 이들, 혹은 한때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을 것 같은 이들, 뭔가 개인적인 것으로만은 읽을 수 없는 이력들을 흔적으로 갖고 있는 이들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일이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다시 도쿄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어서 신주쿠는 자주 지나다니게 되었는데, 한쪽의 정체모를 조형물들이 늘 의아했다. 그곳은 신주쿠 역 서쪽 출구 지하도였는데, 조야한 색칠을 한 비쭉비쭉한 좀 흉물스런 조형물들이 한쪽 공간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앉아서 쉴만한 곳도 아니었고, 어떤 의미(용도)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공미술작품이라고는 결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조형물이었는데, 훗날 얘기 듣기로는 아니나 다를까 노숙자 추방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1990년대 중반 신주쿠의 노숙인들이 거주했던 단볼 하우스촌 철거·탄압의 흔적임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한편 도쿄의 또 다른 중심가 시부야에는 미야시타(宮下)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다. 시부야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비해 상당히 허름하고 조용한 곳인데, 언젠가부터 주위의 노숙인들이 모여들어 거주해왔고, 매년 5월1일에는 메이데이 거리행진의 출발점이기도 한, 꽤 액츄얼한 장소이기도 했던 곳이다. 관청에서 그곳을 탐탁치않게 여겼을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구 측에서는 그곳에 노숙인들이 몰려드는 문제를 해결하고 시설을 개보수 한다는 명목으로, 공원을 민간기업 나이키에 매각하기로 한다. 공원에서 노숙자들은 추방되었고(혹은 시설로 회수되었고), 공원은 세련되게 리뉴얼되고 유료화 될 것이며, 공원의 이름은 ‘나이키 파크’로 바뀐다고 한다. 이것은 2008년 즈음부터 지금까지 진행 중인 일이다.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잊곤 하는 것이지만, 지구상의 공기, 물, 창공, 토지(장소) 등등은 애초에 인간이 이 세계에서 자유롭게 누려왔을, 그리고 자유롭게 누려 마땅한 공공재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부터 구획되어 사적으로 소유하는 대상이 되었고, 그것이 법의 이름으로 확립되면서 ‘자연’으로 전도되어 버렸다. 우리가 지금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사적 기원을 은폐하고 있으므로, 우리 개개인이 그것을 동등한 권리로서 누리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지 오래인 것이다. 신주쿠나 시부야에서 쫓겨나는(관리되는) 노숙자들, 서울역이나 시청역 부근에서 쫓겨나는(관리되는) 노숙자들은, 장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근대 시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그리하여 온전히 (근대적)인간일 수 없는 이들이다.

장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이들이라면, 노숙인과는 조금 비대칭적일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이라는 존재도 있다. 2009년 초 일본에서는 불법체류로 강제추방 당하게 된 필리핀인 가족의 문제가 이슈가 된 일이 있다. 특히 일본에서 태어나고 중학생이 된 딸에게 초점이 모아졌는데, 그녀가 기자회견 때 스스로를 백퍼센트 일본인이라고 눈물의 호소를 하던 일이 묘한 전도(顚倒)의 사례로 기억된다. 결국 그녀 부모는 강제 추방되어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딸은 ‘인도적 차원’(!)에서 일본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한국에서도 18년간 한국에 살았던 네팔 출신 미누 씨가 강제 추방되었다)

글로벌리제이션 슬로건의 확산은, 동시에 그 슬로건의 기만성을 드러내 왔다. 이동의 자유로움과 이동의 자유에 대한 박탈은 나란히 함께 증가해왔다. 전세계적으로 외국인 환영과 배척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나’는 결코 이런 배척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 혹은 노숙인이 될 리가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는 언제까지나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만약 놈들이 아침에 온다면-”

도쿄에서 지극히 평균치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일본인 친구는 우에노 공원의 긴 무료급식줄 앞에서 그런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노숙자를 보거나 떠올릴 때마다 그들이 안됐다는 생각보다는, 문득 하룻밤 사이에 나도 저렇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 두렵다”고. 심화되는 격차사회, 취업빙하기 세대, 홈리스의 문제가 비단 그 일본 친구만의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제이션 세계 속 평균치의 삶들에 이미 육박해 오고 있는 불안·공포의 원인이다. 한국에서도 칭하는 말은 다르지만 결코 다르지 않은 사태를 공유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이전처럼 열심히 살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은 점점 희박해져간다. 아니 실제로 그렇지 않았음(열심히 살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순진한 믿음이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최선을 다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어느 날 갑자기 불가항력적으로 내 삶이 추락하거나 붕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은 저곳에서나 이곳에서나 항시적인 우리의 조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배척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의 문제도 비슷하다. 보통 ‘외국인’이라고 하면, 별로 거리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주권국가에 속한 우리는 ‘대개가’ 여행객 혹은 방문객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이거나, 강제로 국적을 박탈당한 사람이거나, 망명자이거나, 불법체류자라면 그는 어느 국민국가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내가 ‘안전한 외국인’인 것은 이곳에서는 ‘국민’이고 저곳에서는 ‘외국인’이 될 수 있는 증명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전한’이라는 말도 제한된 조건을 갖고 있지만 말이다.

가령, 현해탄을 넘어 저곳의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입국심사를 위해, 내국인/외국인/재입국외국인으로 구획된 선 어딘가에 서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나는 패스포트가 보증해주는 대한민국 국민임을 그들에게 확인시켜 줘야하고, 카메라를 향해 서서 얼굴사진을 찍어줘야 하고, 나아가 나의 지문까지 맡겨야 한다. (일본에서 얼굴촬영과 지문날인은, 테러리스트 입국 방지, 외국인 범죄 관리 등을 위해 2007년에 재도입됐다) 이 짧은 사이에, 나는 여지없이 내가 이방인이고, 그것도 허용된 조건 하에서만 간신히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낸다.

비자가 필요 없는 단순 방문객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일정 기간 이상 체류를 하기 위한 비자를 발급받아 본 사람은 공감할 테지만, 체류자(resident)가 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그 나라에서 얌전하게 처신할 것인지, 또 내가 그 나라에 얼마나 이득이 되는 외국인인지 확신시켜주는 절차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각자의(필요하다면 혈연까지)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증명해야 하고, 자국법 안에서 얼마나 결격사유 없이 온건하게 살아왔는지를 온갖 서류로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불법체류란, 단지 저곳/이곳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 머무는/ 머물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나’와 ‘노숙인’ ‘외국인’ 사이의 거리는 의외로 멀지 않다. 배제·배척이 전제된 그들의 자리에 언제든 나는 내던져 질 수도 있다.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그 자리에 있지 않는 이상 대개의 우리에게 그런 사태는 공포스러운 상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그들을 ‘소수자’ 혹은 ‘마이너리티’라고 칭하곤 하지만, 그렇게 칭하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메이저리티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위치전환을 생각해보는 감각(역지사지)은 이미 능력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미 당위가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장소에 대한 권리를 얻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말해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 겪고 있는 일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적이라고 여기는(사유) 순간, 왜, 어떻게 그것에 개입해 가야할지(실천)가 종종 어긋나곤 한다.

이런 생각, 즉, 다른 이들의 일이 어쩌면(아니 확실히) 나에게도 일어날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감각은, 『주권의 너머에서』의 저자에게서 얻었다. 우카이 사토시는, 일본 다치카와(立川) 반전삐라 탄압사건과 저항의 당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19_만약 놈들이 아침에 온다면…), 1970년대 학생·시민활동가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장소에 대한 권리가 없는 사람들(나의 글), 반전삐라 탄압사건(우카이 사토시), 흑인해방운동 탄압사건(1970년대 미국) 등, 각자 생각하고 있는 상황도 시대도 강도도 다르지만, ‘사유’와 ‘실천’ 사이의 곤란함에 대해서라면 같은 실마리를 공유할 수 있을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당신(안젤라 데이비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당신의 목숨이 우리 자신의 목숨인 것처럼.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스 처형실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메워스 통과할 수 없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만약 그놈들이 아침에 당신을 데려간다면, 밤에는 우리를 데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 흑인해방운동 탄압에 저항하는 발언 모음집(안젤라 데이비스) 구절을 『주권의 너머에서』에서 재인용했다.

‘환대’의 논리

다시 노숙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이야기다. 우카이 사토시는 그들을 ‘같은 사회 같은 시대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와는 달리 집이 없는 사람’, ‘‘우리’와 달리 시민으로서의 여러 권리가 없는 사람들’(22쪽)이라고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서도 노숙인이나 외국인은 마이너리티의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잊어서도 눈감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이때 그가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사유·실천의 원리)은 ‘환대(hospitality)’라는 말이다. ‘환대’라는 말은 그의 책 『주권의 너머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데리다가 종교적 자비로서의 ‘관용’과 분명하게 구별해낸 그 ‘환대’의 사유의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환대’로 직접 들어가기 전에, 그가 말하고 있는 ‘마이너리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짚어 두어야 한다.

저자에게 있어서 마이너리티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메이저리티와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마이너리티도 아니다. 그들은 명명(호명)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는 존재들이다. 명명하는 쪽은 언제나 주인(주체)이고, 명명당하는 쪽은 언제나 대상(객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좀처럼 역전되기 어려운 역학 관계가 들어 있다. 과연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메이저리티라는 입장에서 그들을 마이너리티라고 이름붙이는 한, 그들은 영속적인 타자일 뿐이다. 나(우리)는 좀처럼 주인 자리의 안전함(우월함)을 떠나지 않으려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이름붙인 마이너리티에 대해서라면 연민 혹은 동정의 자기기만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분법적 주객관계를 벗어나지 못할 때, 그 안에서 또 다시 연쇄적인 하이라키가 생기는 사례는 또 얼마나 많이 존재해왔던가.

그러나 우카이 사토시에게 있어서 마이너리티는 ‘같은 사회 같은 시대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와 달리 여러 권리들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 각각의 특이성들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의 다양성 자체다. 그가 홈리스, 노숙자, 야숙자, 노숙인, 노상생활자 등 다양한 말들을 맥락마다 다르게 사용하는 것도, 그들 각각의 존재양태들에게 불가피하게 가해졌던 폭력의 곤란함과 역사성을 최대한 비껴가기 위함이다.

즉, ‘마이너리티’라는 이름 앞에서 곤란함을 토로하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주인과 손님’ 같은 관계들의 뿌리 깊은 이분법을 재고한다. 앞에서 미리 이야기했지만, 노숙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배제(배척)이 심화되는 사태 앞에서 그가 요구하는 것은 ‘환대’의 사유와 실천이다. 그리고 이 ‘환대’라는 말을, ‘손님(낯선 사람/ 적)’과 ‘주인(아이덴티티/ 힘/ 주권)’의 관계 속에서 재활성화시킨다. 통상, 우리는 손님이 주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종종 이런 감각이 배제의 논리로 작동되지만, 저자는 ‘객’이 ‘주’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야말로 ‘객’에게 감사하는 전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객’이 ‘주’에게 와준 것을, 그리고 ‘주’ 역시 자신이 최초의 ‘객’이었음을 상기시켜 준 것을. 그리고 ‘주’인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주권’의 멍에에서 벗어날 기회를 부여해 준 것을(31쪽) 말이다.

그러므로 ‘환대’란 감사해야 할 사람의 지위를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환대’는, 주객전도를 통한 ‘엄청난 위치전환 혹은 가치전환’이고, 발견되지 못하고 가시화되지 못한 채 잠재된 것들에 기회를 주는 사유이며,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31-32쪽) 것들에 대한 말건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주권 너머에서는

물론 우카이 사토시의 『주권의 너머에서』에서 ‘외국인’과 ‘노숙인’ 문제는 전체 속에서 작은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책의 앞부분에서 문제제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부분이면서, 그의 사상과 다루고 있는 큰 대상들(1997년 이후 10년간, 세계 각 지역에서 일어난 세기전환기적 상황들에 대한 사유)에 대한 입구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외국인과 노숙인으로 상징되는 존재들을 분할하고 배제하는 논리를 질문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그것에 개입해 들어갈(극복할) 사유를 제시하고, 그리고 그들 존재 이면에 잠재되어 있되, 무언가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는 특이성(인 동시에 다양성)들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일본 내셔널리즘 비판, 국가주권 단위를 거치지 않는 독립과 연대의 가능성, 2001년 9·11 이후의 세계정세 분석, 그리고 당시 활발했던 테러리즘 담론에 대한 비판 등은, 단지 현상분석에 그치는 글들이 아니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분석(비판)을 넘어서 어떤 비가시적인 운동성을 상정하고 있는 장소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제목에 ‘-로’나 ‘-에’가 아니라 ‘-에서(で)’라는 조사를 붙인 것 역시 그런 운동성을 강조하는 데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번역자가 원제대로 ‘저편’이라고 하지 않고 ‘너머’라고 번역한 것 역시, 그 잠재성과 운동성을 상상케 하는데 적확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에서의 ‘주권’은 국가주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나’ 개인들의 주권의 문제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하는 ‘주권의 윤리’란, 곧 개인들 각자의 윤리를 포함하는 것이며, 나 스스로가 나 아닌 다른 상태가 되는 것, 나아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아닌 다른 상태가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그가 말하는 ‘환대’의 사유 속에서도 엿볼 수 있었듯, 그의 사유와 실천의 방법론에는, 데리다 식의 탈구축(deconstruction) 개념(한국에서 많이 오해되었던)에 빚지고 있다. 가령 그는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는 한편, 환대의 실천을 막는 주권의 윤리를 단순히 이념에 비춰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효성 있게 탈구축하는 과제에 응답해야만”(31쪽)한다고 말한다. 그가 주권을 비판하면서도(환대를 가로막고 장애가 되는 조건), 주권의 기원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그것을 전유해버림으로써, 다른 맥락에 위치시키고, 다른 가능성으로 전화시켜 버리고자 하는 것. 또한 일본 내셔널리즘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있다고 여겨져온) ‘부끄러움’이라는 개념(혹은 정서)을, 스피노자적 의미의 ‘감응(affect/ affectus)’으로 전유·재해석해내면서, 내셔널리즘을 비판하고 동시에 내셔널리즘을 극복해내고자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책은, 설혹 정말로 ‘바깥’이 없다고손 치더라도, 끊임없이 그 바깥을 상상하고 내파하고자 하며 이곳저곳의 지뢰들을 고안하고 실험하며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잠시 저자가 ‘일본 내셔널리즘과 부끄러움의 관계’를 재해석하기 위해 사용한 ‘감응’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 스피노자를 경유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을 갖고 있다. ‘감응’이란, ‘촉발(affecio)’과 다르고, 촉발을 불러일으킨 외부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촉발된 신체 내지 정신의 활동능력의 증대 혹은 감소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생성변화를 위한 기동력’(75쪽)의 문제가 된다.

즉, 이 ‘감응’과, 저자가 말하는 ‘환대’를 겹쳐놓고, 다시 적극적으로 독해해본다. 환대라는 것이,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환영의 태도인 한, 그것은 곧 미지의 타자들과의 우연한 마주침에 대한 마음가짐, 그리고 그 마주침을 통한 신체 내지 정신의 활동능력의 변이와 관련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즉, 이 책에서 ‘주권의 너머’는 ‘환대’(1부)와 ‘저항’(2부)이라는 논리적인 두 개념축을 통해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감응’에 방점을 찍으면서 생각해보면, 저자가 꿈꾸는 ‘주권의 너머’란, 이 세계의 법의 언어와 그 효력에 갇히지 않는 생명력·활력의 웅성거림, 어떤 꿈틀거림으로 가득 찬 장소임을 다시금 강하게 확인하게 된다. 그곳은 늘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장소인 것이다.

‘24번지 R246 철교아래 서쪽 종이박스 로켓’

책을 덮으면서 어떤 마을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도쿄 도심에 있는 요요기 공원 한복판에서 허름한 천막을 치고 일종의 커뮤니티를 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블루텐트 마을’의 이야기. 시부야 역 근처 246번지에 거주하는 노숙인들의 밥공동체, 화가이자 빈민운동가로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이치무라 미사코 씨 이야기(그들의 이야기는 『주권의 너머에서』를 번역한 역자의 또 다른 역서이기도 한 『저… 여기에 있어요』에서 자세히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인 이치무라 씨가, 신주쿠의 한 노숙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했던 이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이지만, 르뽀르타쥬처럼 읽을 수도 있는 책이다), 그리고 지금은 강제 철거되어 사라졌지만 90년대 중반 신주쿠 역 서쪽 출구 지하도를 중심으로 대안적 코뮤니티를 꾀했다는 ‘단볼 하우스촌’의 아트 프로젝트 등.

그들은 내가 처음 도쿄에 갔을 때 마주쳤던 이들처럼,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결코 개인적이지 않은 사연과 삶의 이력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체류조건을 갖추지 못한 외국인일 수도 있고, 개인파산자일수도 있고, 전과자일수도 있고, 따돌림 받아온 사회부적응자일수도 있다. 우리가 그저 손쉽게 마이너리티(이젠 애초의 정치성조차 상당히 퇴색된 말이 되어버린)라고 통칭해온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메이저리티로부터의 법과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생존법을 고안하는 다양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메이저리티로부터 ‘명명된’ 마이너리티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명명하고(『저… 여기에 있어요』에 등장하는 노숙인 아줌마 ‘키쿠치’씨가 무려 4개나 되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블루텐트 마을’의 그들은 편히 발 뻗고 누울 곳 없이 전전하며 폐품수집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곤 하지만, 물물교환으로 화폐경제를 따돌리기도 하고, 노숙정보를 나누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모두에게 버려진 쓰레기를 재활용·재생하며 나름대로의 생산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며, 함께 빵을 먹고 차를 마시는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오래전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읽으며, 그들이 말하는 마이너리티에 대해, 그리고 ‘되기’의 상태로 절대화되어야 할 역량이라는 것에 대해, 좀처럼 실감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카이 사토시의 ‘환대와 저항’의 사유를 생각하며, 그리고 이치무라 미사코의 책속에 있는 블루텐트 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도쿄 시부야나 코엔지에서 만났던 많은 분노(비판)와 사랑(연대)의 꿈틀거림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장소에의 권리를 위해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어떤 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지금 어떤 우연들이 만들어 내는 필연, 혹은 ‘운명을 사랑하라’의 나만의 버전에 대해 생각해낸다.

마지막으로 다음은, 『저… 여기에 있어요』에 소개된 이치무라 미사코 씨의 말이다.

“최근엔 역 옆에 있는 철교 아래 작은 공동체에서 지냅니다. 길갓 한쪽에 종이 박스를 덧대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 옆에 우편함을 만들곤 나름대로의 주소를 적어 스스로에게 엽서를 보내 보았죠. 그러나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우편국에 가서 약간의 실랑이를 한 결과 주소를 얻는 데 성공했어요. 번지나 아파트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우편국의 사람과 제가 상세한 주소를 만들어야 했지만요. 이것입니다. ‘24번지 R246 철교아래 서쪽 종이박스 로켓.’ 우편함에 엽서가 도착했을 때, 그 기분은 최고였죠! 갑자기 확~하고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어요.” (『저… 여기에 있어요』, 153-4쪽)

그녀는 그곳에 거주하고 있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박탈당한 장소를 다시 되돌려 받았고, 더군다나 이 세계의 법과 질서 속에 없는 주소(장소)를 스스로가 고안하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길에서 살아가기라는 주거방식 역시 스스로 증명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막 읽거나, 떠올린 이야기들은, 우카이 사토시가 말하는 ‘주권의 너머’에서 일어날(일어나고 있을) 일들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바깥’이 없다고 체념하지 않고, 무언가 끊임없이 생성변화시키면서 서로 접속하고 2,3,4,(…)∞의 사례로 마구 확장해내고 있는 것. 지금 여기의 ‘바깥’을 상상해도 될 꿈틀거림과 활력 자체. 이것이 바로 ‘환대’와 ‘저항’이 빚어내는 액츄얼한 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계 어느 곳에선가 ‘24番地R246ガード下西ダンボールロケット’라는 주소가 연쇄적인 파열음을 내고 있으리라 상상하며. ‘환대’와 ‘저항’이 종이 위 활자나, 식자들의 머릿 속에 그저 갇혀 있지 않기를 희망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안의 무엇을 건드리고 그것과 접속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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