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그래도 교사와 학생이 희망이다

- 김대경

좀스러운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나이가 내 나이보다 많은가 적은가를 확인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어떤 일을 할 때, 이제 내 나이가 어리다고 변명하기에는 글렀음을 깨닫고 나서부터 이런 습관이 생겨난 것 같다. 이제는 내 나이가 적지 않고, 그러니까 나이 몫을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자꾸 하나보다. 옛날에는 좋은 글을 읽을 때마다 저자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걸 알고는 ‘나이가 들면 이렇게 현명해지나 보다.’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내 나이가 마흔 줄에 들어서다 보니, 그게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더더군다나 젊은 시절보다 더 못난 생각을 하거나 더 어리석어지지를 않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생길 때도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경험과 섣부른 판단에 더 확신을 갖게 되고,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잘 늙어가야지. 이게 요즘 내가 갖는 생활신조 중의 하나이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나이 이야기를 불쑥 꺼낸 이유는 최근에 내게 큰 깨달음을 준 책의 저자가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계삼 선생님이 쓴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이라는 책이 바로 그 책인데,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이계삼 선생님의 글을 간혹 접해 왔었고, 그때마다 글이 군더더기 없고 공감을 주는 경우가 많아 책이 출간되자마자 사 놓고 책꽂이에 꽂아 둔 터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내가 재직하던 학교의 선생님들과 이 책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하게 되었기에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었다.

한달에 한번씩 대여섯 명의 교사가 모여서 토론을 하는 이 모임에서는 항상 책을 고르는 일이 가장 힘들다. 선생님들마다 책에 대한 성향이나, 교과, 관심사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좀 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의 책이 바로 교육 분야이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부닥치는 문제가 교육 문제이다 보니, 책마저 그런 분야의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는 의견도 있고, 지금까지 읽어온 교육서가 실제의 교육 현장에서 도움이 되기보다는 괴리감을 더 느끼게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더욱 이번 모임에서 이 책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를 했다. 지금까지의 추상적이고 딱딱한 교육서와는 그 성격이 판이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장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이 잘 드러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이 책을 지하철에서 읽다가 전태일 관련 부분에서 책에 너무 빠져 있었던 나머지 내릴 역을 지나치고 만 경우도 있었고, 권정생 선생님의 유서 이야기를 읽으며 눈시울을 적신 적도 있었기에, 이번이야말로 교육 분야의 책에 대한 선생님들의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하리라 나름 자부하고 이 책을 적극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 걸. 다음 독서 토론 모임에 나갔을 때, 선생님들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 크게 빗나갔다. 전체적인 반응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책은 너무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저자의 삶을 통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이 계속 부끄러워서 불편하게 읽었다고 하셨고, 어떤 선생님은 저자가 특정 가치를 강조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고 하셨다. 또 어떤 선생님은 이 책이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이유는 저자가 몇 년 동안 여러 매체에 실은 글을 한 권에 묶어 놓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고 무거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 그것을 전제하고 천천히 읽다보면, 저자의 이야기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고도 했다.

가장 민감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분은 책에 나오는 김선일씨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도 그 때의 일이 기억이 난다. 김선일씨가 납치되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나는 잠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를 구해줄 것이라는 기도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이유도 아닌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질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안타깝게도 관련 동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그 때 어떤 선생님이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면서 몇몇 선생님들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그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학생들이 동영상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사뭇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던 것 같다.

이계삼 선생님의 글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해 한 선생님이 왜 학생의 호기심을 교사가 자기 개인의 감정으로 들이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학생들이 당연히 호기심을 가질 만한 것 아니냐, 그것에 대해 교사가 학생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갑자기 말문이 막혔고,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교육이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에서부터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입장과 견해는 달랐지만, 어쨌든 우리는 두 시간 넘게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했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을 가지고 선생님들과 토론을 했던 것이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토론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서로가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그냥 살아간다면, 더 나아질 것이 없지 않았겠는가? 나도 그 선생님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가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고 나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 본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찜찜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튿날, 한겨레신문에서 나는 서경식 교수가 쓴 칼럼을 읽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일본의 한 재일조선인 학생이 어느 사립고등학교에 교육 실습을 갔는데, 그곳 교사가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잔인하게 억압하던 당시에 당신이 만일 독일인이고 유대인 친구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친구와의 교제를 끊겠느냐는 질문에 많은 학생들이 당장 교제를 끊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서경식 교수는 이제 교과서적인 지식조차도 폐기해 버린 오늘날 교육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교육 현실이 여기에까지 이른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누구나 쉽게 언급하고, 언제나 함께 쓰고 있는 단어인 ‘교육’이라는 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의미가 극과 극을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이제 교사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들이 말하는 교육의 상식에 적당히 기대어 살 것인가? 스스로 교육의 의미를 성찰하면서 계속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살 것인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고 속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힘을 주는 이계삼 선생님과 서경식 교수의 글이 있으므로, 교사인 나는 외롭지 않다고 느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더욱 고민하게 된다.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최후의 도전자들의 장래 희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직업이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역사교사이다. 그들의 가까이에서 인간과 삶과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치는 교사의 영향을 학생들이 직접적으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교사와 학생들이 여전히 희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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