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불온할 때만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

- 고병권(수유너머R)

사회 불온 세력! 대학 다닐 때까지 뉴스에서 참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뭐 지금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온순과 순수를 혈안이 돼서 추구하는 사회. 불온 세력, 불순 분자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 이번 주 <위클리 수유너머>는 여기에 딴지를 걸고 싶습니다. 불온과 불순이 없는 사회는 ‘함께 함’도 불가능합니다. 즉 ‘불온’이 없으면 ‘함께’도 없습니다.

공공미술에 대한 단단씨의 글은 그 이유를 훌륭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공공미술을 정의하는 ‘공공’이란 국가나 제도의 영역도 아니고, 사적인 것의 중첩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이 불가능하고 제도가 불가능한 곳, 거기서 ‘함께 함’의 영역이 열립니다. 단단씨는 그 곳을 “담론의 가장 자리, 어쩌면 그 가장자리에서도 가장 희미한 곳”이라고 부릅니다. 한 개인, 한 사회의 한계지대까지 가야 합니다. 내가 거기까지 가지 못하면 ‘나’는 여전히 ‘나’로써 머물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안에 머무는 한에서 ‘함께’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 유한성이 폭되는 영역, 내가 어떤 무한성 속에 노출되는 영역, 내가 ‘독백’을 끝낼 수밖에 없는 영역, 그곳이 공공성, 공동성, ‘함께’가 정의되는 영역이 아닐까요.

오래된 연애처럼 눈이 익숙하고 귀가 편안할 때 우리는 상대를 세심하게 보지 않고 주의 깊게 듣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익숙치 않은 것, 편안치 않은 것을 세심하게 볼 수 있을 때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소음과 낙서가 우리의 말과 글을 구원합니다. 소음과 낙서를 통해서 우리의 소통 능력이 시금됩니다. ‘그래피티 아트’의 실천성이 여기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공을 헤치는 낙서가 아니라 공공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예술적 실천인 거지요. (<전선인터뷰>에서 최근 서울시를 엿먹인 ‘해치맨’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이런 맥락에서 이번 주 최진석씨의 수유칼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최진석씨 말처럼 요즘은 인문학 강좌를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군데 인문학 강좌를 다니다보면 주최자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정부 비판 내용이나 사회 통념상 문제될 만한 내용은 빼달라는 거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아주 우회적으로 ‘건전한’(!) 내용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말을 소통의 언어로 생각해서 일겁니다. 불온한 내용이 소통을 망친다는 거죠. 그저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인문학! 무슨 휴양지 광고 같군요. 개콘의 동혁이형 버전으로 말해볼까요? “여기가 무슨 마사지 센터야? 정신 피로회복 이벤트탕이야? 문학탕, 역사탕, 철학탕? 상상, 지성, 이성, 각 부위별로 때밀어줘?”

인문학이 당신의 사상에 아첨하길 바라십니까? 당신 머릿속 말을 누군가 당신에게 다시 들려주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나 다른 사상, 타자의 말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상 자체,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사상도 언어도 한 개체(개인이든 사회든)의 불가능성이 드러난 곳, 독단과 독백이 불가능한 곳에서 생겨난 것들이니까요. 내게 순응하지 않는 존재가 없다면 내게는 언어도, 사상도, 배움도, 공동체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불온성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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