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타니가와 간은 누구인가?

- 편집자

유민의 코뮨을 환시한다-‘운동체’로서의 타니가와 간

1) 타니가와 간의 부활

타니가와 간의 부활의 조짐이 일고 있다(2006 <<서클 마을>>복간, 운동 관계자들의 재평가 작업). 왜 그럴까? 또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할까? 최근 신자유주의의 진행 속에서 나타나는 노동자들의 난민화, 유민화(비정규노동자, 파견노동자)와 그 속에서의 새로운 코뮨 운동(‘새해 맞기 파견 마을’)의 등장이, 2차 대전 후 주변화되어 가던 민중(광부와 가난한 농어민)과 함께 싸웠던 그 사상과 운동에 다시 주목하게 하고 있다.

그동안 타니가와는 신좌파의 기원이나 원류처럼 읽혀왔다. 2.26 사건의 우익 파토스와 전공투의 신좌익 파토스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타니가와를 읽고 농촌에 뿌리 내린 애국심을 기반으로,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로 통하는 관점에서 다시 읽는 시도도 있다(마츠모토 켄이치). 그러나 이건 말도 안 된다(오키나와와 자이니치에 대한 타니가와의 관점). 타니가와 간의 사상은 ‘집단’에 대한 사상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전공투 세대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 카리스마적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본령은 ‘집단’과 코뮨 활동, 그것을 네트워크해가는 활동에 있었다. 그는 이질적인 것을 이어내는 ‘공작자’로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 또한 변해갔다. 50년대 전반 비주류 국제파에 속해 있던 타니가와는 ‘공작자’라는 키워드를 다시금 내걸어 당과 민중의 틈에서 새로이 ‘집단’ 형성을 시작한 것이다.

2) 우에노와 모리사키와의 연관과 결별

‘침묵’의 우에노와 ‘요설’의 타니가와 사이에는 감성의 차이가 짙게 있었다. 우에노는 ‘타이쇼 행동대’와 ‘타이쇼 광업 퇴직자 동맹’의 활동에 대해 “저것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모은 타니가와 씨의 놀이”라고 야유한 적이 있다.

모리사키는 나카마 시의 여성들과 함께 서클 잡지를 내고 있었고, 머리만 굵은 남자들과는 다른 여성들의 생활에 대한 실감 속에서 어떻게 말이 직조될 수 있는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요설’스런운 지식인인 타니가와의 ‘말의 폭력’에 대해 쓰디쓴 비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리사키가 전하는 일화(“말로 노동자를 낚는 놈으 죽여버리겠다!”며 타니가와를 식칼로 위협했던 젊은 광부)와 타니가와의 도쿄로의 이주를 두고, 노동자의 생활세계로부터 괴리된 타니가와가 좌절 속에서 철수했다는 식으로 상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와 함께 ‘타이쇼 투쟁’을 만들어 낸 ‘동지’들은 자신들과 타니가와는 노동자와 지식이라는 관계로 사귀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지’로 대등하게 활동했다고 증언한다. 그 동지들은 타니가와가 ‘자립건설’운동이 궤도에 오르면서 실업 광부들이 자립해갔기에 할 일이 없어졌고, 그래서 그곳을 떠난 것은 아닌가라고 증언한다. 노동자 속에 들어가려다 못한 지식인이 철수했다는 틀에 박힌 스토리를 만들어버리면 실제로 ‘자립’해갔던 이런 노동자의 관점이 누락돼 버린다.

3) 라보 교육운동으로부터 ‘모노가타리 문화회’로

중 산계급의 안정된 가정과 아이들로 그 계급적 기반은 바뀌었지만, 타니가와에게 있어서는 라보교육운동 역시 집단, 코뮨을 만들어내면서 그 속에서 주체성과 감수성을 변환시켜가는 운동체였다. (68년부터 71년에 걸친 ‘테크 쟁의’ 시 타니가와가 보여준 ‘변절’은 라보 또한 운동체라는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체교향극’에서 출현하는 것은 바로 시시각각 유동해가는 일시적인 코뮨이다. 고도성장 하에서 많은 노동자가 일본형 경영의 기업체에 편입되어 춘투로 편안하게 임금투쟁을 하는 노사협조시스템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 타나가와는 그 속에서 노동자의 감수성에서의 어떤 변질을 보고 있다. 머리는 전투적인 좌익의 마음으로 있지만 신체의 감수성은 고도성장기의 소비사회의 욕망에 말려들어가 있는 것. 타니가와는 그것에 저항하는 자립적 감수성을 어떻게 직조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 키를 언어, 이야기에서 찾아냈고, 이야기를 해독해가는 아이들의 감수성 속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타니가와는 강렬한 개성을 갖는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상운동을 사적 소유로부터 해방시켜가는 ‘사상의 무서명성’을 향한 갈망을 볼 수도 있다(모순 덩어리 같은 존재로서 타니가와 간이라는 ‘공작자’, ‘운동체’).

4) 환영의 혁명정부에 대해서(타니가와 간)

나는 내 생애에 어떤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만들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러 개의 자아와 그런 자아의 생산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당적(黨籍)은 과거를 포함하고 현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반쪽 증명서에 불과하다.

(눈이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하나의 논리가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반사 장치, 즉 또 다른 논리를 필요로 한다. 서로 완전히 배척하는 뿌리를 갖고 있지만, 마치 서로 분신인 것처럼 닮아 있는 두 논리(가령 불교의 무상관(無常觀)과 레닌의 국가 사멸론, 관념론과 유물론), 이 대조되는 논리를 서로 맞물려 보면 그 범주 주변에 있는 애매한 영역이 떠오를 것이다. 만약 그 애매함이 행위를 통해 뛰어넘을 수 있는 허용 한도 내의 것이라면, 오히려 뛰어넘는 것이 틈의 넓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측량법일 것이다(가령, 일본 민중의 불교적 무상관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레닌적 국가 사멸론으로 이끌 수 있다?) 한 개의 사상을 표현하는 복수의 형식이 가능하다. 한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한 논리는 반대 측면에서 어떤 충전을 받지 못한다면 행위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없다. 적절한 보충을 얻지 못해 생명체가 될 수 없었던 최고의 지적 산물이 (민중 속에) ‘무수히’ 존재한다(‘민중의 추상 능력’).

혁명가를 이상화하는 이러저러한 특징의 반대 속성을 집중시켜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 내보자. 만약 그 인간이 ‘자아’나 ‘혁명’과 같은 것들과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면, 그 인간은 과연 어떠한 성질의 침묵을 소유하고 있을 것인가?(완전한 침묵 속에 있을 것이다.) 완전히 수동적인 몸을 지닌 인간, 가능한 것이라고는 침묵과 거절 밖에 없는 듯한 그런 인간, 이런 인간이야말로 흙 속의 흙, 돌 속의 돌, 이 세상에서 가장 민감하게 갈고 닦여 맑아진 정지(靜止)한 거울이다.

현대는 그 한쪽 극에서 모순 해결에 대한 책임을 주체적으로 짊어진 정치적이고 논리적인 전위(플러스의 전위)를 낳은 시대였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것은 피라미드식 의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스로를 의식의 극에 위치시키면서 부단히 그것과 대립하는 극과 연결하려는 조직체가 전위라면, 민중의 의식 밑바닥에는 반동사상을 가장 높고 가장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곳에 미래를 지향하는 태아가, 어떤 초발운동을 하고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반동사상의 뿌리가 그 자체로 혁명사상의 맹아가 되는 관계…모방과 부정, 즉 비유의 탄력을 통해 이질적인 가치체계 사이를 이동하고 역행하는 미시적 지점(또는 순간)의 존재를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마이너스 극한, 잠재적 에너지의 우물, 이것을 나는 원점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결코 후위도 반동도 아니다. 그것은 부호를 달리하는 전위(마이너스 전위)라고 보아야 한다(민중의 잠재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 전위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후위를 타격함으로써 후위로부터 타격 받아야 한다(대중추수주의에 대한 비판). 따라서 전위의 책임은 최초로 점화하는 책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전위는 자신에게 한 순간의 점화 에너지가 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전위인 원점은 어떻게 자신의 마이너스의 말, 이른바 침묵의 표현을 통해 플러스 전위에게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세계의 영상을 뒤집지 않는 한, 현실을 뒤집은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먼저 이미지를 변화시켜라! 이것이 원점의 역학이다. 비록 유물론에 대립할지라도, 민중의 정당한 혁명의 순로는, 물질적인 조건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결코 불가능하다(경제결정론, 대중추수주의 비판/ 일공의 ‘평화노선’ 비판).

개성이라는 언어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의 내부란 외부의 힘, 즉 대략 생리적 식염수와 동일한 농도를 가진 것이 집중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원점(감성, 하부의식, 대지, 고향)은 전위(논리, 의식, 기계, 수도)를 대조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그림자 그림이며, 그것은 전위를 보충하고 수정하고 충전하는 하나의 마이너스 체계가 될 것이다. (기존의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적 통일’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전위와 원점이 일순간 통합되는 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관념과 실재하는 집단을 혼동하는 위험을 범하고 나서야 전진하게 되는 작업이리라. 이른바 탄광, 특수부락, 화산재 지역의 빈농, 한센병, 외딴 섬…이 원점에 대한 믿음은 개별 자아의 틀에 끼워 맞춰진 그 어떤 도취와도 닮지 않은 쾌락으로 지탱되고 있다. 어려운 것은 감각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마이너스 전위가 아직 열리지도 못한 채 혈류만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성문, 어떻게 그것에 이를 것인가? 요구되는 것은 불완전하고 애매한 소유형태인 사유(私有)로는 채울 수 없는, 강렬한 두 종류의 소유욕(자신의 사유를 버리고 분해해 그 에너지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플러스 전위와, 공유라는 형태가 아니면 아주 작은 땅조차 소유할 수 없는 마이너스 전위가 지닌 두 개의 소유욕) 이 포옹하는 고온고압의 상황이다.

나는 감성의 코뮨 권력을 ‘현실’보다 한발 앞서 세우려고 하고 있다. 정치에 종속된 문학이란 이런 식으로서만 종속하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연대의 왕국을 필요로 한다(또는 연대와 왕국의 일치를 요구한다). 혁명의 마이너스 극, 여기에 나는 정신의 변방 소비에트를 세우고, 환영의 혁명정부를 선언한다. 분명 나는 그들(주류 공산당?)에게 이족(異族)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민권을 요구한다. 외다리를 찾아 외다리로 걷는다. 어디로? 아무 것도 아닌 곳, 신도 다신 살지 않는 곳, 혁명만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 요네타니 마사후미 (변성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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