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환영의 혁명정부에 대해서

- 편집자

환영의 혁명정부에 대해서(幻影の革命政府について)1

조금 자랑을 섞어 말하자면 나는 내 생애에 어떤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만들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지 않다. 물론 전체를 포괄하기를 멈춘 사상은 불구일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왜 전체를 포괄해야만 할까. 저 유닉함에 대한 열망에 빨려 들어가 먹혀버려 목숨을 다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증식하고 확대하는 것일까?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이른바 여러 개(複式)의 자아와 그런 자아의 생산 시스템을 확립하는 건 불가능할까? (둘 중 하나를: 역자) 고르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재능이란 우연에 바치는 예배에 불과하다. 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모든 필연이 발견될 뿐이다. 그것만으로 좋지 않은가······. 나의 눈금은 유년기부터 그렇게 새겨져 있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옛날의 위대한 사상가들 또한 어쩔 수 없는 부정형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2 가 독행도(獨行道)3 21개조로 세계의 대부분을 거부한 끝에, 글의 마지막 부분에 부정형 긍정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도(道)를 거역하지 않고’라고 쓴 것처럼—. 세상의 길이란 무엇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노동의 틈바구니에 내던져진 나무조각 같은 예지, 하나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점이기도 한 말인 양 울린다. 분명 그는 모방이 지닌 궁극적인 기능을 의미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관념의 아련한 회화 혹은 음악일 뿐이었을지라도 이런 종류의 애매한 신호로 지탱되지 않는다면— 어떤 장려하고 완전한 세계관일지라도 (그곳에서 -역자) 살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부정 끝에서의 모방, 모방 끝에서의 부정 — 예를 들어 스스로를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라고 공언할 때의 저 두통을 동반한 암흑과 빛, 망설임과 자존(自尊). 이 거짓말은 언제 진실이 될 수 있을까. — 당적(黨籍)은 과거를 포함하고 있다. 현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적은 늘 반쪼가리(半片) 증명서에 불과하다. 오십 퍼센트의 진리가 진리일 수 있을까.

어떤 눈도 눈 그 자체인 자신을 직접 볼 수는 없다. 눈은 자신이 하나의 반사 장치이기 때문에 눈인 채로 눈을 보게 하는 것 또한 반사 장치 ……. 거울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논리가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반사 장치인 별도의 논리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대조가 될 논리 — 서로 완전히 배척하는 뿌리를 갖고 있지만, 자신의 그림자 그림(影繪)4 을 잘라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로 닮은 명제를 찾는다. 두 개의 논리를 서로 맞물려 본다. 가능한 한 잘 대응하도록 겹쳐본다. 그러면 범주 주변에 있는 애매한 영역이 떠오를 것이다. 만약 이 애매함이 행위를 통해 뛰어넘을 수 있는 허용 한도 내의 현격한 차이라면, 오히려 뛰어넘는 것이 틈의 넓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측량법일 것이다. 대담한 가정일지도 모르지만, 사상의 이해가 가지에서 가지로 날개를 접지 않고 항상 이동하는 것이라면, 불교의 무상관(無常觀) 위에 국가의 사멸에 관한 레닌의 학설을, 부정관(不淨觀) 위에 기계적 유물론을 겹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중에게 추상 능력을, 공작자(工作者)5 에게 오차(誤差)의 근대적 의의를, 그리고 사상 일반에 토착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점을 통과한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뿐이라는 유클리드적 규정을 버린다면······한개의 사상을 표현하는 복수의 형식이 가능해진다. 양자에 대해 반양자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면······일정한 논리체계에 대한 ‘반’ 논리체계를 상정할 수 있다. 아니, 이 논리 자체가 비유를 통한 이행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단언할 수 있다. — 한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한 논리는 반대 측면에서 어떤 충전을 받지 못한다면 행위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없다. 이는 당연한 사상의 운명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 적절한 보족(補足)을 얻지 못해 생명체가 될 수 없었던 최고(第一級)의 지적 산물이 존재한다. 무수히 존재한다. 우리들이 천재라고 부르는 자는 ‘이미 있던 것’이 생존하기에 필요한 요건(所與)를 찾아냈던 자에 불과하다.

보충(補足)의 논리와 논리의 보충(補足). 매일매일 그런 작업을 하는 수상쩍은 공작자(工作者)를 상상해 보자. 그는 공상한다.
우리들이 혁명가를 이상화하는 이러저러한 특징 — 직관과 분석의 무시무시한 격투, 운동 선수처럼 긴장된 반사 신경, 깊고 조용한 종합(總括)능력, 행동에 대한 마르지 않는 매혹의 샘 등. 이런 특징의 반대 속성을 집중시켜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 낸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 인간이 ‘자아’나 ‘혁명’과 같은 것들, 즉 최고 원자가를 가진 말, 개념의 왕자, 그 관에 빛나는 심정을 지닌 무리들과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면, 그 인간은 과연 어떠한 성질의 침묵을 소유하고 있을 것인가. 이른바 완전히 수동적인 몸을 지닌 인간, 가능한 것이라곤 침묵과 거절밖에 없는 듯한 그러한 인간을 상상해 본다면— 이런 종류의 인간이야말로 흙 속의 흙, 돌 속의 돌, 이 세상에서 가장 민감하게 갈고 닦여 맑아진 정지(靜止)한 거울면. 이미 인류로 돌아갈 방법조차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저 노래하는 후각, 문명에 대한 예언의 본능·····인 게 아닐까.

이 세상의 모순, 그 소용돌이의 총체······이것을 심연이라고 부른다면, 심연 또한 성장한다. 즉 심연 그 자체의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의 핵심은 그것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모순인 한, 길항(拮抗)하는 두개의 중심을 갖는다. 현대는 그 한쪽 극에서 해결에 대한 책임을 주체적으로 짊어진 정치적이고 논리적 전위를 낳은 시대였다. 비록 그것이 너무나 빈약하고 착오로 가득 찬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소용돌이치는 눈(眼)인 의식집단을 깨뜨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 자칫하면 이것은 피라미드적 의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위를 삼각형의 정점에 올려놓고 세계의 모든 시야를 간파할 수 있다는 피라미드식 의식 말이다. 원근법을 성립시키지 못하는 애꾸눈(單眼)의 사상이다. 이 의식 세계를 완전히 대조적으로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체제 변혁의 에너지가 그 의식의 중심에 전위를 지니고 있듯이, 불의식(不意識)의 초점이 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의식의 극(極)에 위치시키면서 부단히 그것과 대립하는 극과 연결하려는 조직체가 전위라면, —민중의 의식 밑바닥(底部)에도 반동사상을 가장 높고 가장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곳에 미래를 지향하는 태아가, 어떤 생리기능으로도 이름붙일 수 없는 초발운동(初發運動)을 하고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반동사상의 뿌리, 말단이 그것 자체로 혁명사상의 맹아가 되는 관계······모방과 부정, 즉 비유의 탄력을 통해 이질적인 가치체계 사이를 이동하고 역행하는 미시적 지점의 존재를,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른바 혁명의 마이너스 극(陰極)이라 할 만한 데카르트 가치체계의 도착된 정점(頂点)······이 세상의 마이너스 극한치(極限値). 그것은 노자가 말했던「현빈(玄牝)의 문」6 이며, 파우스트의 <어머니들의 나라>7 가 아닐까. 잠재된 에너지의 우물, 사상의 유방, 이것을 나는 원점(原點)이라고 이름 붙였다. 왜냐면 서로 보충(補足)해가면서 길항하는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를 형성한 타원에 두개의 초점을 상정하지 않고, 몇 가지 고전적 윤곽만으로는 심연의 거시적인 운동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단코 후위(後衛)도 반동(反動)도 아니다. 그것은 부호(符號)를 달리하는 전위(前衛)라고 봐야 한다. 전위(前衛)가 후위(後衛)를 견인하는 전위 자체에 내재된 에너지 동력기관이 아니라, 후위에게 타격을 받아 에너지를 획득하는 방향지시 기능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상은, 결국 오늘날의 역사적 실태로부터 등을 돌려 버린 게 아닐까. 전위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후위를 타격함으로써 후위로부터 타격을 받아야 한다. 전위의 책임은 최초로 점화하는 책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한 순간의 점화 에너지가 내재하는가 아닌가, 그것이 전위에게 끊임없이 질문되어야 할 부단한 고발이다.

만약 마이너스 (負)의 전위(前衛)인 원점(原點)에 이 고발장을 제시해 본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는 어떻게 자신의 마이너스의 말, 이른바 침묵의 표현을 통해 플라스(正) 전위에게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비평의 종착역, 생산의 기원(起點), 흙투성이의 수도(首府) — 거기서는 혁명의 직선적인 가치체계도 전도(轉倒)될 수밖에 없으므로, 낡은 체계의 가치전도는 완전히 보증된다. 문학이 정치에 복종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문학이 정치에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입각점을 갖는 것처럼 — 관념론을 거부하는 자만이 관념이 지닌 힘을 물질적으로 알 수 있다. 마이너스 전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이렇게 된다. 세계의 영상을 뒤집지 않는 한, 현실을 뒤집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먼저 이미지를 변화시켜라! 이것이 원점의 역학(力學)이다. 비록 모든 유물론에 대립할지라도, 민중의 정당한 혁명의 순로(順路)는, 물질적인 조건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판단할 수 없다.

대지를 짚나무들의 음악당으로, 척량(脊梁, 가장 중심이 되는 산맥줄기를 의미함: 역주)산맥을 한권의 책으로, 고향을 악령들이 마시는 샘으로 변화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면, 무엇을 변혁하려는 것일까? 혁명가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만리장성에 크게 씌어진 <중화인민공화국>의 글자를 최초로 봤던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었던가.8 ‘레나의 발포9 는 두꺼운 침묵의 얼음을 깼고, 민중운동의 강은 흐르기 시작했다’고 물까치처럼 기대의 함성을 질렀던 것은 스탈린이지 않았던가. 각자 자신의 모든 감성을 구석구석까지 점검해 보는 게 좋다. 부드러운 유년기의 후각이 기억하는 것, 즉 아이 돌보는 소녀의 머리에서 방적 공단 여공의 냄새를 맡고, 수제 목단(木丹)의 감촉에서 광부의 연심(戀心)을 찾는 게 좋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최소한 입술 뒷끝이 올라가는 어부의 발음을 느끼거나, 귀로 헛간에서 나는 밤의 소리를 느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개성이라는 언어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내부란 외부의 힘, 즉 대략 생리적 식온수와 동일한 농도를 가진 것이 집중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내 몽상은 극히 평범하다. 전위와 원점 — 이러한 대비(代置)가 한번 결정되면, 논리와 감성, 의식과 하부의식(下意識), 기계와 대지, 수도와 고향 등 상호 대립하는 범주군은 대개 비슷한 비례관계이므로, 민중이 혁명에 대해 가진 불만이 그대로 일개 부대로 편성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분명 전위를 대조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과 똑같은 그림자 그림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그림자 그림은 전위를 보충하고 수정하고 충전하는 하나의 마이너스 체계가 될 것이다.

대치(對置)는 누구든 할 수 있다. ‘변증법적으로 통일’하기도 할 것이다. 단 거기에는 전위(前衛)와 원점(原點)이 일순간 통합되는 장을 확인하는 게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히 관념과 실재하는 집단을 혼동하는 위험을 범하고 나서야, 전진하게 되는 작업이리라. 머리카락 한 올의 불일치가 멀어지면 질수록 차이를 벌려 놓는 영역인 것이다. 이른바 탄광, 특수부락, 화산재 지역(火山灰地)의 빈농, 한센병, 외딴 섬······이 원색의 별들이 둘러싼 투명한 공기의 문 안쪽에 모든 경향성의 유전인자를 결정하는 대장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 개별 자아의 틀에 끼어 맞춰진 그 어떤 도취와도 닮지 않은 쾌락으로 지탱되고 있다.

발밑 단층에는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이방인의 엷은 미소를 띠고서 저쪽 세계가 공인하는 증거를 자신의 현재 속에서 발견해야만 한다. 가난은 손쉽다. 실직도 손쉽다. 불가촉 천민이 되는 것도 손쉽다. 파국에 견디는 것도 손쉽다. 단 한 가지 어려운 것은 감각의 다리(橋)이다. 논리 저편에 있는 새하얀 소금을 어떻게 녹일까. 왜곡도 굴종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중량 전체를 싣고 뛰어 건너가는 외나무다리를 어느 갈비뼈에 걸까.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정신의 ‘코끼리 묘지’로 향하는 다리 하나를 지키는 것 — 왜냐면 그것은 마이너스 전위가 아직 시작되지도 못한 채 혈류만을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성문, 그것을 향한 길이기 때문에.

과연 그것이 그들의 한 방울 침묵과 거절에 피투성이가 되지 않고서 가능할까.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추상만을 지각하는 존재이므로, 이때 요구되는 것은 이중의 역상(倒立)이다. 감각에 의해 논리를 규정하고, 나락(奈落)으로 하강함으로써 상승하는 지옥을 한층 더 깊게 가라 앉혀야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거기서 도덕이나 정치로 한정된 이유를 발견하려 한들 무엇이 가능할까. 굳이 말하자면 불완전하고 애매한 소유형태인 사유(私有)로 채울 수 없는, 강렬한 두 종류의 소유욕이 포옹하는 고온고압의 상황뿐일 것이다. 즉 자신의 사유(私有)를 버리고 분해해 그 에너지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플라스(正) 전위와, 공유(公有)란 형태가 아니면 아주 작은 땅(寸土)조차 소유할 수 없는 마이너스(負) 전위가 지닌 두 개의 소유욕 말이다.

이 세상에 길항하는 두 개의 극한 — 전위와 원점 사이에 존재하는 최대로 긴장된 에너지를 미래 코뮨의 도가니로 보는 관습은, 아직 세계의 전위 내부에서 정통성을 얻었다고 할 순 없다. 일종의 일원론이 지닌 너무 손쉬운 명확함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반드시 의식이 존재를 직역하여 반영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확실히 존재는 의식의 결정원인이다. 그러나 의식이 존재와 단순히 닮은꼴이 아님은 바보스러울 만큼 자연스런 사실이다. 존재 자체가 이미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확고한 고향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와 어디가 고향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유랑하는(流離) 소시민을 보자. 감각의 영역에 관한 한 고향을 지닌 프롤레타리아트에 비해 [유랑하는: 역자] 소시민은 마이너스의 기호를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원래 소시민은 고향인 프롤레탈리아트에 비해 플라스(正)이다. 또한 자기 편 내부의 플라스/마이너스(正負)의 기호는 당연히 적과의 관계에서는 유통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도식화엔 흥미가 없다. 말하자면—소유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소유한다. 감성의 코뮨 권력을 ‘현실’보다 한발 앞서 세우려고 하고 있다. 정치에 종속된 문학이란 이런 식으로서만 종속하는 것이지 않을까. 놀랄 필요도 없다. 아라공10 은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내가 싫어하는 카뮈식으로 말하자면 연대의 왕국을 필요로 한다. 아니 연대와 왕국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카뮈의 한계가 있기에, 나는 그 일치를 요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결의를 자신이 인정하는 것, 그것이 없다면 세계는 이유를 잃는다. 이데올로기의 희미한 비밀이 거기에 있다. 혁명의 음극, 흙투성이 수도, 여기에 나는 정신의 변방 소비에트11 를 세운다. 높은 삼목나무처럼 환영의 혁명정부를 선언한다. 분명 나는 그들에게 이족(異族)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민권을 요구한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지 어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 없는 나는 모래 위에 놓인 생선과 같다. 단지 그 정도의 인식으로 걷는다.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한 외다리로.

외다리를 찾아 외다리로 걷는다. 그 해학적인 파행 속에서만 포위된 안개에서 탈출하는 첨병의 모습을 구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역사의 얄궂음처럼 어긋난 맛을 지닌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능은 공작자와 시를 잇는 필연의 붉은 실일 뿐이다. 고독과 도착을 바꾸어 연대에 다가가기 위해, 기우뚱거리고 피를 흘리면서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행렬 ……. 거기서 낙관을 찾아내건 비관을 찾아내건, 그들에게는 상관없다. 한명의 결핵환자가 병든 육신의 노동을 변변치 못한 음식물을 주는 새로운 신과 교환하는 그러한 장소에 조차, 전위의 눈은 미처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다시 걷는다. 어디로? 아무것도 아닌 곳. 신도 다신 살지 않는 곳. 혁명만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그곳은 묵묵히 해가 비치는 텅 빈 동굴의 광장이다. 불여귀가 하늘을 지배하고, 처녀치마12 가 골짜기의 음침한 여왕인 마을에서, 내가 그들과 헤어진 지 수년이 경과한 뒤, 우리들이 만든 장로회의 일원 중 한명이었던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나는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원시공동체였다.> 그럴지도 모른다. 포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였다.

-타니가와 간(신지영 옮김)

*이 글은 부커진R 3호(<맑스를 읽자>)의 ‘예술과 정치’편에 실린 타니가와 간의 글의 일부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R3호를 보시면 이 글 외에도 ‘동양의 마을 입구에서’라는 또 한편의 타니가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니가와의 문제 의식과 통하는, 어쩌면 그의 문제의식을 오늘날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는 자원이 될 다른 저자의 글들도 많이 만날 수가 있답니다.

  1. 이 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토론과 자료로 도움을 주신 동경외국어대학의 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역자). []
  2. (역주) 宮本 武蔵(미야모토 무사시, 1584-1645). 에도시대 초기의 검호(剣豪) 병법자兵法者)이며 서화(書画)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수묵화가, 공예가로도 유명하다. 호는 二天 또는 二天道楽. 저서로는 <五輪書>가 있다. []
  3. (역주) <독행도(獨行道)>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21개조로 쓴 것으로 <자서서(自誓書)>라고 불려진다. 만년에 히고노(肥後, 일본 지방행정구역이었던 나라중 하나로 지금은 쿠마모토현熊本県에 해당)의 호소가와번(細川藩,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부터 에도시대江戸時代에 걸쳐 유명세를 떨친 무가)의 객분(客分)이 되어, 쿠마모토(熊本) 치바성(千葉城)의 자기 집에서 죽기 7일 전인 1645년 5월 12일에 형제인 寺尾孫之允에게 이 책을 병법서인『五輪書』와 함께 전해주었다고 한다. []
  4. (역주) 카게에(影繪, 影畵)는 인물, 새 등을 본뜬 형상을 전등불에 반사시켜 벽 등에 비추는 놀이나 인형극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뜻은 ‘그림자 놀이’이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그림자 그림’의 의미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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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역주) ‘공작자(工作者)’는 다니가와 간 사상의 핵심적인 말이다. 원래 일본 공산당에서 대중을 계몽·선도하는 전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니가와 간은 1950년대 후반『서클마을(サクル村)』이라는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공작자(工作者)’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다니가와 간에게 ‘공작자’란 대중과 분리되어서 대중을 선도·계몽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전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위와 대중의 경계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에 사건을 일으키고 스스로도 변신해 가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공작자’라는 말은 사건을 일으키는 자, 경계를 넘나드는 자, 번역자,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 해석에 따라 다니가와 간이 지닌 사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谷川雁 著, 岩崎稔, <序論ー谷川雁と戦後精神の潜勢力>, <<谷川雁セレクション1>>, 日本経済評論社、2009 의 3절(<工作者とは何者か>)와 米谷匡史、<’流民’のコミューンを幻視する>, <<道の手帳ー谷川雁、詩人思想家、復活>>, 河出書房新社, 2009, pp. 4-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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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역주) 노자가 <<도덕경>>에서 한 말이다. 원문은 ‘현빈지문시위천지근(玄牝之門是謂天地根)’이다. 해석은 다음과 같다. “검은 암컷의 문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낳는 생명의 근원이다.” (박일봉 역, <<노자도덕경>>, 육문사, 2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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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역주) ‘어머니들의 나라’는 <<파우스트>> 의 비극 2부 1막 중 “어두운 복도”에 나오는 나라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메피스토펠레스: 실은 중요한 비밀을 밝히고 싶진 않지만, 여신들은 고독한 곳에 도도하게 앉아 계시지요. 그 영역에는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그 여신들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기가 난처해요, 그들은 어머니들이지요! / 파우스트: (깜짝 놀란다) 어머니들이라고! /메피스토펠레스: 소름이 끼치나요? / 파우스트: 어머니들, 어머니들! –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는데! / 메피스토펠레스: 사실 이상스럽지요. 그 여신들은 죽을 운명을 타고 난 당신들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우리도 그 여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사는 데로 가려면 아주 깊은 곳까지 기어 들어가야 해요. ····중략··· 길은 없어요. 아직 가본 일이 없고 들어갈 수 없는 곳, 바란다 해도 갈 수 없을 뿐더러,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인데도 가 볼 각오가 되어 있는지요? – 열 수 있는 자물쇠나 빗장도 없어요. 그저 쓸쓸함과 고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중략··· 그러면 내려가라, 올라가라 말해도 좋겠군요. 매한가지니까요. 이미 생겨난 것을 피해서 형체가 풀려서 흩어져 있는 나라로 가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즐겨보세요. 그러면 떠나디는 구름처럼 서로 얽혀서 움직이는 무리와 만날테니. 그때는 열쇠를 휘둘러서 몸에 닿지 않도록 피하십시오”(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곽복록 옮김, <<파우스트/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동서문화사, 2007, pp.296-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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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역주) 마르크스의 이 글귀는 마르크스의 편집으로 발행된 독일어 잡지 <<신 라인 신문(新ライン新聞 Neue Rheinische Zeitung)>>의 제 2호(1850년 2월)에 무제로 발표된 시평에 나온다. 일어본을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유럽의 반동파가 아시아로 도망칠 것이 바로 눈 앞까지 닥쳐와, 드디어 만리 장성에 간신히 도착해 극반동과 극보수주의의 성채로 통하는 문 앞에 섰을 때, 문 위에 다음과 같은 표제(題字)를 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리오— 중화공화국(Republique chinoise). 자유, 평등, 우애(Liberte, Egalite, Fraternite). 런던, 1850년 1월 31일” (大内兵衞, 細川嘉六監 역,<<마르크스 엥겔스 전집(マルクス=エンゲルス全集)>>, 大月書店, 228~229면)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낙후되고 전근대주의가 남아있는 아시아에서 오히려 그러한 전근대적인 공동체를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길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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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역주) 레나 학살사건(レナ虐殺事件、Ленский расстрел, Lena massacre, Lena execution)은 1912년 4월 17일에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레너강 부근에서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던 금광 노동자를 러시아 제국의 군대가 사살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레나 강 금광 노동자들은 하루에 15~16시간을 일했고, 노동자 1000명마다 700건 이상의 사고가 일어났고 그 벌금은 노동자들이 지불했다. 더구나 급료의 일부는 회사가 경영하는 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쿠폰 형태로 지급되었다. 결국 1912년 2월 29일 안드레이 에프스키(アンドレイエフスキー)금광에서 썩은 고기가 배급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발적인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3월 4일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 임금 30%인상, 벌금철폐, 식량배급 개선을 요구했고, 파업 중앙위원회(P.N.Batashev, G.V.Cherepakhin, R.I.Zelionko, M.I.Lebedev 들)는 파업을 광산 전체로 확대하여 3월 중순에는 6000명이 파업에 들어간다. 제국정부가 4월 4일 파업 중앙 위원회 멤버를 전원 체포하자 그들의 석방을 위해 노동자들이 모였고 2500명 정도가 나데지딘스키(ナデジディンスキー)금광으로 향해서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대는 도중에 군과 충돌했고, 군대가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270인이 사망, 250인이 부상당했다.

    이 발포는 러시아 대중 전체의 분노를 사, 러시아 전체에서 파업이 확산되었고 30만인 이상이 저항집회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정치나 노동운동에 충격을 주었고,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가 자신의 이름을 레닌(레닌강의 사람)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를 참고하여 번역 및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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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역주)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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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역주) 1949년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의 내전이 끝나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성립한다. 다니가와 간은 여기에서 1949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중국에 여러 가지 작은 소비에트 혁명정부가 있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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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역주) 처녀치마(猩猩袴, 쇼우조우바카마): 외떡잎식물이고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학명은 Heloniopsis orientalis. 주로 산지의 그늘이나 습기 많은 곳에 산다. 표고 1,500m 안팎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며 꽃은 4월에 피고 한국과 일본에 분포한다. 높이 17~30cm 정도이며 잎은 무더기로 나와서 꽃방석같이 퍼지고 거꾸로 선 바소꼴이며 녹색으로 윤기가 있다. 꽃은 4~5월에 피며 지름 2cm 내외이고 연한 홍색에서 자록색으로 변하며, 열매가 성숙할 때까지 남아 있다. 처녀치마란 잎이 땅바닥에 사방으로 둥글게 퍼져 있는 모습이 옛날 처녀들이 즐겨 입던 치마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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