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나만의 영화를 욕망하는 소유적인 관객

- 편집자

로라 멀비, <1초에/24번의 죽음>: 나만의 영화를 욕망하는 소유적인 관객

당신은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반복 강박의 충동에 사로잡혀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 사랑의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할 때, 그 첫 번째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시네필의 이러한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반복 관람을 통해 시네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네필은 ‘자신만의 영화’를 원한다. 그것이 자신이 존경하는 위대한 감독의 영화라 할지라도, 그들은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작가적 서명을 발견하고자 하며, 그럼으로써 나만의 영화, 나만의 감독, 나만의 숏, 나만의 편집, 나만의 인물과 배우를 소유하려 한다. 시네필은 자신에게만 특권화된 그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페티시적 욕망으로 충만하다. 그러니까 남들은 쉽게 무시하고 마는 사소함마저도 ‘자신의 시선 속’에서는 특별한 것으로 출현하는 순간에 매료된 자들, 그렇게 파편화된 영화적 이미지를 은밀하게 소유하려는 충동에 빠져있는 존재들이 바로 시네필이다. 단언컨대, 시네필은 반복강박에 빠져있는 탐욕스러운 존재다.

아마도 로라 멀비는 내 영화적 친구들을 ‘소유적인 관객’이라 불렀을 것이다. 1970년대 페미니즘 영화 비평의 기념비적 논문인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의 저자인 로라 멀비가 2006년 출간한 『1초에/24번의 죽음』은 디지털 환경의 도래 속에 ‘소유적인 관객’과 ‘사색적인 관객’의 출현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멀비에게 이 둘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관객성은 영화의 권력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멀비가 원하는 것은 감독이나 작품에 놓여있던 영화의 권력을, 수동적인 영화 보기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영화로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또 다른 창작자인 관객의 손’으로 옮기는 일이다. 이러한 관객은 이미 먼 과거부터 존재해온 것이긴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가속화된 디지털 환경은 이러한 관객성이 더 강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소유적인 관객이란 영사기로부터 강제되는 필름의 운동(1초에 24프레임의 움직임)에 종속된 내러티브에 제동을 걸면서, 그 강요된 흐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미지를 소유하려는 관객을 가리킨다. 디지털로 대변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영화 관람의 형태(DVD나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에서 정지와 반복, 그리고 되돌리기를 더욱 편리하게 했고, 완전한 영화의 전체에서 자신만의 영화적 파편을 추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했다. 물론 이는 영화의 완전함에 대한 폭력 행위이고, 이로 인해 영화는 훼손되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영화의 파편을 풀고, 새로운 종류의 관계를 열어젖힌다. […] 그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에 의해 가능해진 상호작용적인 관객성이라는 특성”(238)으로 나아가는데, 그러한 관객성은 ”텍스트 본래의 결합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 함께 가져온다“(35). 그러니까 멀비에 따르면, 소유적인 관객은 스토리의 결합, 그것을 함께 고정시키는 미학적인 완전함, 그리고 창작자의 비전에 반대하여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영화 그 자체가 다시 한 번 포토제니와 페티시즘을 혼합하며, 특별하고 의미있고 쾌락적으로 만드는 새로운 시각성”(219)을 향해 나아갈 기회를 얻고자 한다.

강제된 흐름에 저항하기 위한 정지, 또는 1초에 24번의 진실

물론 여전히 이러한 의문이 가능하다. 왜 이러한 폭력이 영화에 행사되어야 하는가, 라는. 어쩌면 『1초에 24번의 죽음』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응답, 또는 ‘허구적 극영화를 아방가르드적으로 관람’할 것을 종용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멀비의 영화적 관심이 다소 이동했다고 하더라도) 멀비는 여전히 페미니스트이며 <스핑크스의 눈> 등의 작품을 연출한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이다. 『1초에/24번의 죽음』의 여러 논의는 이 두 가지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그녀는 영화관에서 작동하는 ‘세 가지 시선’을 이야기한 바 있다. ‘카메라의 시선’, ‘캐릭터의 시선’, ‘관객의 시선’이 그것이다. 멀비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캐릭터의 시선에 종속된다고 주장했는데, 문제는 이 시선이 남성적으로 젠더화된 시선이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의 말미에 ‘시간과 공간의 물질성 속으로 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자유롭게 하는 저항’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남성적으로 젠더화된 시선의 강요로부터 벗어난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제 멀비는 디지털 문화의 도래 속에서 관객의 아방가르드적 관람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영화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도입에서 종결을 향한 예정된(또는 강제된) 지속, 또는 그것들 사이에 놓인 특정 양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멀비는 영화의 이러한 메커니즘이 관객에게 미리 주어진 연속적 흐름과 시점을 강요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영사기의 운동에 자신을 종속시키며 허구적 세계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영화의 필연적 운명이다. 멀비는 영화의 이러한 강제적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의 ‘정지성'(stillness) 속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즉, 영화의 흐름은 “전체 숏 사이에서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멈추었을 때만 사고와 고찰이 가능하다”(244)는 것이다. 국내 번역본은 ‘로라 멀비의 영화사 100년에 대한 성찰’이라는 다소 거창한 부제를 달았지만, 본래 부제인 ‘정지성과 움직이는 이미지’(stillness and moving image)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담고 있다. 즉, ‘움직이는 이미지’가 구축하는 환영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정지‘의 순간을 돌출시켜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럼으로써 스틸 사진의 속성 속에 내재한 영화적 본래적 성격을 발견하는 것이 본 저서의 목적인 셈이다.

지금까지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완고하게 지키고자 했던 비밀은 영화가 24장의 스틸 사진의 강제적 운동 속에서 움직임이라는 환영을 제공한다는 사실이었다. 누벨바그의 기수였던 장 뤽 고다르는 <작은 병정>(1960)에서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1초에 24번의 진실’이라 답한다. 고다르는 1초에 24장의 스틸 사진이 빠르게 움직이며 거대한 환영을 창출하는 영화의 진짜 진실은 ‘정지된 각각의 스틸 사진’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멀비는 이러한 고다르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려 한다. 멀비에게도 영화의 스틸 사진적 속성은 영화의 진실인 것이다. “고다르의 정의에서 사진의 리얼리티를 고정시키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에서 ‘생명이 없는 것’으로,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을 표시한다”(19). 멀비는 영화를 구성하는 각각의 스틸 사진을 영화의 본래적 성격으로 간주하며, ‘생명이 없는 것’, ‘죽음’ 등과 등가적으로 위치시킨다.

멀비의 이러한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지나칠 만큼 이분법적인 단순 도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차원의 개념을 이론적 근거 없이 단순하게 치환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녀는 영화의 환영(움직임), 운동, 삶, 생명이 있는 것 등의 개념을 한 쪽에 놓고, 그 대척점에 스틸 사진, 정지, 죽음, 생명이 없는 것 등의 개념을 위치시킨다. 문제는 ‘영화와 관련하여’ 이러한 개념적 대립이 어떻게 성립 가능한 것인지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 저서가 영화의 이론의 정립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영화적 사유를 에세이식으로 자유롭게 풀어가는 글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을 영화의 스틸 사진적인 ‘정지’로 단순하게 전치한 후 논의를 전개하는 부분에서는, 그 날카롭고 흥미로운 사유의 진동에 감탄하면서도 어떻게 이 둘이 동일한 위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더구나 영화의 본래적 성격을 스틸 사진적인 정지성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그녀의 이론적 입장이 ‘1초에 24번의 진실’이라는 고다르의 주장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면서, 이론적 근거가 빈약하게 느껴진다는 점은 『1초에/24번의 죽음』이 갖는 가장 큰 한계라 할 수 있다.

영화적 리얼리티의 발견과 사색하는 관객

멀비가 논하는 영화의 스틸 사진적 특성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국내에서는 『밝은 방』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에 빚지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바르트는 영화의 기호적 특성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바르트가 여러 저서에서 영화에 대해 간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숏의 흐름이라는 영화의 운동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운동이 정지한 스틸 사진적 속성으로 한정된다. 바르트에게 허구의 가면과 운동에 의해 강화된 영화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그가 스틸 사진으로부터 끌어낸 심리적 감정이나 사유를 제공할 수 없었다. 멀비는 바르트의 이러한 입장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태도는 ‘영화의 인덱스적 진실’, 또는 ‘영화의 리얼리티’를 이야기할 때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멀비는 영화의 인덱스적 진실이 대상을 기록하는 시간 속에 담겨있다고 본다. 멀비는 ‘이것은 지금이었다’로 요약할 수 있는 사진의 시간성을 영화가 갖는 인덱스적 진실로 그대로 수용한다. 허구 영화에서 영화의 기원적인 순간, 즉 자신이 등록되었던 순간인 ‘거기’와 ‘그 때’는 연속적인 흐름 속에 감춰지는 경향이 있다. 영화의 연속적인 내러티브 흐름을 따라가기 급급한 관객이 그 기록의 순간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의 인덱스적 성격을 무시한 대가로 영화의 환영을 만끽한다. 결국 멀비가 말하는 ‘사색적인 관객’은 그 흐름에 저항하면서 영화 속에 감춰진 리얼리티, 즉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카메라의 시선 속에 ‘우연히’ 포착된 리얼리티를 발견하려는 자를 가리킨다. “이미지를 정지시키거나 시퀀스를 반복하는 것을 통해 관객은 등록된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허구를 해체시킬 수 있다”(243).

이때 멀비가 말하는 리얼리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리얼리즘과 다르다. 그녀는 영화가 등록된 태초의 시간 속에 영화의 리얼리티가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그 등록의 순간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영화의 인덱스적 속성이고, 영화의 리얼리티이다. 1920년대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아이(kino-eye)를 통해 주장했듯이, 카메라의 능력은 사진가(또는 영화 감독)에 의해 주목받지 않았던 디테일까지도 재현할 수 있는 능력에 있으며, 이는 촬영 순간 인간의 눈에서부터 분리되어 대상을 기록하는 카메라 눈의 무심함, 또는 냉담함에 의해 얻어진다. 그 무심함에 의해 담겨진 디테일이 바로 바르트가 말한 풍툼(punctum)이자, 사색하는 관객이 조우해야 하는 영화의 리얼리티이다. 자명한 것으로 비췄던 시각의 장을 한 순간에 어지럽히는 ‘우연성의 리얼리티’와 조우할 때, 새로운 영화적 사유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인덱스로의 회귀와 사진 매체의 실재로의 회귀는 사실주의의 확실성에 대한 열망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속에서 과거의 흔적은 기록이거나 사실이고, 또한 실재와 재현의 붙잡기 어려운 속성에 대해 증언한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와 뒤엉키게 되는 인덱스로의 사진의 리얼리티이다. […] 인덱스의 리얼리티는 불확실성을 창출한다”(12-13). ‘불확실성의 지대’로 안내하는 인덱스적 기호와의 조우 속에서, 관객은 창작자의 의도, 또는 강제된 허구의 흐름에서 단절한 채, 카메라 눈이 발견한 세계의 리얼리티를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요컨대, 로라 멀비의 『1초에/24번의 죽음』은 영화의 진실이 1초에 24번 움직이는 각각의 스틸 사진 속에 내재해 있음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멀비가 영화의 운동 속에서 영화의 인덱스적 리얼리티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순간이나 영화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멈춰버리는 ‘프리즈 프레임’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적 사례는 이미지의 운동 속에 포즈의 순간이 개입함으로써 그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그 논의는 여전히 영화의 정지성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다.

역설적으로 이 책이 내게 던지는 질문은 멀비의 주장과는 반대 측면에서 제기된다. 영화의 본질이 과연 스틸 사진적 속성에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 그리고 그녀가 제시한 영화의 인덱스적 리얼리티가 과연 운동과 대립되는 정지 속에서만 출현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영화의 본질을 인덱스적인 기호로 파악하고, 영화의 리얼리티를 기계의 무심한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합치하는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영화의 본질이 영화의 기계적 운동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고, 그 속에서 영화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게 이 책이 의미가 있다면, 나를 영화 이론으로 이끈 최초의 질문, 개별 텍스트 분석이라는 한국 영화학계의 풍토에 휩쓸리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최초의 질문이 되살아나는 ‘언캐니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 있다. 인류 최초의 ‘발명된 예술’인 영화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던지려 하지 않는 그 질문 말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 안시환(영화 평론가)

* 본 서평은 『1초에/24번의 죽음』 전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영화 매체의 속성을 다루는 1장-4장, 9장-10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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