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건강법

몸을 공부한다는 것

- 담담

자, 이제 신(腎)까지 했으니 오장을 마쳤다. 헥헥. 나도 힘들다. 물론 이런 딱딱한 글을 읽는 분들은 더더욱 힘드셨을테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호는 좀 쉬도록 하자. 절대 쓰기 귀찮아서, 노느라고 시간이 없어서 그런거 아니다!!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지금까지 읽히지도 않는 글들 읽느라 고생하셨을 독자 제위들을 위해 말랑말랑, 알콩달콩 건강 다이제스트를 소개하겠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ㅡㅡ^ 그런 것 기대하지 마시라. 하여튼, 다들 까먹고 계실테니 다시 한 번 기초 초식 하나 검토하고 넘어가자. 어찌보면 인간은 망각에 관한 한 상습범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쨌든, 하여튼, Anyway 그래도 앞의 글들을 따라 읽어온 분들이라면 이제 웬만큼 동양에서 몸을 사유하는 방식의 기초회화에는 익숙해 지셨을 거다. 영어로 치자면 이제 Hello, Good morning 정도 할 수 있을 정도쯤이랄까? 뭐, 물론 ‘왜 난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주변 사람들이나 내 경험상 얼추 맞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상하게 논리적으로는 전혀 설득되지 않아~’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런 이야기들은 그냥 비논리적인, 비과학적인 이야기이므로 일단 ‘패스!’라고 ‘즉자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을테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고 초조해 하지는 마시라. 초조해 하면 지는 법!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 하나 하자. 학교 다닐 때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 “영어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뭐, 그렇다고 내가 영어를 잘 한다는 건 절대, 네버 아니다. 그냥 시험을 남들보다 조~금 잘 봤을 뿐이다.ㅡ.,ㅡ; 뭐 예상하신 분도 있겠지만 할 수 있는 말은 뻔하다.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 남들 다 단어 외우고, 문법 공부하고, 문제 풀고 하면서 익힌 것들을 자신은 남들보다 시간도 덜 들이고, 꽁(?)으로 쉬운 방법을 통해 잘하고 싶다고 하는거, 그거 완전 도둑놈 심보 아닐까? 그건 영어나 외국어를 공부하는데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다. 모든 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 법. ‘공짜는 없다’라는 말 꼭 명심해 좌심방 좌심실에 고이 간직들 하시라~

영어 공부는 죽어라 하면서 왜 음양오행은 책 한 번 제대로 보지도 않고 모르겠다고, 어렵다고 포기하는지? 동양학도 영어를 공부하는 만큼의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왠 뜬금없이 영어공부 이야기냐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 영어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해서 대학 졸업하고 나서도 10년을 넘게 죽어라고 공부하면서, 전혀 다른 문법체계라 할 수 있는 동양학에 대해서는 책 한 권 보고 이해 안 간다고 집어 던지시는 만행을 저지르시는지? 아니 책 한 권이라도 보면 다행이다. 알려고도 하지 않고, 책 한 권 보지도 않고 왜 그거 그냥 뻔한거라고 치부하시는지? 동양학을 한다는 것은 새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영어를 배우는게 훨씬 쉬울수도 있다. 지금의 우리 인식을 구성하고, 사유하는 체계가 서구의 언어 시스템 속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동양철학,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음양오행을 익힌다는 것은 그것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우리에게 낯선 개념들 정, 기, 신, 음양, 허실, 천간지지등등의 개념들을 외워야 하는 것이고, 자주 나오는 숙어나 관용구를 외우듯이 음양오행의 기본 도식들을 외워줘야 하며, 전혀 다른 문법체계인 영어의 주어 동사 목적어 구조를 익히듯이 음양오행의 상생, 상극의 문법체계를 새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어공부를 할 때 강제적이건 자발적이건 시험을 보면서 매번 자신의 학습량을 체크해가듯이, 음양오행 역시 책 한 권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대~충 훑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독, 다독이 필요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얼마나 소화시켰는지 파악하고 그 다음 진도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도 없이 ‘뭐 이거 말도 안되네’라고 지레짐작 하거나, 아님 ‘이건 읽어도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포기하는 것은 결국 에피타이저만 맛보고 자기 입맛에 안맞다고 실망해서 본 코스 요리는 포기하는 셈이다. 따라서, 동양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글로 되었다고 해서 그냥 기존의 문법체계, 기존의 단어를 가지고 그대로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도 안 가고, 받아들이는 데 무리가 생기는 것이다.

주말에도 정석을 복습하는 학생들마냥 음양오행 공부도 꾸준히, 깊고 넓게, 정말 우주정복한다는 심정으로 하시라~

그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몸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몸을 안다는 것은 단지 어디가 아플 때 어떤 약을 먹으면 좋다, 어떤 운동법이 좋다라는 차원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몸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의술(醫術)의 차원이 아니다. 의학(醫學)은 의술과 다르다는 말이다. 물론 의학과 의술, 즉 이론과 실천이 분리할 수 없지만, 우리가 몸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전문의가 돼서 모든 병을 치료하는 닥터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의(醫)학, 몸을 본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몸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존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철학’이자, 어떻 게 몸을 바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윤리학’이자, 어떤 실천을 통해 나와의 관계맺음을 바꿔나갈 것인가라는 ‘사회학’이자, 생물학, 화학, 물리학을 포함하는 ‘과학’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과학문으로서의 단순한 한 분야가 아니라, 더더욱 의대생이나 한의대생만이 배우는 나와 상관없는 학문이 아니라, 몸을 통해 사유와 실천을 하는 종합학문이다.

그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식론(epistemology), 존재론(ontology), 실천론(praxeoloy)의 차원에서 나눠보면, 좀 있어 보일려고 인식론, 존재론, 실천론으로 나눈거지 그리 어려운건 아니다. 물론 이 세 가지가 따로국밥처럼 따로 따로 나눠져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 세가지 차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인식론으로 보자면 몸을 살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식론이란 내가 어떻게 사물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사물과 진리를 외부에 설정해 놓은 소위 ‘주류’ 서양철학의 한계는 자명하다. 그런 점에서 동양에서 학문(學問)이라고 할 때 묻고, 배우는 것은 서양식의 어떤 보편적 진리와 법칙을 발견하여 아는 것(know)과는 다르다. 서양에서의 앎이라는 것이 외부의 대상을 얼마나 객관화하여 잘게 쪼개서 명징한 주체(subject)가 이성(reason, ratio)을 통해 합리(reason+ability)라는 이름으로 파악하는 과정이라면, 동양적 사유, 특히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러한 외부에 앎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나의 삶 속에서 무수히 변화해 가는, 몸의 변화과정들에 대한 탐구이자, 나의 몸과 외부와의 관계를 봄으로서, 도를 찾아나가고자 하는 과정이다.

중세 별자리와 연관시켜 몸을 사유하는 방식(왼쪽)과 해부학이 발전하면서 해부학적 시선으로 몸을 사유하는 방식(오른쪽) 몸을 사유하는 방식은 시간, 공간이라는 장소성(topos)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존재론으로 보자면 몸을 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존재(Being)가 아닌 생성(Becoming)을 본다는 것이다. 즉, 절대불변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작업이 아니라 어떻게 기의 흐름, 기의 모임과 흩어짐이 세계를 만들어 내는 지를 살펴본다. 이는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보다 그것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서구 철학은 데카르트가 잘 보여주듯이, 실체(substance)란 무엇인가, 자기원인이란 무엇인가에 집착했다. 데카르트가 세상을 정신과 물질로 나누고 사유(thought)와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을 부여한 순간, 물질은 이미 고립된 시공간에 갇힌 불변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떤 생성의 가능성이 아닌, 원자론적으로 고립된 실체만이 남는다. 따라서 몸을 본다는 것은 이러한 차원과는 다른 몸과 외부와의 관계된 전체속에서 어떻게 그것이 생성의 과정 속에 있는지, 외부와의 어떤 접속들이 그러한 생성을 가능케 하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실천론 차원을 보자. 그래, 지금까지 이야기 다 뭐 대충 이해도 가고 공감도 얼추 간다고 치자. 그럼 그냥 자기 한 몸 잘 먹고 잘 살자는 이야기냐? 세상이 이렇게 엄혹한데. 응, 국회의원도 서슴없이 아나운서 될려면 몽땅 다 바쳐야 된다고 말하는 판국에, 영포라인 아니면 어느 누가 비밀 사찰을 받을지도 모르는 시대로 빠꾸해 버린 이 세상에, 세상에 대한 관심 다 끊고 자기 한 몸 잘 먹고 잘 살면 끝이냐?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고, 삼성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된 세상에, 응? 전쟁으로 죽어나가는 이들, 가난 때문에 자본으로부터 소외되는 이들, 마이너리티라는 이름으로 억압받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응? 응? 이라고 물을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몸을 본다는 것은 단지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을 통해 바꿔나갈지의 문제다.

하지만 몸을 본다는 것이 실천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앎’의 문제는 ‘함’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아니,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 급진적일 수 있고, 근원적일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 단순히 자기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는, 그럼으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아무리 세상이 바뀌기를 희망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습이 바뀌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세상을 기만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만큼 그 안에는 자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망상의 공간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변절자라고 부르는 이들 역시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좌절해 버리는 것들을 숱하게 봐오지 않았던가. 그렇기 때문에 몸을 본다는 것은 개별 몸뚱아리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자, 무엇이 자연스러운 관계들의 결합을 막고 있는지, 그 장벽을 어떻게 깨부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문제와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때 몸을 본다는 것은 그러한 관계들의 어긋남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리고 그것을 말로, 머리 속에서만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몸을 바꿈으로서 바꿔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 너무 간단하게, 소략하게 다루어 거친 논의가 된 감이 물론 없지 않다. 혹자는 ‘뭐 몸을 본다는게 뭐 그렇게 대단한거라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과대포장하고 그러시나’라고 딴지를 걸 이들도 있을거다. 하지만, 몸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몸뚱아리 그 자체만을 본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몸과 사회를, 우주를 보는 것이자, 나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화두를 집어드는 일이다. 푸코가 말하듯이 진리란 권력의 산물이다. 몸을 본다는 것은 기존의 지식-권력에 대한 새로운 파열음을 내는 작업이자, 또 다른 지식-권력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 주위에 어렵다고 집어던졌던 동양학에 관한 책들을 다시 한 번 꺼내드시라! 진득하니 잡고 읽다보면 차츰차츰 무언가 보이기 시작할테니. 물론 어렴풋이 보일테니 한 번에 안 보인다고 성내지는 마시고.^^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의 얼굴을, 신체를, 삶을 보시라. 그렇다고 지나가는 여자의 다리만 쳐다보라는 이야기는 아니니, 괜히 변태로 오해받지는 마시길. 그리고 자신의 얼굴과 신체와 삶을 관찰하시라. 그 속에 해답이 있을지어니. 믿습니까? 아멘!

암! 물론!!

담담1
  1. - 이 글은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손영기, <한의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참고로 쓰여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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