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역도부 아이들과 행복 쌓기

- 풍경지기 박혜숙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행복한 인문학』, 임철우 외 지음, 이매진

13년 동안 교단에 있으면서 과연 뭘 배우고 뭘 가르쳤나 하는 반성을 하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은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게 하는, 배움의 장을 이 책과의 인연으로 꿈꾸게 되었다.
역도부 아이들,
풍경 아이들,
울산중앙고 2학년 아이들과…….

2009년 6월 5일, 너의 교육실습 마지막 날
박혜숙

작년에 처음으로 교육실습생을 지도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 동안 가르쳤던 제자였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나는 그의 담임교사였다. 그는 국어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따뜻함, 유쾌함을 간직하는 그를 보면서 그와 만나 함께 배움의 장을 만들어갈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꿈대로 국어교육과로 진학했고 작년 내가 있는 학교로 교육 실습을 왔다. 그가 교육실습을 마치고 떠나던 날, 『행복한 인문학』(임철우 외 지음, 이매진)을 선물했는데 속표지에 위와 같이 적었다.

작년에 동료교사들과 함께 하는 독서모임에서 『희망의 인문학』(얼 쇼리스 지음, 이매진)과 『행복한 인문학』(임철우 외 지음, 이매진)을 읽고 공부했다. 『희망의 인문학』은 노숙자, 빈민, 죄수 등 최하층 빈민들에게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소개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성찰하고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인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행복한 인문학』은 얼 쇼리스가 제안한 클레멘트 코스를 우리 사회의 교도소 수용자, 자활근로자, 노숙인을 대상으로 실천한 사례를 담은 책이다. 성프란시스대학, 인권실천연대,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인문학 코스에 참여한 문학, 역사, 철학, 예술사, 글쓰기 과목의 강사진이 그들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리고 이런 인문학 교육의 가능성은 어떠한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작년, 나는 이 책을 읽은 후 새로운 시도를 했다. 오랫동안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해오고 있었다. 그 모임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책을 좋아해서 독서모임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모범생으로 통하는 아이들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아닌, 학교 현장에서 소외되어 있는 아이들과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읽은 직후 들었다. 그때 떠오른 아이들이 우리 학교 역도부 아이들이었다. 운동부 아이들은 학교 안에 있지만 학교 밖에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이 많지 않다. 수업에 참여하는 시간도 있지만 어쩌다 참여하게 되는 수업현장에서 그들은 이방인이다. 교사와 반 친구들의 시선이 낯설다. 그리고 교사와 반 친구들이 주고받는 언어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지 파악하기도 힘들다. 그저 오늘은 운동부 아이가 교실에 들어와서 빈 책상이 없어졌다는 존재감만 서로 느낄 뿐이다. 학교 신문을 나눠줄 때, 학교 축제 계획을 세울 때도 그들의 자리는 없다.

작년 봄방학 때였다. 학교 일을 하기 위해 늦게까지 남았다가 역도부를 맡고 계시는 체육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 학교가 자신의 모교였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보다 더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는 분이었다. 우연히 역도부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안타까움에 젖어있었다. 역도부 아이들은 대부분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 그리고 운동을 하다보면 만나는 친구들이 같은 운동을 하는 아이들로 한정되기 때문에 운동 이야기, 게임 이야기 외에는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없고 그로 인해 사회적 관계가 빈약해진다고 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후 그 선생님에게 “제가 한 달에 한 시간, 역도부 아이들과 공부를 하면 어떨까요?”라고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무척 고마워했다. 그렇게 해서 역도부 아이들과 수업을 시작했다. 첫 수업이 아직도 생각난다. 나는 국어 시간 수업자료인 시 모음 자료를 역도부 아이들과의 수업시간에 챙겨갔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는 시간은 역도부 아이들이 하루 훈련을 시작하기 전의 아침 시간이었다. 역도부 아이들은 보통 그 시간에 잠을 잔다고 했다. 역도부 담당 선생님의 명령을 받고 아침 수면 시간을 빼앗긴 채 내 앞에 억지로 앉아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암울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내 소개를 한 후 아이들에게 시 모음 자료를 나눠주었다. 시 모음 자료에는 쉬운 시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판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와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들 앞에 놓인 시 모음 자료는 폭력이었다. 아이들은 역시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간단히 답했고 어색한 분위기는 몇 단계 고조되었다. 이러던 차에 1교시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그때 나는 종소리가 무척 고마웠다.

첫 수업이 어땠는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기도 민망했다. 그렇게 역도부 아이들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 다음 수업 시간에는 읽기 자료 대신 집단 상담 활동지를 준비했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간단히 메모해서 이야기 나누는 활동이었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기 때문에 학교 수업 시간의 활동이 낯설어 보였다. 역시나 아이들은 이 활동 역시 부담스러워했다. 제자인 교생 선생님도 납치하듯이 데려가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해보려 애를 썼지만 남는 것은 교생 선생님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뿐이었다. 먼저 아이들에게 활동지를 작성할 시간을 주었다. 한참이 지나도 아이들의 활동지는 백지 상태였다. 시간을 더 준 다음 내가 먼저 발표를 했다. 내 발표가 끝나자 교생 선생님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발표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억지로 발표를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주 간단히 발표를 했다. 종이 울려 쫓기듯이 나오면서 과연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달에 한번 하는 수업이 두 시간 수업으로 부드럽게 이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상태는 예상보다 나빴다.

그 이후에는 수업 방식을 조금 달리했다. 평소에 아이들이 해보지 못했던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도서실 담당 선생님의 양해를 얻어 학교 도서실을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서실에서 책을 고르는 법, 책을 빌리는 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도서실에서 책을 만져보게 하고 마음이 가는 책 한 권을 가져와서 일부 대목을 베껴 써보게 했다. 어떤 아이는 축구 관련 책을 선택했고, 어떤 아이는 요리법에 관한 책을 선택했다. 물론 고민해서 책을 선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업이 잘 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아이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나는 여전히 ‘이상한 선생님’이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런 관계가 조금 부드러워지는 계기가 있었다.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아이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마음을 담아 과자를 사서 예쁘게 포장을 한 후 선물했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대회가 끝난 후 어느 날이었다. 2층 교무실로 올라가고 있는 나를 역도부 아이 둘이서 크게 불렀다. 반가운 표정으로 대회 잘 다녀왔는지 묻는 나에게 아이들이 후드티 한 장을 내밀었다. 환하게 웃는 그들의 표정은 나에게 더 큰 선물이었다. 후드티에는 건장하고 귀여운 악동이 한 손으로 역기를 가볍게 들고 남은 한 손으로는 코를 파고 있는 모습이 귀엽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마 감독 선생님과 코치 선생님께서 준비하셔서 아이들 통해 전해주신 것 같았지만 내게는 아이들과 보냈던 시간을 선물로 받는 느낌이었다.

2학기가 되자 역도부 3학년 아이들과의 수업이 힘들어졌다. 3학년에게 ‘메달’은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 운동을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인지 판가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1학년, 2학년 아이들과 수업을 계속해 나갔다. 날씨가 추워질 때쯤에는 따뜻한 유자차를 준비해가서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수업시간에 소개해주면 반응이 좋았던 책 몇 권을 챙겨가서 책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후에 변화된 것은 역도부 아이들이 나에게 책을 빌려가서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1학년 아이에게는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을 빌려주었다. 이 책은 여자 친구와 어떻게 하면 같이 자보나 하는 고민을 하는 고등학생이 주인공인데 청소년들의 성의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재밌게 읽었다. 한참 동안 책을 돌려주지 않기에 아직 다 못 읽었냐고 그 아이에게 물었다. 그 아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수업시간에 책을 읽고 있으니 주변 친구들이 궁금해 해서 이야기를 해줬다. 그랬더니 서로 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반 친구들이 돌려가며 읽느라 아직 돌려드리지 못했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2학년 아이는 짧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글을 모은 책을 빌려갔다. 그리고 이 친구는 그 뒤에도 책을 몇 권 더 빌려가서 읽었다.

『행복한 인문학』이 계기가 되어 맺어진 역도부 아이들과의 인연은 올해 학교를 옮기면서 끝이 났다. 물론 인문학 수업을 통해 역도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게 하고 싶다는 바람과는 거리가 먼 수업이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아이들에게나, 나에게 낯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이 『행복한 인문학』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풍경지기 박혜숙

응답 3개

  1. 선미말하길

    글로 읽는 이야기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역도부 아이들에게는 오랫동안 작은 씨앗으로 남을 듯 합니다. 희망의 인문학! 이 책을 다시 펼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2. 이야기캐는광부말하길

    저도 이 책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인문학을 통해 자기성찰과 스스로를 치유할 수 힘을 키울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3. 고추장말하길

    좌충우돌하면서 한걸음씩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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