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이웃>, 친구이자 괴물인 이웃, 그를 내 몸같이 사랑하라

- 박정수(수유너머R)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 샌트너, 슬라보예 지젝, <이웃>(도처출판b)

주권의 정치신학과 가족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신분석학은 신학적이고 가족주의적이다. 정신분석학은 세상을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유지되는 가족 질서로 본다. 욕망의 원초적 금지자로서의 아버지, 욕망의 원형적 대상으로서의 어머니,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한 아들(남자)과 그것을 선망하는 딸(여자)로 구성된 외디푸스적 가족. 이 가족주의적 신학의 구도는 정치적으로 주권-사법적 질서로 구현된다. 아버지는 대지에 노모스(율법)를 선포하는 주권자이며, 어머니는 법에 포획된 대지의 삶이고, 아들(남자)은 법 바깥으로의 추방을 두려워하면서 법 안에 포획된 신민이며, 딸(여자)은 법의 경계에 있기에 법 안쪽을 선망하는 자유민이다.

정신분석학은 언제나 아버지(신)에 대한 사랑의 난점을 말해왔다. 유대교의 신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율법에 복종하기만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법과 배리된 명령을 내리면서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뭘까?” 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아버지는 이런 이중구속에 사로잡혀 법에 복종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을 즐기는 초자아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신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그에게 진 부채(죄)를 영원히 갚을 수 없게 만들며, 아버지 자신의 부재(“대타자는 없다”)를 아들의 책임으로 떠넘긴다.

그런 아버지(신)를 사랑하라는 계율은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이다. 역설적이게도, 유대-기독교에서는 그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감당할 때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 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것이 역사의 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율법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율법이 중지되는 지점에서 들려오는 신의 초자아적 명령에 응답함으로써 작동한다. 역사의 주체는 역사의 객관적 법칙에 따르는 법적주체가 아니라 법 이면에서 반복되는 신적 충동에 응답하는 남겨진 신의 자식들이다.

이웃의 정치신학과 사회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유대-기독교로부터 아버지(신)에 대한 사랑만을 물려받은 건 아니다. <이웃>(도서출판b)은 정신분석이 유대-기독교의 두 계율 중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도 말해왔음을 부각시킨다. 프로이트는 <문명속의 불만>에서 유대-기독교의 정언 명령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인지 말했다. 만일 이웃이 나와 비슷하여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또는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완벽해서 내가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이상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나 나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웃, 그것은 근본적으로 죽음(공격)충동의 대상이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유대-기독교는 바로 그런 이웃,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나에게 죽음충동만을 불러일으키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란 바로 그런 죽음충동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가족 바깥의 ‘사회’에 대해 말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이 ‘이웃집 사람’, ‘옆집 사람’, 혹은 ‘동료인류’(Nebenmensch)이다. 가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신경증자에게는 이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질서를 수립하는 ‘아버지의 이름’이 중지된 분열-편집증자에게는 항상 이웃의 존재가 부각된다. 그들의 망상과 환각 속에서 이웃은 항상 나에 대해 수군거리고 나를 음해하며 박해할 음모를 꾸미는 타자다. 이웃은 편집증 특유의 ‘비밀’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내부로부터 가족을 교란시킬 위험이 있는 섬뜩한 비밀이다. 정신분석학이 전하는 사회의 비밀은 바로 이 이웃관계이다. 나와 비슷해서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이웃이 아니라 형제다. 나보다 훨씬 더 완벽해서 내가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이상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이웃이 아니라 아버지(혹은 어머니)일 뿐이다. 이웃이란 가족질서 바깥, 사회적 관계 속의 타인, 인해할 수 없고 동일시할 수 없는, 칸트적 의미의 ‘사물’을 내포한 타자이다. 이웃은 ‘물 자체’를 내포한 타자이기에 윤리학은 바로 이 이웃 간의 사회적 관계 원리이다.

이 책에서 가장 볼만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의 정치신학을 위하여」에 따르면, 아버지(신)에 대한 사랑이 주권자의 정치신학을 낳듯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웃의 정치신학을 낳는다. 정치신학이란 노모스(율법)의 정치질서에 신학적 ‘외부’를 끌어들인 개념이다. 주권자의 정치신학은 법에 대한 주권자의 외부적(예외적, 초월적) 지위로 구성된다. 주권자는 법의 제정자이지만 자신은 법질서의 초월적 외부에 위치하며 법 기능의 일시적 중지(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권력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라캉이 <세미나 XX>에서 도식화한 아버지의 초월적 예외에 의해 수립되는 남성의 보편적 거세 질서에 대응한다.

이런 남성적 질서에 비대칭적으로 여성적 질서는 예외의 배제, 즉 예외 없음의 보편적 거세 질서로 정의된다. 남성의 세계가 주권자로 표상되는 단일한 척도 하에 구성된 보편성이라면 여성의 세계는 그런 예외의 예외(주권의 정지), 즉 단일한 척도가 없는 곳에서 형성된 공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의 정치신학이란 이렇게 주권의 기능이 정지된 곳에서 서로가 서로의 바깥에 있는 보편적 단독자들 간의 공통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공통성은 그것을 입증하는 사건에 의해만 정의될 뿐 미리 주어진 척도에 의해 표상되는 동일성이 아니다. 이렇게 “그것들을 결합시키기 위해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그 집합 외부의 어떤 위치에서도 지각될 수조차 없는 공동체들, 즉 이웃사람들neighborhoods”, “그것은 시민권이나 민족성 혹은 다른 어떤 합법적이거나 토착적인 지위로 결정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비-전체의 논리는 주권자의 정치신학의 개념적 폐쇄를 결정하는 대표, 평등, 전체성의 원리와 거리가 먼 사회적 포괄과 연대의 가능성들의 무한 집합을 제안한다.”

죽은 이웃의 사랑을 넘어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먼 나라의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동정, 취향이 같은 옆집 사람과의 화목, 얘기가 통하는 페미니스트와의 소통, 동정을 베풀만한 장애인과의 협상, 우리 문화와 법질서를 존중하는 이주자들에 대한 관용, 그것은 형제애이지 진정한 이웃사랑이 아니다. 지젝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그것은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 없는 크림, 니코친 없는 담배를 즐기듯이 이웃에 내재한 독한 ‘이물성’을 제거한, ‘죽은 이웃’에 대한 나르시즘적 애정에 불과하다. 진정한 이웃사랑이란 내 몸으로 침입한 괴물처럼 ‘나’를 구성하는 세계의 파열을 동반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세계, ‘나’와 다른 보편성의 담지자와 공동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런 몸 섞음 속에서 나의 개체성과 동일성, 그것의 척도가 와해되어 새로운 공동 신체의 척도를 발명해야 하는 절대적 예외상태의 체험이다. 물론 그것은 나만의 존재 변이가 아니라 이웃한 그의 존재 변이를 동반하는 체험이며, 지젝이 강조한 것처럼 율법 이면의 신적 충동에 응답함으로써 창조되는 새로운 역사의 정치-윤리적 실천이다.

응답 5개

  1. 나무말하길

    요즘 아이가 ‘타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외계생명체는 엄청난 폭력으로 내 안에 있는데, 난 아파 죽겠구요. 그렇다고 빼버릴 수도 없구요. 아이가 사람이 되어 가기까지 이 분열적으로 수시로 변하는 생명체랑 공통의 신체 비슷한 걸 발명하며 하루하루 살겠지요.

    그런데 그 과정이, 엄마인 나의 엄청난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찝찝함이 있어요. 이 폭력에 무차별 노출된 나는 무엇인지. 아흥. 어려워요.

    • 말하길

      옆에서 지켜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쿨하게 어린이집에 맡겨 보세요. 그러면 아이도 사회적 관계를 경험하게 되고 엄마도 아이의 폭력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지요. 용기를 내세요.

  2. 민지말하길

    글 잘 읽었어요.^^
    일단 글의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딴죽’입니다. :)

    마지막 문단에 ‘죽은 이웃사랑’의 예시로 “얘기가 통하는 페미니스트와의 소통”을 거론하신 것이 저의 발목을 붙잡는군요;;;
    어떤 맥락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작은 사례가 많은 것을 의미할 때가 있어서요.:)

    선생님은 어쩌면 그간 페미니스트와의 소통이 대의적 차원에서 동의하는 그냥 순조롭고 편안한 경험만 있으셨거나, 서로의 세계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의사소통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경우, 페미니스트들과의 소통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자기의 한계를 보는 과정이기도 했고, ‘공동체(共同體)’라는 것이 실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 몸’인지에 대한 깨달음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그 과정의 존재 변이는 이루말할 것도 없고요.
    뭐, 상대적인 경험의 차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 지젝을 잘 모르니, 리플은 일단 요정도로만 하겠습니다. ^^
    그런데 정말,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의 어려움이란!… 걍 그말을 들으면 도망가고 싶어요ㅠ

    • 매이엄마말하길

      그것은 아마도…박정수님이 ‘얘기가 통하는 페미니스트’ 중의 한명이라는 방증이겠지요.

      그런데 민지님의 ‘페미니스트들과의 소통이 끔찍할 정도로 자기 한계를 보는 과정이었다’는 말씀이 어떤 뜻인지는….언뜻 와닿지 않는군요.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몹시 궁금합니다.

    • 민지말하길

      매이엄마/

      음…………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
      (더구나 이런 공개적인 웹상에서….;;;;;)

      ‘페미니스트들과의 소통’ 이란 실은
      ‘(그당시) 페미니스트였던 A, B, C들과의 소통’ 이라고 하는 것이 제게는 더 맘편한 표현이겠네요. 아무래도 전자의 표현은
      좀 뭐랄까 일반화된 것 같아서 조심스럽달까요.
      구체적인 누군가의 얼굴이 흐려지고 일반명사로 타자화된 것 같달까요. 뭐, 아무튼…. 흠흠.

      그냥 링크 하나를 올릴게요. 살짝 미화;;된 감도 없지 않고,
      또 좀 먼 옛날에 쓴 것이라 유통기간이 지난 얘기일 수도 있겠는데,
      말씀하신 궁금함을 조금 해소시켜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http://www.unninet.net/channel/ch_special_vw.asp?ca1=1&ca2=370&ct_Idx=2269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이 사이트를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는데…. 채널넷에 좋은 글들이 많으니 한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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