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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

- 서동욱(수유너머R)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고 있자면 이게 정말 4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란 말인가 하고 뜨악하게 된다. 끊임없이 난무하는 폭력과 지나치리만큼 자세한 강간장면 등 각종 폭력이 종합세트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폭력의 강도만을 놓고 보면 더 자극적일수록 상품가치를 높이는 오늘날에는 더 한 것도 왜 없겠느냐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과 사회를 유지시키는 최소한의 기초에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갈긴다는 점에서 보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진정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 영화를 보고나면 어지간히 무던한 사람도 한 동안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정의 동요를 자리에 앉아 해소할 시간이 필요해진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폭력 혹은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폭력이랄까.

매일같이 동료들과 온갖 비행을 일삼는 알렉스. 그는 어떠한 대상의 구별도 없이 순수한 폭력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무차별적 새디스트다. 어느 날 알렉스는 어김없이 집을 털러 갔다가 살인을 하게 되고 그 죄로 14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가게 된다. 감옥은 엄격한 규율과 감시, 명령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알렉스는 더 이상 폭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자유가 상실됐음을 느끼며 새로운 교화 기술 ‘루도비커법’을 통해 감옥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루도비커법은 최신 교화 기술로서 2주 만에 범죄자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기술이었다. 알렉스는 2주만 참으면 다시 자유로운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이 치료에 응한다. 그러나 2주 동안의 경험은 알렉스에게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보다 더 한 고통을 선사하는데, 이 기술은 눈꺼풀을 고정시켜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든 다음 온갖 폭력적 행위가 난무하는 영화를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폭력 행위가 점차 고통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루도비커법 치료 이후, 알렉스에게 폭력 행위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전환되어 폭력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게 된다. 알렉스의 ‘나쁜 본성’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메스꺼운 느낌이 들다니. 전에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보는 게 즐거웠는데.” “폭력은 끔찍한 거야. 네 몸은 지금 그걸 배우고 있는거지.”

우리는 알렉스 같은 범죄자와 그것을 치료해주는 국가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끔찍한 범죄자가 착한 사람으로 변신했으니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앞으로 알렉스처럼 범죄자를 하나씩 하나씩 바꿔 나가면 밤길이 걱정되지 않고, 아이들이 혼자 돌아다녀도 걱정 없는 사회가 될까? 정말 평화로운 세상이 루도비커법이나 또는 우리식대로 하자면 화학적 거세 같은 최신 과학 기술에 의해서 곧 찾아올까? 우리는 무턱대고 못된 범죄자의 본성을 바꿔놓기 전에 그것을 처벌하는 국가권력의 본성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런 반성 없이, 제 손으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뽑았던 저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지 모른다. ‘히틀러’가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히틀러적인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언제든 다시금 작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알렉스는 파괴에서 기쁨을 느끼는, 순수하고 무자비하게 분출되는 충동의 상징이다. 자기 긍정과 자기 파괴가 구분할 수 없이 뒤섞여 있는 그는 자아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자아의 방기가 그의 자아의 핵심이다. 요컨대 그는 ‘주체성’ 이전의 존재다. 순수한 광기와 쾌락의 추구로 충만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는 법 너머의 존재인데, 그러한 존재는 도덕을 모르는 무구함 때문에 법을 위반하는 힘도 가지며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언제든 새로운 법을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다(알렉스라는 이름이 법의 제정자를 뜻하는 ‘알렉산더’에서 온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가진 속성과도 공유되는 지점이다. 국가는 법의 제정자로서 법을 선포하지만 언제든 법을 초월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법을 제정하는 자와 법을 위반하는 자가 근저에서는 역설적이게도 기묘한 공생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 혹은 범법자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폭력의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알렉스의 성적 충동에는 대상의 제한이 없다. 도덕적 제한도 없고 지위의 고하도 없다. 그야말로 무차별적이다. 그것은 폭력과 절대적 쾌락 앞에 모든 구분들을 무화시킨다. 국가가 개인을 다루는 데서도 이와 유사한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고통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주사를 맞히거나 폭력적 행위를 고통 자체로 치환시키는 것, 신체를 잘 관리되고 통제하기 쉬운 형태로 만들려는 욕망, “넌 아직 치료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무한히 계속되는 치료와 교화의 욕망, 거기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다. 치료하는 자들의 정의는 파괴 행위만큼이나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이다. 야만을 처치한다는 명목 하에 야만을 휘두를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방법을 과학에서 찾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마치 공장에서 빈틈없이 잘 들어맞는 부품을 찍어내듯이 개인의 신체가 재단되는 이러한 현상은 신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어 정신의학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형태의 치료수단으로 출현했던 것과 닮아있다.

이제 범죄자는 일종의 치료의 대상이다. 어디가 아프면 만능의 치료자인 병원을 찾는 것처럼 동일한 선상에서 우리는 국가를 찾고 있다. 오늘날 화학적 거세는 합리성이 극단에 이른 증상이다. 극단에 이른 합리성은 쉽게 광기와 야만으로 돌변한다. 자신이 교화하려던 야만성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 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벤야민이 이제껏 야만성에 기초하지 않은 문명은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신체를 잘 관리하고 통제하며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문명을 세우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거기서 우리가 휘두르는 야만은 보지도 못한 채. 삶을 결점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도착적인 집착은 오로지 이성과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국가주의, 실용주의가 개인 심리의 밑바닥까지 얼마나 자리 잡기 쉬운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자연을 통제하려는 충동, 인간을 통제하려는 충동 자체가 광적인 통제 불능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이 자유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속을 욕망하는가. 파시즘적 권력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파시즘적 대중들이 먼저 형성되었어야만 했다는 라이히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들어맞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명령과 규율에 잘 적응된 신체는 자유를 공포로 여긴다.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 몸에 잘 각인되어버린 신체, 그래서 예속적인 시스템에 스스로를 맞추는 것이 편하다는 신체. 기실 국가를 수행하는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예속의 시스템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본능적’이라거나 ‘본성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사실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한다. 항상 제도, 구조, 시스템과 결부될 때만 그것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무언가를 억압하고 치료하는 방식으로만 자신을 구성할 수 있는 기관 안에서만 그것은 치료의 대상이고 바꿔버려야 할 무엇이 된다. 누군가 태엽을 감아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시계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 서동욱(수유너머R)

응답 5개

  1. 단단말하길

    살이 빠지는 이유가 있었군요~^^
    몸의 기운을 모아 글 솜씨가 일취월장 하는가봅니다.^^

  2. 담담말하길

    동욱님 글빨이 장난 아니네요^^ “누군가 태엽을 감아줘야만 움직일 수 있는 시계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제목이 왜 시계태엽오렌지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네요..잘 읽었슴다..

    • 글쓴이말하길

      담담 선생님…^^; 제가 요즘 살이 쭉쭉 빠지는데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3. 맘마미맘말하길

    국가의 권력과 폭력성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시도가 적절했습니다. 언론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신적 거세를 당하는 나를어렵지만 중앙에 가까스로 설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획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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