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과연 우리는 루쉰의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가?

- 김대경

지금 제주도에 있다. 남편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방학이 되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 제주로 내려왔다. 공항에서 받은 제주도 지도와 뉴스를 보면 누구나 제주에서 가 볼 만한 곳이 정말 많고 여름을 지내기 딱 좋은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열흘 남짓 생활하는 동안 우리 가족도 제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본성(?)은 속이지 못하나 보다. 내가 이곳에서 꼭 빠뜨리지 않고 가보고 싶은 곳은 역시 도서관이었다. 자동차로 가까운 곳에 한라도서관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남편에게 출근하는 길에 우리를 그 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엄마와 달리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도 한라도서관 건물 앞에 내리자마자 탄성을 올리며 좋아라 뛰어 다닌다. 서울과는 딴판이다. 일단 부지가 매우 넓고 깨끗하였고,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밭이 조화를 이룬 데다, 나무 통로 아래로 토끼가 뛰어다니고, 연꽃과 시원한 나무그늘이 반겨주니, 일단 서울에서 보던 어둡고 딱딱한 분위기의 도서관과는 천지 차이다. 게다가 이곳은 자동차가 아니면 다니기 힘든 곳인 데다(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정도 오니까) 열람실이 따로 없어서, 서울의 공공도서관에서 숱하게 보았던 수험생이나 입시생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서인지 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색다른 느낌이 좋은 징조이길 바라면서 아이들과 어린이도서실로 들어갔다.

나는 몇 년 전에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의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딱딱하고 네모난 건물이 아닌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건물 형태라든지, 화사한 햇볕 속에 눈부시게 자리하고 있는 서가의 모습이나 책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사서의 모습에서 많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부러웠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처럼 어렵고 두꺼운 수험서나 문제집을 펼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창가의 소파나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런데 이 곳 한라도서관에 와서 외관상의 모습이 유럽 어느 공공도서관 못지않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유럽에서 보았던 그 부러운 장면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어린이도서실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다가 무심코 눈에 들어온 최근에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을 전시해 놓은 게시물을 보고 나는 내 기대가 곧 물거품이 되리라 짐작하고야 말았다. 게시물에 나와 있는 십여 권의 책 중에 대부분이 만화책이었기 때문이다(결코 만화책을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만화책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어린이 도서실에서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자그마한 서가에 아기자기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한편 컴퓨터 검색대 앞에 어떤 여자 아이가 책을 찾고 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학교에서 나누어준 권장도서목록을 보면서 책을 찾고 있었다. 그 목록에는 십진분류법에 따라 읽어야 할 책이 분류되어 있었는데, 1학년 학생이 읽을 책으로, A4 종이에 세 장이나 되었다. 나도 학교에서 권장도서목록을 자주 만들어 나누어 주곤 했지만, 자칫하다간 이런 목록이 자유로운 독서를 방해하고 나아가 스스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목록을 나누어 주되, 목록을 맹신하지 말고 스스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도록 잘 설명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가 곁으로 가니 그곳에서 책을 고르거나 살피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마들이었다. 아이들이 읽을 책을 골라 주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자녀의 독서 지도를 위해 노력하는 엄마들의 마음을 곡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칫하면 강제적인 독서가 오히려 아이들의 책에 대한 호기심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웠다. 어쨌든 정작 도서관에서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물론 독서에 정해진 정도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표정이 그닥 밝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이처럼 의무감이나 시험의 수단으로서 책을 대하고, 꽉 짜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만화책만을 찾는다면, 과연 미래의 사회는 어떻게 될까? 책이란 단지 학습의 도구이거나 심심풀이를 위한 도구로만 인식된다면, 그리고 책이 주는 무한한 힘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성찰의 힘을 망각하고 산다면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공동체의 삶 역시 힘겨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결국 사람의 글이고, 그 속에 다양한 삶과 사회에 대한 해석과 노력을 담고 있기에 책을 통해 현실을 통찰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는 지식만으로는 그것을 다 채우기에는 아마 역부족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가야 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한라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루쉰의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책이었다. 오래 전 대학 시절에 나와 함께 자취를 했던 친구가 우연히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 그 친구는 그때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고 이 책을 동아리에서 독서 토론을 하기 위해 빌려왔다고 했었다. 그 때는 단지 <아큐 정전>의 작가로만 생각했던 루쉰의 책이 이제 와서 돌연 읽고 싶었던 것은 지난번에 읽은 이계삼 선생님의 책에서 이 책이 언급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역시 이계삼 선생님처럼 루쉰이 일본에서 유학 시절에 만났던 해부학 교수의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국가와 시대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본 듯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루쉰이라는 한 지식인의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지독한 사랑 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진심으로 중국인들을 증오했고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특히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는 어느 어리석은 노비의 이야기였다. 한 어리석은 노비가 총명하다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자, 그 사람은 그저 말로만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다. 여전히 신세한탄만 하던 노비는 어리석다는 사람을 만나 집에 창문 하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토로하자 그 사람은 바로 노비에게 왜 주인더러 창문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당장 뛰어가 흙담을 허물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노비는 깜짝 놀라 주인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치고 결국 그 어리석다는 사람은 쫓겨났다. 노비는 이 일로 주인에게 칭찬을 받자 총명한 사람에게 정말 좋은 일이 생겼다며 자랑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누가 총명한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루쉰이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의 삶 역시 이런 노비의 입장과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자신의 젊은 제자들이 시위에 나갔다가 끔찍하게 죽음을 당한 사실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고,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에서는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다’라는 영어 속담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물에 빠진 개가 사람을 무는 개라면 땅에 있든 물속에 있든 모조리 때려야 할 부류라고 하면서 개의 품종까지 일컬으면서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얼마나 당대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 개탄해 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결국 그는 과거 중국의 현실을 아파했던 지식인이긴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출판된 그의 책을 통해서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자각과 통찰을 던져주고 있다. 문제는 루쉰의 이러한 비분강개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는 이 책이 누군가가 한번도 읽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것은 루쉰의 고민이 이 시대에 더 이상 필요없어서일까, 아니면 그의 목소리에 고의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책에서 읽은 몇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기어오를 수 있는 기회가 적을수록 부딪치는 사람들은 늘어간다. 진작 위에 올라간 사람들은 날마다 그 사람들이 부딪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사람들에게 밑천을 조금만 들여도 명분과 돈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신선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래서 잘 부딪칠 수 있는 기회가 기어오를 수 있는 기회보다 훨씬 적지만 다들 시도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기다가 부딪치고, 부딪치지 못하면 다시 기고…… 무릎이 다 닳도록,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기어오르기와 부딪치기’ 중에서)

꼴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어떤 일에서든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그렇게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나는 운동회를 보러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우승자는 당연히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뒤떨어졌으되 기어이 결승점까지 달려가는 주자와 그런 주자를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보는 관객, 그들이야말로 중국 미래의 대들보이리라.

(‘선두와 꼴찌’ 중에서)

아주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북부의 몇몇 성에는 강둑이 사람이 사는 집의 지붕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물론 둑이 터질까봐 흙을 조금 쌓아올렸다. 그런데 쌓아올릴수록 수위가 점점 높아져 한번 둑이 터지면 피해가 더욱 막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둑을 긴급 수리한다느니 하면서 둑을 지킨다느니, 둑이 터지지 않게 엄중 감시한다느니, 일이 더 많아져 다들 고생하게 되었다. 애초에 강물이 처음 범람했을 때, 둑을 쌓아올리지 말고 강바닥을 내려 팠다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인들이 사서 고생하는 근본 원인은, 받들어 올리는 데 있다. 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게 하는 것은 내려 파는 것이다. 사실 어느 쪽이나 드는 힘은 비슷하다. 그런데도 오랜 타성에 젖은 사람은 역시 받들어 올리는 쪽이 힘이 덜 든다고 생각한다.

(‘받들어 올리기와 내려 파기’ 중에서)

전사가 죽었을 때, 파리들이 맨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의 결점과 상처이다. 그들은 그것을 빨며 웽웽거리며 날아다니고, 자신들이 죽은 전사보다 더 영웅인 것처럼 우쭐댄다. 전사는 이미 죽었기에 파리를 쫓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리들은 더욱 웽웽거리고, 그 웽웽거림을 영원불멸의 소리라고 여긴다. 그들이 전사보다 훨씬 완전하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 아무도 그런 파리의 결점과 상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점이 있더라도 전사는 결국 전사이며,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파리는 결국 파리다. 가라, 파리 떼들아! 아무리 날개가 있어도, 아무리 웽웽거려도 너희들은 결코 전사를 초월할 수 없다! 이 벌레들아!

(‘전사와 파리’ 중에서)

지식 과잉이 왜 공항을 일으키는가? 중국은 아직도 8,90퍼센트의 사람들이 문맹이다. 그러나 지식 과잉은 이미 객관적 현실이기에 이로 인해 공항이 초래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중국의 객관적 현실이다. 지식이 지나치게 많으면 마음이 쉽게 동요하거나 심약해지기 마련이다. 마음이 동요하면 이것저것 허튼 생각을 하기 쉬우며, 심약해지면 악착같은 면이 없어진다. 그 결과 자신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남의 안정도 방해한다. 이리하여 재난이 초래된다. 그래서 지식을 솎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의 과잉’ 중에서)

쇼펜하우어 선생의 말이다.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그러나 장미 없는 가시는 많다.”
<중략>
‘꽃 없는 장미’(이 글의 제목) 따위나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설사 쓰는 것이 대부분 가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간 평화로운 마음을 필요로 한다. 지금, 베이징 시내에서 대살육이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이런 무료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수많은 청년들이 총칼 앞에 쓰러져가고 있다. 아아, 사람과 사람의 영혼은 이리도 통하지 않는다 말인가.

(‘꽃 없는 장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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