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사쿠라이 다이조와 텐트 연극

- 쑨거

사쿠라이 다이조(桜井大造)는 일본과 대만, 중국, 한국 등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일본의 유명한 연극인이다. 특히 텐트를 치고 거기서 연극을 하는 그의 ‘텐트 연극’은 일본과 대만에서 아주 유명하다. 1973년부터 1980년까지 ‘곡마관’(曲馬館)으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텐트 연극을 했다. 해산 후에는 ‘바람의 여단(風の旅團)’을 창단해 10년간 전국 공연을 다녔고, 1994년 다시 ‘야전의 달(野戰の月)’을 꾸렸다. 1999년에 대만에서 「EXODUS出核害記」를 공연하면서 이후 일본과 대만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극단 이름을 ‘야전의 달=해필자(野戰の月=海筆子)’로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몇 해 전의 일이다. 타이페이에 들렀을 때 친구의 안내로 「차사극단差事劇團」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일본어를 알아듣는다고 친구가 소개하자 극단의 책임자는 “당신은 사쿠라이 다이조씨를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어왔다. 아무래도 그에게 사쿠라이 다이조는 일본 이해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인 모양이었다.나는 그때 사쿠라이와 텐트 연극의 존재를 처음으로 들었다. 내가 “모른다”라고 답하자 그 타이완의 예술가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사쿠라이 그리고 그와 고락을 함께 하는 「야전지월해필자」, 「타이완해필자」라는 극단의 멤버와 만나게 되었다.
 
사쿠라이 다이조는 현재 「야전지월해필자」와 「타이완해필자」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70년대는 「곡마관」, 80년대는 「바람의 여단」을 창단해 순회공연을 벌여왔다. 지금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의 눈은 빛난다. 그는 일본의 시골에서 텐트를 치고 연극을 해왔다. 그 중에서도 어느 농민이 소가 도망쳤다고 소리치며 텐트로 뛰어 들어와 연극을 중단시켰던 일을 그는 잊지 못한다. 그렇게 긴박하게 외쳐대자 관중들은 눈 깜짝할 새에 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는 이것이 예술과 민중생활의 진정한 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텐트 연극은 60년대 말 ‘정치의 계절’의 산물이었다. 사쿠라이라는 와세다 대학의 졸업생은 학생운동의 여파로 텐트에 몸을 던졌다. 텐트 연극과 사회생활은 직접 연결되지만 그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놓여 있다. 그것은 텐트 연극의 특징에서 비롯된다. 텐트 연극은 정치의 계절에 피어났지만, 그 자체는 정치행위가 아니며 예술의 꽃이기 때문이다.
 
고도 성장기와 버블 붕괴기를 거치며 일본사회에서는 산야의 ‘당하면 되갚는다’는 투쟁이 잊혀지고 어느덧 ‘정치의 계절’도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전지월해필자」는 살아남았다. 사상성과 감수성을 결여한 대중문화에 맞서며 텐트 연극은 끈질긴 생명력을 간직해온 것이다. 사쿠라이의 연극은 ‘자주 연습’으로 시작된다. ‘자주 연습’이란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가 자기 감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연출자는 그 표현을 포착하여 정착시킨다. 사쿠라이는 다양한 표현을 근거로 희곡을 작성한다. 그리고 희곡에는 다시 배우의 연기가 입혀져 생명력에 더해진다. 사쿠라이 부부는 스스로 주역으로 나서며, 그들의 연기는 텐트 연극의 풍격을 좌우한다. 그리고 그들을 포함하여 극단의 성원들은 모두 전업배우가 아니다. 요리사에서 대학의 교원까지 다양한 직종을 가진 보통 시민들이다.

사쿠라이의 텐트 연극은 매년 상연목록을 갱신하고 있다. 이미 해본 연기는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다시 하지 않으려고 매해 새로운 연극을 만들고, 연기하고, ‘버린다’. 두 번 다시 연기하지 않으려고 힘껏 연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사치스런 방식일지도 모른다. 사쿠라이와 동료들의 텐트는 일본에 머물지 않고 타이완으로 진출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사쿠라이는 타이완인 배우의 단체를 창설해 타이완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거기서 「타이완해필자」라는 또 하나의 극단이 탄생했다. 거기에도 전업 배우는 없다. 개중에는 운동적 지식인도 관여하고 있다. 사쿠라이 부부는 「타이완해필자」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본어나 일본식 사투리의 타이완 표준어는 타이완인 배우와 함께 기묘한 편성효과를 만들어낸다.

이제껏 「야전지월해필자」와 「타이완해필자」는 타이완, 일본, 한국에서 순회공연을 해왔지만, 나는 기회가 어긋나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간신히 그 기회를 잡은 것은 지난 가을 베이징에서였다. 텐트 연극은 현재의 중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예술양식일 것이다. 중국사회 저변에서 존재하는 민중의 문화활동은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대중문화에 맞서며 사회생활과 긴밀하게 얽혀있지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좀처럼 예술로서 ‘자립’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인텔리들의 자가소비용 ‘사상극’이 있다. 보통 소극장에서 전위적으로 표출되는데, 지나치게 관념적인 데다가 형식도 궁핍하여 민중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사쿠라이와 동료들의 연극은 어느 쪽과도 다르다. 야전지월과 해필자는 상업사회에서 유행하는 연기를 거부하고 일본과 타이완의 전통적 민간 표현양식을 배우의 몸으로 되살려 예술의 연기에 민중성을 내재시킨다는 공부(工夫)를 거듭해왔다. 더구나 2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텐트의 한복판에는 몹시 정밀한 무대장치가 입체적으로 설치된다. 배우는 그 장치들을 활용하여 사방팔방에서 등장한다. 무대의 공간감각은 지극히 복잡하여 자유자재로 변환하며 관객들은 예기치 못한 시각의 충격을 경험한다. 희곡은 그러한 형식에 상응하여 깊숙하고도 날카롭게 현대의 생활에 잠복해있는 문제성을 거머쥔다.
 
베이징에서는 「변환 부스럼딱지 성」이 상연되었다. 이 극의 주제는 실로 철학적이다. ‘기아와 탐욕’은 현대인의 사회생활에서 두 가지 모티프로서 교착하며 인간을 멋대로 가지고 놀고 여러 분열을 낳는다. 뇌와 신체, 이성과 감각, 상처와 딱지, 생과 미생 … 이러한 여러 분열들은 고독한 다수와 살아있는 죽음이라는 선열한 이미지로 집약된다. 내가 이런 식으로 주제들을 추출하면 「변환 부스럼딱지 성」이 구미의 부조리극과 닮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연극을 본다면 구미의 전위극과는 전혀 무관한 이미지를 얻는다. 왜냐하면 철학적 사고가 동아시아 민중의 신체를 통해 분출될 때, 동아시아 특유의 ‘생’은 오히려 그 사고에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희곡의 대사와 절차는 모두 일본과 타이완의 흙, 저변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삶의 방식에서 연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쿠라이의 예술적 목적일 것이다. 그는 남이 자신의 연극을 민중극이라고 부르면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텐트 연극이 민중성을 부정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 형식의 ‘비실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쿠라이는 인텔리가 관념화한 ‘민중의 삶’을 관념에서 해방시키며, 텐트를 통해 육체화하는 동시에 그 육체의 형식을 의도적으로 창출하고 있다. 그러한 의도는 민중극의 통속성 그리고 인텔리 연극의 비민중성에 저항해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변환 부스럼딱지 성」은 네 차례에 걸쳐 베이징의 두 장소에서 상연되었다. 각각 일본어판과 타이완어판이 이틀 연속으로 상연되었다. 첫 회 공연은 차오양취(朝陽區) 문화관의 광장이었다. 문화관이 무상으로 제공한 소극장을 배경으로 거기에 텐트를 쳤다. 두 번째는 피춘(皮村)이라는 베이징 교외의 농민공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예술단체 소재지에서 이루어졌다. 두 차례의 공연은 대조적이었다. 전자의 관중 가운데는 중국의 연극 관계자와 연구자, 학생 등 ‘사상극’의 소비자가 많았다. 후자에는 농민공과 마을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사쿠라이의 연극은 보기 좋게 양측의 관객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첫째 공연의 관객들은 서양에서 전래된 연극이나 서양 민중극의 모티프 및 형식에 친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사쿠라이의 희곡은 난해했다. 텐트에 들어간 관객들은 배우의 연기를 쫓으며 대사를 음미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용은 딱딱하고 형식은 신선하여 지식인 관객들은 곤혹을 겪었다. 이렇게 어려운 연극을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나왔다. 그러나 둘째 공연의 관객들은 그 물음에 답하였다. 마을 사람은 배우의 대사가 일본어로 나오자 “중국어로 말해달라”며 솔직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가 무리임을 알자 일단 일본어인 채로 연극을 구경했다. 첫째 공연과 달리 피춘의 텐트 안은 떠들썩했다. 이따금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개도 뛰어들었다. 무대 안팎은 동시에 ‘생’을 연기하는 상태였다. 일본어로 된 공연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다. “당신들은 일본인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이유로 일본인을 가장한 것인가”라고.
 
「변환 부스럼딱지 성」은 결코 이해하기 쉬운 연극이 아니다. 희곡은 현실에 대한 기대를 모두 변형하여 처리하였고, 변형의 원칙은 구미의 전위극 원칙에 따르지 않았다. 사쿠라이는 시민층을 향해 근대적 생의 고뇌를 표현하려던 것이 아니라 시민권을 갖지 못한 저변 인간의 괴로운 생에 예술로서 형식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주민들은 텐트 연극의 형식으로부터 그것을 이해하였다. 그들에게 사쿠라이와 그의 연극은 ‘외국의 것’일 리 없었다. 신변의 일이라고 친근감을 느꼈을 때 나올 수 있는 최고의 평가는 역시 “당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다”였으리라. 한편, 베이징 텐트 소모임(베이징 공연을 뒷받침한 현지의 연구자 그룹)의 멤버는 대부분 아카데미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 공연을 성사시키려고 차오양취 문화관을 알아보고, 피춘에 드나들고, 회장을 설정하고, 선전하고, 도구를 준비하고, 텐트를 세우고, 공연의 질서를 유지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들은 분명히 사쿠라이의 텐트 연극에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발견했으리라. 그 계기는 “이해할 수 없다”라는 곳에서 움텄다. 사쿠라이는 지금까지의 지적 훈련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어느 젊은 저널리스트의 감상은 대표적이다. “이 연극의 내용은 몹시 인텔리적이지만, 텐트라는 풀뿌리 방식이나 배우의 신체성과는 기묘하게 어긋난다. 사쿠라이씨는 확실히 그 역설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톱으로 텐트용의 목재를 재빠르게 썬다.”

지식인과 민중의 구분은 입 발린 선언이 아니라 생의 위기로 내밀렸을 때 비로소 소멸된다. 그 구분이 소멸될 때 지식인은 민중이 되며 민중도 지식인이 된다. 사쿠라이의 텐트 연극은 그것을 실천해왔다. 그의 희곡은 모두 민중의 신체성을 지니며, 그 신체성의 예술을 추구해왔다. 베이징의 텐트 소모임과 첫 회 관객은 바로 이 점으로 말미암아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텐트 속에서 연출된 생생한 신체성은 결코 통속적 의미에서 무조작적인 ‘민중적’인 것이 아니었다. 난해한 대사도 지식인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애초 텐트 연극과 사쿠라이는 민중과 지식인의 경계선을 돌파하는 에너지로서만 예술의 꽃을 피우고 있다.
일본에서는 조용한 「게공선」의 붐이 이는 듯하다. 그것은 어떠한 사회변동을 예고하고 있는가. 정치의 계절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뿌려진 예술의 씨앗은 텐트를 자양분으로 삼아 지금 만개하려고 하고 있다.

응답 1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오장현, Dongjin, Jung, Sim, Sangjin, 완초 과학자 김우재, 김강기명, Kimkang and others. 김강기명, Kimkang said: "지식인과 민중의 구분은 입 발린 선언이 아니라 생의 위기로 내밀렸을 때 비로소 소멸된다. 그 구분이 소멸될 때 지식인은 민중이 되며 민중도 지식인이 된다" -사쿠라이 다이조와 텐트 연극 http://bit.ly/cZFjN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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