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텐트연극, 현실과 환상의 경계

- 고헌(수유너머R)

중국은 거짓말처럼 더웠다. 아니다. 거짓말 같지 않고 ‘리얼’하게 더웠다. 텐트가 세워지고 있는 피춘(皮村)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숨 막힐 듯 뜨거운 공기가 살에 닿았다. 서울과 비교해 온도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지만 습도 때문인지 정말로 뜨거운 공기가 피부에 찰싹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둘째는 코를 찌르는 냄새였다. 피춘의 골목길은 지저분했다. 골목길 곳곳에 분리되지 않은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물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쓰레기 냄새, 바로 옆에 식당에서 파는 음식의 향신료 냄새가 섞여 어느 것이 먹을 수 있는 음식 냄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특히 향차이라는 향신료 냄새는 거리를 가득 매웠고 유난히 그 냄새에 민감했던 나는 두통이 날 지경이었다.

세 번째로 강렬했던 것은 그곳의 풍경이었다. 우선 피춘의 하늘은 줄곧 회색이었다. 중국에 머물던 6일간 나는 파란하늘을 보지 못했다. 날도 흐렸을 뿐 아니라. 엄청난 먼지와 황사 덕에 회색이라기보다 약간 누렇고 무거워 보이는 하늘이 피춘을 짓누르고 있었다. 또 그곳의 건물들은 미디어를 통해 익히 보던 베이징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춘은 그야말로 빈민가였고 엉성하게 쌓아올린 벽돌집, 시멘트집, 시장 통과 사창가 그리고 버려진 들판과 흉측한 폐건축자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피춘의 마을 풍경

여러 생소하고 낯선 감각들이 한데 뭉쳐져서 나를 덮쳐왔다. 한동안 나는 그 감각들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에게 이곳 피춘은 하나의 거대한 디스토피아로 다가왔다. 그 디스토피아는 너무나도 ‘리얼’했다. 아니 ‘리얼’함 덕분에 디스토피아로 느껴졌다. 그 ‘리얼’함이란 여러 겹의 지층을 이룬 감각들의 무게였다. TV속에 있는 지구촌 곳곳의 빈민가는 이러한 공감각적인 리얼함을 걸러낸다. TV화면만으로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생각했다. 그들과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잠을 자는 것만도 나에겐 벅찬 일이었다. ‘나는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의식을 지녔어’라는 알량한 자부심은 이런 ‘리얼’한 감각들 앞에서는 무가치 했다.

너무나 ‘리얼’하다. 아니 너무나 리얼해서 오히려 환상처럼 느껴진다. 그 리얼한 감각들, 끊임없이 나를 물자체의 세계로 이끄는 그 리얼함을 나는 환상이라고 역설하고 싶다. 환상은 현실의 범위를 넘어선 리얼함이고 벤야민이 말한 신적폭력이 일어나는 장소이고 메시아가 도래할 시간이다. 리얼함을 넘어선 리얼, 하이퍼리얼한 그 환상에 취해서 나는 현실을 보지 못했다. 현실은 오직 텐트 안에서만 일어났다. 텐트 안에서는 무대를 세워야 했고 밥을 먹어야 했고 연기연습을 해야 했고 소품을 만들어야 했다. 말이 안 통하는 중국, 대만, 일본 배우들과 친해져야 했고 스텝들과 눈짓 발짓으로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손님으로 있으면서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눈치껏 알아서 일을 거들어야 했고 최소한 밥값은 해야 된다는 의무감을 가져야 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익숙한 세계로 돌아오는 공항에서부터 환상은 더 이상 없었다. 갈 때보다 30원이나 떨어진 환율 걱정을 해야 했고 총 여행 경비를 계산 해야만 했다.

나는 그곳, 피춘의 주민들의 현실을 공유하지 못했다. 그들과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다른 층위에 있었다. 나는 저 밑바닥의 환상 속에 있었고 그들은 그보다는 몇 층 위의 현실 속에 있었다. 그리고 피춘은 그 현실의 층위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현실을 보지 못했다. 짐작조차 어려웠다.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비록 그들과 같은 땅을 밟고 있지만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 텐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제공했다. 텐트는 환상들을 불러 모았다. 텐트에서 연극 연습이 시작되면 일을 끝낸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텐트로 모여들어 무대를 둘러싼다. 배우들은 연기를 시작하고 연출과 스텝들은 그 배우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다시 연출과 스텝들을 마을 주민들이 바라본다. 마을 주민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객석으로 들어 왔다. 객석 뿐 아니라 무대 바로 앞에, 백스테이지에, 연출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경계를 깨고 우리의 현실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허구의 공간인 무대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무대를 포위라도 하듯 무대 주위를 점령했다. 배우들은 아이들과 함께 마실 나온 노동자 가족들 앞에서 연기 연습을 해야 했고 백스테이지에서는 누군가 무대장치나 소품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는지 살펴야 했다. 구경에 관심 없는 주민들은 무대 주위의 공터에서 수다를 떨고 장기를 두고 탁구를 쳤다. 무대를 둘러싸고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무대는 허구를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이 허구(무대)를 둘러싸고 현실과 환상이 마주 앉는다. 무대는 현실로도 환상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공간이 된다.

사쿠라이의 텐트연극은 사실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극단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아마추어 배우들의 연기는 예술의 전당, LG아트센터, 두산아트센터 등 거대자본이 만들어 내는 스펙터클한 극장과 유럽의 최첨단을 달리는 가장 최신의 경향의 공연예술작품에 입맛이 길들어진 나에게는 뭔가 모자라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텐트가 주는 느낌은 묘했다. 텐트가 만들어 지는 모든 과정, 허구의 공간, 무대가 성립되는 그 순간, 즉 무대화작업으로서의 텐트가 갖는 특별한 위상에 관심이 갔다.

공연에 앞선 배우들이 분장하는 모습

관객들은 객석에서 무대에게 환상을 제공한다. 관객들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객석으로 올 때 그들의 현실은 그들의 현실 속에 벗어 놓고 오직 환상인 채로 객석에 앉는다. 환상 그 자체, 몸뚱이 그 자체인 체로. 배우와 스텝들은 무대에 현실을 제공한다. 그들은 전혀 환상적이지 않다. 그들은 현실의 끈을 절대 놓지 않는다. 하지만 무대로 들어가는 순간, 배우는 무대와 함께 구원받는다. 따라서 무대에서 구원받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은 허구 속으로 직접 뛰어듦으로서 구원받는다. 하지만 환상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환상인 채로 이미 구원이나 다름없다. 다만 관객들의 그들의 현실로 돌아가 무대의 허구를 그들 생활에서 스스로 반복할 때 그들의 현실이 구원받는다. 따라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무대는 관객들에게 환상을, 배우와 스텝들에게 현실을 제공받는다. 하지만 무대 자체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것은 허구의 공간이다. 즉 없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현실이 환상을 불러 들일 때만이 생성되는 공간이다. 무대를 통해서 관객은 구원받지 않는다. 구원받는 것은 무대이고 배우이다. 허구가 창출되는 그 시간만이 구원받는 것이다. 관객은 구원받는 무대의 목격자일 뿐이다. 따라서 무대는 무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관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객은 무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때 오직 중요한 것은 무대화 하는 작업이다. 현실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무대화 작업. 우리에게 유의미한 단 한 가지는 바로 현실 속에서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대가 생성되는 순간 현실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무대는 무대 스스로를 구원한다.

텐트는 이 무대화 작업에 좋은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사쿠라이는 인터뷰에서 그의 작업을 역포위하는 작업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혹은 자본주의로부터, 거대한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포위당하고 있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일본정부에게 요주의 인물이기도 하다. 역포위란 자신을 포위하려고 하는 것들을 역으로 자신이 포위한다는 것인데 여기저기 세계의 각 도시마다 텐트를 세워 그것을 준거점으로 하여 포위를 한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그의 연극을 지켜본 나로서 그의 텐트는 매 순간 피춘의 주민들에게 포위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름도 알 수 없고 얼굴도 없는 수많은 존재들이 쏟아져 나와 텐트를 포위한다. 이렇게 연약한 텐트가 어떻게 거대한 우리의 현실을 역포위한다는 것일까? 오히려 포위당한 것은 우리들이었다. 답은 여기에 있었다. 사쿠라이가 포위하려고 하는 것은 텐트 바깥에 있는 피춘의 현실이 아니다. 그가 포위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이 끌고 들어온 우리의 현실이다. 그 현실은 텐트 안에 포위되었고 또 피춘이 제공하는 환상 속에 포위 되었다. 안간힘을 다해 무대화 하려는 우리의 현실은 포위당한다. 무대화 작업을 하는 배우, 스텝들은 모두 중국, 일본, 대만의 상류층 혹은 중산층이고 대단한 인텔리들이다. 그들이 끌고 온 현실은 텐트 안에서 포위당하고 곧 무대 위에서 구원받는다. 둘째 날 공연부터는 피춘의 주민들이 아닌 외부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한 관객들이 찾아 왔다. 소위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인텔리들이다. 마을 주민들과는 다르게 공연장 에티켓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쑥한 옷차림과 하이힐은 이곳 피춘의 공기와 도로 상황에 전혀 맞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역시 환상인 채로 객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이 두고 온 현실은 이곳에서 포위당한다.

공연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들고 나왔다. 텐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료 관광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는 이 공연을 즐기기 위해 교통도 불편하고 외지인 이곳 피춘으로 오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 시켜줌으로서 베이징의 문화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정책으로 마련된 무료버스였다. 매끈한 옷차림의 관객들은 모두 이 버스에 올라탔다. 에어컨이 나오고 쾌적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면서 나는 나의 연극이 끝나 감을 느꼈다. 이번 여행에서 중국은 나에게 하나의 커다란 텐트였고 피춘은 하나의 무대였다. 그 무대에서 나는 배우가 되었고 나의 현실은 포위당했다.

현실로 돌아와 나는 ‘무대화’와 ‘텐트’를 생각했다. 사쿠라이는 텐트로 무대화를 구현했지만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쿠라이가 그것을 텐트라고 불렀다면 피터 브룩은 그것을 ‘빈 공간’이라 불렀다. 우리의 현실 어디에서건 빈 공간은 형성될 수 있다. 무대는 우리의 생활 속에 어디에서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빈 공간(무대)은 우리의 현실을 포위하고 그 현실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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