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수유너머

달맞이의 책꽂이
<보름달의 전설>미하엘 엔데 저 / 비네테 슈뢰더 그림 / 김경연 역/ 보림

미하엘 엔데의『보름달의 전설』은 참으로 철학적인 그림책이다. 진리, 구원, 깨달음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비네테 슈뢰더의 몽환적인 그림 또한 텍스트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 그림책은 은자와 도둑. 상반되는 두 캐릭터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잘 보여준다. 은자의 삶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젊었을 때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은 결혼식 전날 다른 사내와 줄행랑을 친다. 부유하고 명망이 높았던 예비 장인은 폭풍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거지가 된다. 은자는 사랑, 부, 명망……. 지상의 모든 것들이 허울뿐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은자는 진리를 찾기 위해 책 속으로 파고든다. 보일 듯 보일 듯,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진리를 찾아 난해하기 짝이 없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 저작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죽을 무렵에 쓴 마지막 책에 가서야 “내가 쓴 모든 책이 진실로 속이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았다”며 은자의 뒤통수를 친다. 두 번씩이나 호되게 좌절을 경험한 은자는 하염없이 세상을 떠돈다. 그러다가 외진 산골짜기 동굴에 들른 은자에게 고귀한 하늘의 소리가 들린다.
“이곳에 머물라! 내가 여기서 너를 만나고 싶으니라.”
은총을 받은 은자는 그날부터 동굴에 머물며 명상에 잠긴다. 영혼과 대화를 나누느라 그의 정신은 날로 숭고해지며, 어느덧 그에게서는 신의 냄새가 난다. 독사와 새, 거미들까지 저절로 그의 곁에 이르면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 그곳에서 그는 온갖 뭇짐승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지상의 낙원에 이방인이 찾아온다. 인간사회에서 내쫓긴 사내 역시 지독히 외로운 처지였다. 거친 세상을 헤쳐 온 사내는 두려워하는 것도 경외하는 것도 없었다. 사내 역시 세상이 있는 자들, 힘 센 자들의 편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옛날 사내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욕보인 청년을 죽인 적이 있었다. 신분이 높은 사내는 쥐새끼처럼 법의 그물을 빠져 나갔고, 신분이 낮았던 사내만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사내는 형이 집행되기 전날 기적처럼 탈출해 숲 속으로 도망쳤다. 그 뒤로 도적 패에 가담해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사기를 당해 자기 몫을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덤볐다가 또다시 죽을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사내는 도망쳤다. 사내는 끈질기게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비록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가지만,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을 훔쳤다. 외톨이로 살아가는 그 역시 어느덧 범인의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아 말하는 법은 잊어버렸지만, 동물들의 우짖는 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는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피해 은자가 있는 바로 그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동굴 입구에서 도둑은 은자를 만난다. 은자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순간 사내는 그동안 자기 몸속에 가득했던 가시가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느꼈다. 은자 또한 사내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인다.
은자는 도둑에게 날마다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죄 많은 삶을 회개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신의 은총을 구하라고 애원”도 한다. 도둑은 은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스승이 실망할까 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도둑은 스승을 믿고 존경했으며, 스승의 말은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무엇보다 은자가 머무는 동굴 주변에 깃든 평화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둑은 영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도둑은 은자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어 슬펐다. 그렇다고 친구이자 스승인 은자를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날 부터인가 은자가 도둑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며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린다. 왜 그래야만 하느냐고 묻는 도둑에게 은자는 “나는 큰 은총을 입었단다. 그렇지만 너에게 비밀을 털어놓기에는 네가 워낙 말귀가 어둡구나. 그러니 더는 묻지 말아라.” 라고 딱 잘라 말한다. 도둑은 은자가 조금씩 변해간다고 느끼지만, 은자 스스로 모든 것을 말해줄 때까지 기다린다. 일곱 달이 지나자 은자는 자신이 그동안 가브리엘 대천사를 만나고 있었는데, 이제 곧 주님이 직접 자신을 찾아오실 거라며 좋아한다. 도둑이 숨어서라도 그 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지만, 은자는 단호하게 자른다.
“나는 네가 그분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기나 할지 의심스럽다. 그만큼 너는 눈 뜬 장님이다. 그러니 그런 불경스런 소망은 잊도록 해라.”
은자가 도둑에게 이처럼 냉혹하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으나, 도둑은 오히려 은자의 그런 태도에 진실을 느낀다.

은자에게 뭔가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얼마 전부터 동물들이 은자의 동굴로 오지 않으며, 은자가 명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동굴 앞에서 매가 새끼 토끼를 덮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은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다면, 도둑은 자신이 은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주위가 고요해지고, 저 멀리 나무 우듬지 너머로 은빛이 나타난다. 빛은 점점 커지더니 동굴 앞에서 멈춘다. 빛 속에서 그리폰들이 끄는 마차가 나타난다. 마차 속에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하게 빛나는 형체가 서 있다. 은자가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경배를 드리는 사이, 도둑은 오묘한 형체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은자가 그동안 가브리엘 대천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은 오소리였다. 목에 화살을 맞은 채 죽어있는 오소리를 보고서야 은자는 그동안 자신이 헛된 것에 현혹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은자는 평생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아 헤맸다. 그가 발견한 마지막 진리는 신이었으나, 그는 ‘신’에 집착한 나머지 허상을 보고 만다. 자신이 일구었던 평화로운 낙원마저 스스로 허물어 버린다. 불변하고 단일하며 영원한 실재인 이데아를 설정해 놓고, 그 외의 것은 모두 가짜라고 단언해 버리는 이들처럼, 천상의 세계에 몰두하느라 은자는 자신이 서 있는 지상의 세계와 그곳에서 자신이 맺었던 관계를 잠시 잊어버린다. 자신만이 선택받았다는, 성스런 사람이라는 오만과 독선으로 아들처럼 사랑하는 도둑을 ‘눈 뜬 장님’으로 폄하하더니, 가브리엘 대천사에게 화살을 쏘았다는 것을 알고는 ‘사탄’으로 몰아 부친다. 아니 그에게 도둑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회개해야 할 죄 많고 타락한 인생이었다. 자신과는 전적으로 다른 족속이었던 게다. 그럼에도 은자는 속마음을 감추고 도둑을 회개시켜야 한다고, 그의 영혼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둑에게는 진리보다는 삶이 우선이었다. 그는 그냥 살았다. 살아냈다. 살다 보니, 동물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은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은자를 좋아했던 건 그가 성스럽고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그가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애써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은자를 친구로,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믿고 따랐다. 그래서 은자가 실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으로 회개를 했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은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은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성스런 사람으로 생각해 하늘의 부름을 받을 날만 기다렸으나, 도둑은 자신을 어리석은 죄인이라고 생각했기에 헛된 욕심을 품지 않았다. 죄를 지었으니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은자는 홀로 가브리엘 대천사를 영접하는 영광을 누렸으나, 도둑은 은자를 위해서라면 가브리엘 대천사와도 맞짱을 뜰 수 있었다. 도둑에게는 천상세계보다는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삶이 훨씬 더 중요했다.

미하엘 엔데는 은자의 위선을 드러내고, 성자가 되고 싶었던 은자를 나락으로 떨어뜨림으로써, 구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나는 네 영혼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네가 내 영혼을 구했구나. 내가 꿈에서 들은 약속은 실현되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실현되었어. 너를 통해 실현된 거지.”
은자가 아니라, 도둑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구원이라는 무엇인지 되새겨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자는 좋은 스승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도둑이 자신의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촉발한 건 사실이니까. 은자는 도둑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할 수 있게 했으며, 자신이 은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했으며, 마음에 품은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했다. 도둑 또한 은자의 스승이라고 할 만하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목적이 해방이라면, 도둑이야말로 ‘고정된 틀’에 갇혀 있던 은자를 일깨워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으니까 말이다.

은자는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는 너에게서 배우고 싶구나. 자, 돌아가자.”

마지막 대목은 삶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운다. 배움이건, 진리를 찾는 여정이건, 구원에 이르는 길이건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 때로는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라도. 숭고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이 바로 우리를 숭고한 존재로 승화시켜주는 과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