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우울과 허무를 넘어, <미니마 모랄리아>

- 서동욱(수유너머R)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우울과 허무주의의 문제는 철학에서 언제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물귀신 같은 것이었다. 철학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의 비극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이 허무와 구원의 문제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어째서 그럴까? 어떻게 ‘허무주의’는 하나의 ‘~주의’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길바닥에 앉아 한탄하는 자들이나 가리켜야 할 이름이 아닌가? 어떻게 우울과 절망이 철학자의 사유의 원동력이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도르노의 책 <미니마 모랄리아>가 그렇다. 어찌보면 이 책은 우울과 절망으로 점철된 염세주의자의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최 세상이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이 시종일관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일종의 일기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보통의 일기장이 비밀스럽게 쓰인다면 이 일기장은 대놓고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남에게 절대 알리지 않을 생각이라면 일기는 뭣 하러 쓰는가. 그냥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면 될 것을. 자기 생각을 잘 기록해 두려고? 그렇지 않다. 진지하게 숙고해본다면 일기는 결코 순수한 사적 감정의 기록 행위 같은 것이 아니다. 밤중에 혼자만의 내밀한 얘기를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순수한 기록 행위를 가장한 타인과의 대화의 시도다. 세계와 잘 안 되던 대화를 해보려는 시도. 혼자서 일기를 쓰는 순간에도 항상 타인을 의식하며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반증해 준다. 일기장에 쓰여진 문자에는 타인의 눈길이 잔영처럼 끈질기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일기는 사적인 기록 행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 안 됐던 대화를 재개하려는 시도이자 외부 세계와 내적 감정의 불일치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시켜줄 타자를 찾는 시도다. 설령 그 타자가 이제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자기 자신밖에 안 남았을지라도 그렇다.

총 153편으로 이루어진 이 일기들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말도 안 되는 파시즘적 기류 속에서 희망이라고는 도대체가 보이지 않는 사회 속에 던져진 개인이 온몸으로 그것을 겪는 체험을 자신의 사유 속에 녹여낸 것들이다.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마다 고통으로 짓이겨져 간신히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 곳이 없다. 하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 추락해 가는지, 그 끝없는 추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걸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것이 우리의 진보의 결과물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는, 실로 기가 막히는 현상을 바라보는 열 받치는 심정을 써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공부’한다든지 혹은 이 책을 통해 ‘사실’이라거나 독서를 통한 ‘교양 습득’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보다 호기심을 이끄는 것은 이 천성적으로 우울과 나락으로 떨어지는데서 오는 향락을 즐기는 기질의 소유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삶’,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희망’을 어떻게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울함과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문제가 <미니마 모랄리아>앞에 놓여진 진정한 수수께끼다.

오늘날 대부분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우울함을 전혀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스피노자 말대로 우리는 수시로 변하는 외부 원인에 의해 언제나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는 존재인데다 제정신 차리기가 힘들게끔 돌아가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탓이다. 전체주의 시기에는 억압된 성적 욕망을 한 개인에게 수렴시킴으로써 그 파괴적 에너지를 파시즘적 권위에 복종시키는 개인들을 탄생시켰다면, 오늘날 흔히 보이는 현상은 그보다는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고 파편화된 조각들로 돌아다니는 신체들, 원자화됨과 동시에 우울함을 그 핵으로 감싸고 있는 개인들이다. 영화, 음악, 공연관람 등 문화산업 그리고 모든 생활의 제반사항들이 모두 개인화된 가치를 내면화하는 것을 향하고 있다. 원자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들은 그 우울함을 한껏 더 신경질적으로 뻗어대야 하는 물적 토대가 구비된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 접촉치 않으려는 히스테리적인 태도, 온갖 물질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이기주의가 오늘날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다. 그러나 개인 속에 파묻힐수록 개인은 점점 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과거 파시즘을 향했던 광적 에너지는 오늘날 우울과 절망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소위 ‘계몽된 자들’에게 승화된 형태가 허무주의다.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를 통해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희망적인 미래상도, 바꿀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치가 득세하던 당시의 독일은 실제로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없는 우울함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미세한 한 줄기 구원의 빛이 흘러들어오길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될 대로 되라고 놔버리지 않는 것은 왜인가. 가령 이런 말은 왜 하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부서지기 쉬운 속성을 잊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이미지가 올바른 삶을 대체하지는 못함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시민성의 중력이 이러한 자각에 저항한다. 초연한 관조자도 활동적 인간만큼이나 세상에 매여 있다. 전자가 갖는 유일한 이점은 이러한 매여 있음에 대한 통찰과 그런 앎 속에 있는 눈곱만큼의 자유를 갖는 행복이다. 자유주의가 해체되면서 시민사회의 고유한 원칙인 경쟁의 원칙은 극복되기보다는, 사회의 객관적 발전 경향에 따라 서로 밀치고 떠미는 원자들의 속성, 거의 인류학적인 인간의 속성으로 강화되었다. 삶이 ‘생산 과정’에 종속되는 상황은 모든 사람을 일종의 고독과 고립에 굴복하도록 강요하며, 이러한 고립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선택한 최선의 결정으로 간주하게끔 유혹받는다.

사람들은 선사하는 행위를 잊어버린다. 교환 원칙을 위배하면서 선물하는 행위는 사리에 어긋나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들조차 선물은 그들에게 솔이나 비누를 팔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미심쩍어 하면서 선물을 준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훑어본다. 그 대신에 사람들은 자선, 즉 눈에 보이는 사회의 환부를 계획적으로 땜질하는 ‘관리되는’ 선행을 행한다. 이러한 조직화된 사업에는 인간적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진정한 선물 행위는 받는 사람의 기쁨을 상상하는 기쁨이다. 그것은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 즉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을 잊어버리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제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 왜곡되지 않은 모든 관계, 유기체 내부에 있는 화해적 요소란 아마, 주는 행위, 선사하는 행위이다. 앞뒤를 재고 계산하는 논리에 의해 선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를 사물로 만들면서 얼어죽는다.

스스로는 힘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우울과 절망, 허무의 뒤편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물귀신이 있다. 그것이 한 줄기 남은 구원의 희망,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열망인 것이다. 제 아무리 우울함의 끝에 있는 사람도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기쁨이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밑바닥을 치더라도 그것은 다시 튀어 오르기 위한 것이지 영원히 바닥으로 침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실상 종교를 찾고 뭐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이들이야말로 다 안 될 거라고, 허무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아닌가. 가장 우울해 할 때조차도 그는 가장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우울과 허무의 에너지가 조각조각 흩어진 개인들을 어떻게 다시 서로 만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마만큼 강력한 에너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도르노가 어떻게 그런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바로 이 에너지에서 찾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비록 그것이 음 기운이 가득한 것일지라도, 불순물이 안 섞인 충만한 감정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게 되면 미학에 가까울 정도가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차라리 번개 같은 눈치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사물을 바라보는 아도르노의 세심한 눈길과 혀를 내두를 정도의 탁월한 통찰력은 무심코 지나쳤던 잘 안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게 해주는 심미안적인 예지력에 넋을 잃게끔 만든다. 거의 종교적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경지다. 어쨌든 이것도 힘은 힘인 것이다. 그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 방향만 잘 틀면 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자들이 가장 크게 변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벤야민은 유물론이 신학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더라면 무엇과도 싸워서 백전백승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와 허무주의가 동의어가 된 이 시대에 이 명제를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즉, 우울과 허무의 에너지를 흡수한다면 무엇과도 싸워볼만 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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