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텐트연극’, 그 현장에 다녀오다

- 박카스(수유너머R)

두 달전 R3에 실린 연극인 사쿠라이 다이조씨의 인터뷰 원고를 봤다. 평소 각성만을 가져다주는 연극 말고 다른 방식의 연극에 목말라 하던 중 사쿠라이씨의 인터뷰기사 중 ‘자의식의 혼재상태에서 창출해내는 공공성, 계몽이 아닌 결핍으로부터 현실 사회 속에 함몰을 내는 연극, 사람들에게 가시화 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가시화하기’ 등등의 말은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가 만드는 연극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연극이 ‘어떤’ 무대 위로 올라가는 걸까. 계획은 ‘무작정’으로 마음만은 ‘작정’하고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7/27

‘텐트를 친다는 것’

후덥지근하다. 가만히 서 있으면 등에서 땀 한줄기 주룩 흐른다. 공항에 내려 중국이 ‘대륙이긴 대륙이나보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내리쬐는 태양빛과 바람 없는 거대한 분지와 같은 날씨 덕분이었다. 택시를 잡고 기사아저씨에게 텐트연극공연장이 있는 ‘피촌’으로 가자고 말했다. 좀 더 정확히 상황을 묘사하자면 ‘피촌으로 가요’ 라고 중국어로 써있는 종이와 피촌까지 가는 그림지도를 기사아저씨에게 들이댔다. 기사아저씨는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두 외국인에 대해서 난감해하는 것은 물론 지도에 나와있는 피촌을 찾는 데 역시 난감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결국 연극준비팀과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야 겨우 ‘피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지로 자욱한 거리, 여기저기 널부러진 쓰레기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어린 꼬마들, 웃옷을 벗고 다니는 남자들, 웃옷 단추를 풀어헤친 채 길거리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경찰들, 골목골목 걸려있는 빨래들. 피촌의 풍경이 나에게 주는 첫 인상은 ‘드러내놨다’ 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피촌은 북경수도공항에서 30~4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북경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마을은 아니었다. 피촌은 북경시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텐트연극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먼저 텐트의 규모에 놀랐다. 내 눈 앞의 놓인 공연장의 모습은 단순히 ‘텐트를 쳤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공연장 세트를 텐트로 덮었다’ 라고 표현해야 할 듯했다. 커다란 나무들을 잘라 기둥으로 세우고 곳곳에 철근구조물들과 목재들을 철사로 엮어 만든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 기둥과 기둥 사이로 조명기구는 매달려있었고 조명무대와 음향시설장도 나무와 철근으로 직접 짜서 만들어 놓았다. 그 대형 구조물 위로 텐트가 뒤덮힌 채 펄럭이고 있었다. 속으로 ‘이건 완전 노가다잖아’ 라고 말했다. 텐트라는 또 하나의 장을 만드는 이들의 과정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텐트 안에서 사쿠라이다이조씨를 비롯한 이번 텐트연극팀과 인사를 나눴다. 이번 연극에는 사쿠라이씨와 함께 공연을 해온 일본 극단멤버들 뿐 아니라 대만, 중국, 독일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평소 하는 일 역시 극단배우, 학자, 시인, 고등학생, 대학생,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까지 다양했다.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사람들은 텐트연극 준비에 집중했다. 공연이 3일 남은 만큼 공연장의 분위기는 꽤 분주해보였다. 저녁을 먹고 공연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습을 시작한 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을 주민들이 공연연습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스무명 남짓의 사람들이 공연준비장에 구경을 하러왔다. 심지어 한 곳에서는 장사진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신기한 듯 연극연습을 지켜봤다. 때론 구경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배우들 대사소리보다 커서 관객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기도 했다.

연극연습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사쿠라이씨는 나와 헌이형을 근처에 당나귀고기를 파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술과 고기를 먹으며 사쿠라이씨와 영어로 대화가 오갔다. ‘내가 먼저 인터뷰를 재밌게 잘 봤습니다.’ 라고 사쿠라이씨에게 말을 전하자 사쿠라이씨는 인터뷰라 말을 너무 많이 덧붙여 이야기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왜 피촌에서 연극을 하기로 한 겁니까?’ 라고 말을 이어갔다.

사: “피촌은 북경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이 곳 사람들은 농촌으로부터의 객지벌이 노동자가 대부분입니다. 또 대부분이 하루 벌이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내년이면 중국정부의 개발정책으로 인해 오래된 집들을 허물고 새 건물들을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면서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또 다시 어디론가 내쫓고 있는 형편입니다. 나는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주민들과 함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었기에 이곳을 택했습니다. 당신들이 이곳에 온 것은 당신들 스스로에게 커다란 행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이면 사라질지 모르는 동네의 모습을 기억 속에 잘 간직하고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나는 오늘 공연연습에서 보았던 몇몇 궁금한 점들을 물었다.

박: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섞여서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또 전문 배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극 경험이 처음 있는 사람도 함께하고 있는 데 공연을 준비하는 데 문제는 없습니까? 오전 중에는 분위기가 산만해지자 버럭 화를 내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연기지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경우 공연 연출에 특히 신경쓰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사쿠라이 씨는 웃으며 말했다.

사: “내 스타일은 파시스트입니다. 다만 그것은 과정의 한 부분에서만 그렇지요. 이건 마초스타일과는 다릅니다. 함께 섞여서 공연을 만든 것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내일이면 사라질 이곳에서 함께 공연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언어보다, 다양한 출신보다,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연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흔히들 한국인은 일본인을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좋아하기도 하구요. 일본인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또 중국인은 대만인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대만인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텐트 안에서 기존에 이렇게 생각되어지는 관계들은 모두 사라집니다. 텐트 안에서 관계는 오히려 더욱 자유롭습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사쿠라이씨는 한국의 제주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쿠라이씨의 부인이 특히나 제주도를 좋아해서 그곳을 몇 번이나 간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제주도를 찾으며 제주도 4.3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4.3사건은 정말로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사쿠라이씨는 나지막히 그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해 말했다.

사: “우리가 피촌을 선택한 이유도 그렇지만, 나는 자유가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가능성을 만드는 것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스스로의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이구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에게 기회가 없는 곳에서 기회를 만들어낼 때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쿠라이씨는 언젠가 꼭 북한에서도 텐트연극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술자리가 서서히 접힐 때쯤 한국에서 텐트연극을 보러 찾아온 두 청년에게 사쿠라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사: “텐트연극을 보고 행여나 젊은 세대 친구들이 무언가를 이어가야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다만 내가 보고 들은 것, 느낀 것을 가지고 텐트를 칠 뿐입니다. 당신들은 또 당신들이 본 세계를 나름의 텐트로 치기 바랍니다.”

내가 자리를 나서며 ‘그래도 텐트는 텐트이어야 합니까?’ 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사쿠라이씨는 ‘물론’이라고 웃으며 답한다. 그렇게 유쾌한 대화가 1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7/28

사쿠라이씨와의 대화가 기억에 남아서였을까. 늦게까지 술자리를 했음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피촌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텐트가 쳐지는 장소, 피촌’

아침 8시. 숙소에서 나와 동네의 큰 거리로 향했다. 거리에 놓인 공용화장실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세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인다. 공용화장실 앞으로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도 보인다. 이곳 마을에서는 대부분 집 앞에 빨래가 널어져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의 거리를 횡단하여 빨래가 널어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속옷에 변태성욕을 보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에 들어서니 이미 장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분주했다. 만두를 찌고 있는 점원의 모습도 보이고 고기를 굽고 있는 아주머니들도 보인다. 다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장을 지나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로 들어선다. 동네에 들어서니 유난히도 돌아다니는 개들이 많다. 이 개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지거나 동네를 뛰어다니거나 한다. 어느 녀석 하나 줄에 묶여있지 않다. 어느 골목엔 늑대인지 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개가 어슬렁 동네를 걸어다니기도 한다. 녀석은 전혀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는 눈치다. 또한 사람들도 그 ‘늑대(같은)개’를 보고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녀석을 ‘늑대 개’라고 생각하는 나만 녀석과 떨어져 멀찌감치 걸을 뿐이다. 그 때 어느 한 골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한 곳에서는 개싸움이 났다. 아이들은 신나는 구경이 났다 싶었는지 자리를 이동하며 개싸움을 지켜본다. 어른, 아이 함께 개싸움을 보고 있었다. 그 맹렬한 싸움의 현장에서 아이들을 떼어놓으려는 부모는 없었다. 사람들은 자리를 피하지도 않고 개싸움을 그러려니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동네의 안으로 들어가자 뿌연 먼지와 함께 벽돌과 모래들이 쌓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그만 동네 전체가 공사장이 된 것만 같다. 집들 대부분이 공사 중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신의 집 앞의 벽돌을 옮기고 쌓고 있었다. 이미 몇몇 곳에는 스테인레스 유리로 전면이 막혀있는 새 건물들이 지어져 있는 곳도 있었다. 문득 대문이 없는 옛 집들 사이로 전면이 막힌 새 건물을 보며 씁쓸한 기분이 든다. 새 건물들이 지어지게 되면 거리를 뛰어놀던 개들은 신식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집 거실바닥을 돌아다녀야 하는 건 아닌 지, 거리에서 빨래를 하던 사람들 역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리에서 피어나던 웃음들도 새로 지어지는 건물과 함께 꼭꼭 숨겨지는 지 것은 아닐지 염려가 들기도 했다.

동네를 빠져나와 다시금 공연장으로 향하려는 데 배가 아파왔다. 어제 밤 술을 과하게 마신 탓이었다. 배를 움켜쥐고 공공화장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먼저 좌변기가 없음을 발견했고, 다음으로 옆자리와의 칸막이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소문으로 들어오던 중국 공용화장실의 실체로구나.’ 나는 거부감보다는 체험해보고 싶었고 구석에 자리를 잡고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기다렸던 것은 아니지만 때마침 화장실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 남자가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볼 일을 봤다. 막상 옆 자리에 누군가가 들어서자 오히려 혼자 볼 일을 볼 때 ‘누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까?’ 라는 불안감이 사라졌다. ‘동지’까지의 친밀감을 형성한 것은 아니어도 막상 옆자리의 사람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자리를 나섰다. 화장실을 나서면서 문득 생각해보면 변을 함께 보는 일이 뭐 그렇게 별 일이고 숨길 일인가 싶었다. 부끄러운 일이어서 칸막이가 필요한 건지, 칸막이를 쳐두니까 부끄러운 일이지 구분이 잘 안 갔다.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걷는 데 등 뒤로 땀이 주룩 흐른다. 오늘은 어제보다 햇볕이 더욱더 강력히 내리쬔다. 머리가 살짝 어지럽기까지하다. 한 10분을 걸었을까. 땀으로 티셔츠가 흠뻑 젖었다. 내 옆으로 웃옷을 훌러덩 벗고 다니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꼬마는 물론이고 배 나온 아저씨까지 웃옷을 입지 않은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순간 집에서 TV속에 중국이나 아프리카 지역의 사람들이 웃옷을 입지 않고 다닐 때 혀를 끌끌 찼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 내 머릿 속에는 ‘가난한 지역 = 웃옷을 벗고 다닌다.’ 라는 공식이 자리했던 것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곳에 와서 거의 미칠 지경으로 웃옷을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가난의 문제가 아니었다. ‘덥다. 바람이 없다. 땀이 난다. 웃옷을 벗고 싶다.’ 이는 다만 피부세포의 열점에서부터 이어지는 충동에서 생각으로의 전달과정이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나는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처럼 꽁꽁 웃옷입기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텐트연극과 사람들’

거리 탐방을 마치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에 도착해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텐트 밖에 놓여진 소품들을 비에 젖지 않도록 연습장 안으로 들였고, 조명기구들과 음향시설 주변의 전선들에 비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서둘러 봉지로 그것들을 감쌌다. 한편에서는 텐트 위로 물이 고이지 않도록 기다란 봉을 가져와 고이는 물을 텐트 바깥으로 빠지도록 하였다. 마치 기다렸던 비가 온 것처럼 이들의 대처는 능숙했다. 그렇게 텐트 정비가 마무리 되어가자 사쿠라이씨는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연습장 안에 대자로 누워 잠을 잔다. 나는 내리는 비로 생긴 잠깐의 짬을 이용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번 ‘피촌연극팀’은 간략하게 사쿠라이씨와 함께 일본에서 연극을 만들어오던 극단사람들, 중국에서 이번 텐트연극을 위해 생긴 극단사람들, 타이완에서 텐트 연극을 만들어 오던 사람들, 공연이 만들어지는 현황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홍콩의 영화촬영팀, 한국의 방문단 정도로 나눠볼 수 있었다. 먼저 중국에서 결성된 ‘린’이라는 극단의 사람들중에는 사회과학, 인류학 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많았다. 여기에 몇몇 중국의 전문배우들, 시인 및 극작가, 학자, 음악원의 교수 등이 텐트 연극을 만들기 위해 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이곳의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기활동이나 텐트연극을 만드는 활동 자체가 공부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특히나 ‘피촌’이라는 가난한 지역에서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타이완에서 온 배우들은 이미 사쿠라이씨와는 타이완에서 작업을 함께 한 적이 있는 전문 배우들과 스텝들이었다. 타이완의 한 중년 남자배우에게 나는 텐트연극을 하면서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냐고 물었다. 그 배우는 돈은 집에서 부인이 벌고 자신은 이곳에서 연극을 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집에서는 숨 죽여지내고 집안일을 돕는 대신 하고 싶은 연극을 하고 산다고 말했다. “타이완에서는 일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고 때문에 여성의 힘이 더 세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제 열일곱살이 된 일본에서 온 따오나 중국에 사는 스무살의 파파에게 ‘텐트연극이 왜 좋느냐? 어떻게 북경까지 와서 연극을 하게 되었느냐?’ 라고 물었다. 그녀들의 대답은 텐트 연극은 ‘환타스틱 이벤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텐트연극은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재미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나의 짧은 영어실력으로는 다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홍콩 영화촬영팀은 텐트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는 것이 그들이 이곳을 찾는 주된 이유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곳 텐트연극의 홍보를 맡았고 부분부분 소품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텐트연극을 영화로 찍을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들은 이러한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드문 일이며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고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일본 극단팀 가운데 독일에서 온 ‘로빈’이라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어째서 사쿠라이씨와 함께 텐트연극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작년부터 사쿠라이씨를 따라 텐트연극을 만들게 되었는데 자신은 연극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보다 세상의 진실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로빈은 만약 사쿠라이씨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연극을 더 이상 찾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했다.

로빈이 말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사쿠라이씨 인터뷰 중 ‘완전한 허구를 무대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텐트 바깥의 세상을 허구화 하려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대 위에 올려진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진실로 생각한다는 로빈의 말이 흥미롭게 들렸다. 그렇게 세 시간 정도 지나고 비가 그쳤다. 배우들은 다시 리허설 준비를 하려고 자리를 일어섰다. 밤 늦게 연습이 끝났고 숙소에 도착해서 우연히 타마끼씨와 와타나베씨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이번 텐트연극을 보러 온) 하지메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타마끼씨는 사쿠라이씨와 함께 15년동안 함께 작업을 해온 텐트연극 베테랑이었고 와타나베씨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으로 오전의 설치 작업의 대부분을 도맡아 했다.

먼저 나는 그들에게 한국방문단 중의 하나인 나를 포함하여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섞여있는 데 작업하기가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와타나베는 “너무 많이 섞여 있는 것 아니냐”는 말에 ‘Too much’ 라고 웃으며 답했다. 이에 타마끼씨는 손을 들어 ‘필요없는 사람은 없어’라고 소리쳐 말했다. 이어 타마끼씨는 ‘나는 이 곳 텐트를 찾은 사람 모두를 같이 싸우고 있는 지원군으로 생각한다. 능력의 문제 이전에 우리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함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부끄러워했다. 이어서 내가 일본에서의 작업과 비교했을 때 이곳의 작업은 어떻느냐, 그 동안 텐트연극은 어떻게 진행되었느냐고 묻자 와따나베씨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매번의 작업과 연극은 뭐가 어떻다고 비교해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구분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놨다고 생각되었는지 타마끼씨는 자신의 딸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딸이 셋 있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꽤나 잘한다고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큰 딸은 연극에서 조명을 하고 싶어하고 둘째 딸은 의상을 만들고 싶어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연극을 하며 사는 것을 보고 딸들이 “이렇게 놀면서도 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이 곳 피촌에 와서 두 딸은 그 확신을 더욱 굳혔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이곳 정말 좋지 않아요?’ 라고 말하며 헤죽 웃었다. 술자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내내 연극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말들을 메모장에 적어본다. 사쿠라이씨가 그랬던가. ‘누가 섞여있는 것보다 어떤 생각으로 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가가 중요하다.’ ‘이 곳 텐트에는 참으로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오묘하게 모여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7/30

‘텐트연극에서의 웃음’

드디어 첫 공연 날이 되었다. 첫 공연은 특별히 이 곳 피촌마을 사람들을 위해 열린 무료 공연이었다. 홍콩촬영팀이 공연장 주변에 포스터를 붙이기 시작했고 공연장 앞에는 ‘로빈’이 몇 날 며칠 열중하며 완성한 대형 까마귀 그림천막도 내걸렸다.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공연장 안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연장은 공연 시작 1시간 전 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족히 200명이 넘는 관객들이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이 시작했을 때 좌석 뒤에서 서서 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물론 공연장 바깥에서 텐트의 틈새로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대 인사나 통제 없이 공연이 진행되어서였을까.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공연장 안의 웅성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관객들은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그들 하고 싶은 말을 했다. 한쪽에서는 공연을 보는 것 보다 배우들 연기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는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공연 도중에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사람들의 이목을 휘어잡는 장면들이 나오면 관객석은 일순간 조용해지기도 했다. 공연이 1시간 정도 흘렀을 때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사람이 나가면 그 빈자리를 뒷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 앞으로 와서 채우곤 했다. 공연 중간에 나가버리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연극 도중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 거기에 우는 애기들까지.

이 곳 피촌주민들은 이러한 연극공연을 보는 문화에 익숙치 않은 듯 했다. 스텝들은 무대 뒤에서 관객석에서 벌어지는 현장상황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사쿠라이씨도 자신의 등장씬이 아니면 무대 뒤로 와서 현장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이 다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란했던 공연장 안에는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텐트 위로 불꽃이 피어나고 텐트 위 천정이 열리자 관객석 곳곳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할머니도 계셨다. 나 역시 몇 번을 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감동에 덩달아 박수를 보냈다.

중국어도 일본어도 못 알아듣는 나는 공연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연극의 대부분을 이미지로 받아들여야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선보인 연기 중에는 나의 머릿속에서 쉽사리 떠날 줄 모르는 장면들이 몇몇 있었다. 자기의 몸에 청진기를 갖다대며 스스로 병을 진단하는 의사의 모습, 흰 날개옷을 뒤집어 보이며 그 속으로 검은 날개가 잔뜩 섞여 있음을 보여주던 흰까마귀(역)의 모습, 천정에서 뛰어내려와 사람들에게로 달려들던 수많은 까마귀(역)들의 모습, 여행가방에서 튀어나와 자신은 중일 전쟁에서 중국에 남게 된 일본인이며 ‘이곳에서 자신은 쓰레기에 불과하냐’는 절규를 외치던 나이많은 일본여배우의 모습, 전쟁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해 목만 남은 채 돌아다닌다는 중국 병사의 외침, 그리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갈등을 겪는 이들이 외치는 합창과 하늘 위로 솟는 불꽃의 모습. 그리고 닫혀 있던 천정의 텐트가 열리며 새의 날개처럼 펄럭일 때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에게도 전해지는 무엇이 있었다.

그렇게 첫 공연이 끝나고 스텝과 배우들이 모여서 축배를 나눴다. 이날은 타나끼씨의 딸 타오의 생일이기도 했다. 생일케익을 자르고 다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몇몇 사람들은 흥에 겨워 손을 들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 어느 순간에는 인터내셔널가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중국어, 일어, 영어, 한국어 4개국의 언어가 여기저기의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고 내 귓가에 들려왔고 나는 ‘이런 괴상한 연극을 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 연극을 무대로 올릴 때에는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 각자는 연극을 만드는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다른 인격으로 무대 위에서 살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 좋아서 무대를 찾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연극이 끝나면 울려퍼지는 관객의 박수소리가 좋아서 무대를 못 떠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감싸둔 충동을 무대 위로 드러낼 수 있어서 연극을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사람들은 연극을 만들지 않을 까 싶다. 그런데 텐트연극이 끝나고 이곳의 사람들을 보면서 때론 연극을 하는 이유가 ‘뒤풀이 자리가 좋아서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고생한 사람들 간의 동료애 뿐 만아니라 이들에게는 답 없는 행위를 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함께 공유하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특정한 대가나 이익이 주어지지 않기에 이렇게 섞일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힘이 텐트연극에 있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순간 ‘이들은 스스로에게 울려퍼지는 열렬한 박수소리를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답 1개

  1. zziraci말하길

    위에 인터뷰(?)에 “박”이 누군가 했더니 ‘박카스’였군요. ‘바카스’가 아니라… ㅎㅎ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