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기억 또는 소개하고 싶은 사람

- 오항녕

본래 운동을 하는 건 좋아해도, 구경하는 건 즐기지 않는다. 야구도 그렇다. 가끔 가까운 문학경기장에 맥주와 통닭을 들고 들어가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치고 달리는 모습을 감상하곤 하지만, 정말 그건 가끔일 뿐이다. 아무려면 중고등학교 때 옆 반 아이들과 짜장면 내기하던 그 재미만 하겠는가. 그러다가 요즘 야구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S. J. 굴드의 ‘풀하우스’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고, 하나는 아는 분이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로 가셨기 때문이다.

굴드는 ‘풀하우스’에서 왜 메이저리그에서 ‘4할 타자’ – 아니, 이렇게 읽으면 재미가 없다 – ‘꿈의 4할 타자’가 왜 사라졌는가 하는, 야구팬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하고, 야구전문가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이유에 대해 한마디하고 싶어 하는 사태에 대해 참으로 유려한 필치와 과학적인 검토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야구도 4할(또는 4할에 근접하는) 타자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야구위원회 자료를 뒤져 굴드의 방법에 따라 에세이를 써본 일이 있다.(http://www.jjan.kr/culture/others/)

오늘 얘기는 현재 KBO 총재(Commissioner)인 유영구 이사장님에게서 들었다. 10여 년 전부터 기록관리 운동의 실질적인 후원자였고, 현재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이라는 사단법인의 이사장으로 계시면서 젊은 사람들을 밀어주고 있다. 가끔 책이 나오든지 하면 인사를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나오는데, 매번 화두(話頭) 같은 고민거리를 주시곤 해서 뵙기가 즐거웠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굴드의 ‘풀하우스’ 얘길 했더니, 대략 굴드와 유사한 결론으로 답변을 하신다. 내심 잘난 척할 기회를 놓친 내 어색함을 덜어주시려는 듯 내게 물었다. 일본이나 미국 프로야구 덕아웃에 노트북을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없었다. 사람들이 하는 게임을 기계를 동원해서 확률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서 덕아웃에 노트북 반입을 금지했다는 것이 <장자(莊子)>에 ‘기계에 의존하는 마음[機心]’이라는 경계가 나오는데, 그 20세기 버전인 셈이다. 얼마 전에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덕아웃에 노트북 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기심(機心)의 21세기 버전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날 대화의 본 게임.

유영구 총재께서는 약간 상기된, 그리고 간곡한 표정으로 최근의 한 사건을 들려주었다. 일은 지난 6월 2일에 터졌다.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의 경기에서 디트로이트의 아만도 갈라라가 투수는 9회말 2사까지 퍼펙트게임을 달리고 있었다. 퍼펙트게임은 9×3=27타자를 포볼/사사구나 안타 없이 완벽하게 처리하는 게임으로, 100년이 넘는 메이저리그(MLB)에서도 20번밖에 없었고, 아직 국내 프로야구에는 기록된 적이 없다. 그러니 한 타자만 잡으면 투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예로운 기록을 얻게 되는 셈. 더구나 그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젊은 투수였다.

그러나 야구는 투아웃부터라고 했나? 마지막 타자가 친 평범한 땅볼, 이어 1루수가 공을 잡았고, 투수인 갈랄라가는 1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갔다. 누구나 아웃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1루심 짐 조이스의 손은 수평으로 그어졌다. 세이프!

1루 세이프 장면 / 항의하는 선수들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야구팬들의 원성이 들끓었다. 백악관의 로버트 대변인도 MLB가 심판의 오심을 뒤집고 퍼펙트게임을 선언하기 바란다고 논평을 냈다. 아무튼 밤새 MLB은 이 문제로 토론을 했다. 3일 오전이 되자 비디오 테이프 판독 결과에 따라서 커미셔너(KBO 총재에 해당)의 직권으로 판정이 번복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다음은 셀릭 커미셔너의 성명서 일부.

“우선 나는 MLB를 대신하여 아만도 갈라라가의 눈부신 피칭을 축하합니다. 갈라라가와 디트로이트 짐 릴랜드 감독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습니다. 나는 또 불우한 처지에 놓여있던 짐 조이스 심판이 정직하게 직접 사과한 용기 있는 행동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앞서 경기 직후, 짐 조이스 심판은, ‘나의 잘못된 판정이 젊은 투수의 퍼펙트게임을 망쳤다. 내 생애 최악의 판정이었다’고 후회했다. 백악관의 성명도 소용이 없었다느니, 투수가 글러브를 팽개치지도 않았다느니, 디트로이트 관중들이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느니, 하는 상투적인 말은 치워놓자. 다만, 갈라라가의 코멘트를 기억해두자. 먼저 짐 조이스 심판의 후회에 대해, 갈라라가는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고 사과를 받아들인다. 또 덧붙인 한마디. ‘논란은 그만 했으면 한다. 지금 누구보다도 힘든 사람은 바로 짐 조이스 심판이다.’ 이 대목에 오면 이 젊은 투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종종 이럴 때 내 나이가 부끄러워진다.

다음 날인 3일.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는 다시 낮 경기를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MLB의 결정에 따라 조이스 심판의 판정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던 바로 그날이다. 그 경기의 구심이 바로 조이스 심판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구심은 포수 뒤에서 스트라잌/볼을 판정하는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조이스 심판에게 하루 쉬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 심판 로테이션은 변경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로테이션을 변경시키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것. 물론 구장으로 통하는 터널을 지날 때 조이스 심판은 관중들로부터 야유를 받기도 했다.

상황은 이때부터 바뀌었다. 보통 MLB는 경기 3시간 전에 오더를 발표한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구장에서 직접 감독이나 코치가 심판진 앞에서 라인업을 교환하는 의례를 갖는다. 디트로이트 릴랜드 감독은 오더 교환을 이례적으로 갈라라가에게 맡겼다. 당연히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갈라라가를 맞았다.

이때 조이스 심판은 홈플레이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라인업 교환을 위해 홈플레이트에 도착한 갈라라가는 조이스 심판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고, 조이스 심판도 곧 덕아웃으로 향하는 갈라라가의 등을 두드리며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이를 본 3만여 관중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날 투수에게 공을 토스한 뒤 퍼펙트게임을 확신하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가 심판 판정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던 1루수 미겔, 갈라라가의 승리를 축하하면서도 퍼펙트게임을 놓친 갈라라가를 안고 위로했던 포수 제럴드, 둘은 경기 뒤 조이스 심판에게 가장 격렬히 항의했던 선수들이었는데, 이날 수비 위치로 가면서 조이스 심판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다른 심판진들도 어깨가 처진 조이스 심판을 하이파이브로 격려했다. 언론은 이 일을 두고, ‘불완전한(Imperfect) 판정이 완벽하게(Perfect) 마무리되었다’고 썼다.

유영구 총재께서는 어떻게 얘기를 끝맺으셨을까? ‘역시 미국은 대단한 나라야!’, 이렇게? ‘선진국 야구수준은 달라!’, 이렇게? ‘스포츠맨십은 이런 거 아닐까!’, 이렇게? 아니, 이렇게! “그 칼럼 연재하는 전북일보에다가 좀 써요. 잘못된 상황을 어떻게 모두가 감동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꾸어 가는지, 그 힘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이런 걸 좀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어. 전북이나 전주에서만이라도, 아니면 전주대학에서만이라도 이런 고민들이 쌓여갔으면 좋겠어. 내가 저작권 따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껄껄껄.

응답 3개

  1. 연초록말하길

    오랫만에 들어와서 마음 후끈하게 달구는 이야기를

    잘 읽고 갑니다.

  2. 단단말하길

    뭔 글일까 들어왔다가 야구얘기에 솔깃했습니다~
    아~잼있게 읽고 갑니다.
    야구 홧팅~!

  3. 이야기캐는광부말하길

    정말 감동적입니다.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심판과 선수의 가슴 짠한 스토리 많이 느끼고 갑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