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박김영희 장애인활동가 “사람등급화에 맞서 싸울 것”

- 은유

박김영희 진보신당 부대표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 김경주 <비정성시> 중에서

생의 윤곽이 흐릿하다.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후 집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4학년 봄소풍, 중학교 입학식, 고등학교 수학여행의 연대별 서사로 생애를 구성할 수 없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을 닮은 내일을 살았다. 스물다섯까지 그랬다. 시간의 강물은 설움으로 엉켰다. 방, 마당, 병원 등 공간과 결합된 몸의 기억들. 분리된 사건과 이미지만 아릿하게 떠오를 뿐이다. 파란색 장애인수첩을 처음 받던 날, 오른쪽 아래께 날짜가 반쯤 지워진 내 인생의 한 컷으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파란수첩, 주홍글씨를 보다

아마 88년, 89년 즈음이다. 동해에 살 때 장애수첩이 생겼는데 집안에만 있으니까 굳이 만들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다가 부산으로 이사하면서 장애수첩을 만들려고 검사를 받았다. 의사가 무릎과 팔을 톡톡 치고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장애수첩을 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는데 나만이 가진 이게, 주민등록증 받을 때랑은 왠지 느낌이 달랐어요.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하는구나. 막연하던 생각이 확인되는 기분이랄까. 그리 유쾌하지 않았죠.”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전입신고를 하면 장애수첩이 자동으로 넘어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게다가 부산에서 장애인증명서 원본이 유실되어 다시 신청절차를 밟아야 했다. 서울에서 검사를 받았다. 의사 앞에 앉으니 어쩔 수 없이 위축됐다. 몇 년 전과 똑같이 물었다. “손 쓸 수 있어요? 발 들어봐요.” 장애수첩이 나왔다. 파란수첩의 주홍글씨는 선명했다. ‘넌 장애인이다’ ‘넌 정상이 아니다’

97년 무렵에 장애수첩이 장애인카드로 바뀌었다. 사진까지 넣은 신분증 형식이다. 그런데 바깥활동이 없다보니 사진 찍는 것도 일이었다. 사진관은 좁고 휠체어는 크고. 주민등록증 사진도 방에서 뒷면에 천을 가리고 찍었었다. 장애인카드에 넣을 사진을 찍긴 찍어야하는데, 주기적으로 요구되는 ‘장애 증명’은 신경이 바늘처럼 곤두서는 귀찮은 일이었다.

요즘, 장애등급재심사를 앞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 때 그 마음의 잉잉거림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가 다르다는 걸 또 확인받아야하는 게 싫다.” 게다가 수치와 비애가 뒤엉킨 감정 차원에서 먹고 사는 현실 문제로 더 절박하고 긴박해졌다. 장애등급 판정에서 1급을 못 받으면 활동보조인서비스도 연금도 못 받는다. 장애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 것이다.

“의사 앞에서 비굴해지는 거죠. 우리끼리 그런 말도 해요. 병원 갈 때 나사 하나 빼놓고 가야한다고.(웃음) 더 중증 장애인처럼 보여야 살 수 있잖아요. 국민건강관리공단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의 몸을 판정한다는 것, 낙인 받는 기분이죠. 왜 그거 있잖아요. 소시장에서 귀에 달아주는 1등급, 2등급 판정 표시……”

비밀의 화원, 세상에 눈 뜨다

박김영희는 61년생이다. 세살 때 홍역, 고열, 소아마비가 덮쳤다. 60년대엔 소아마비가 조류독감이나 신종플루처럼 전염병이었다. 한집에서 두 아이가 소아마비에 걸리기도 했다. 정부가 국민건강을 관리하지 못해서 걸린 병이지만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어보는데 나한테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물어보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면서도 물어봐주지 않아 고마웠는데, 왜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고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닌 것도 몸이 아플수록 배워야 한다는 할머니의 고집 덕분이었다. 엄마는 ‘장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장애를 가진 딸을 마음 아파했지만 만사 제쳐두고 업어서 등하교를 시키는 헌신과 희생은 하지 않았으니까.

강원도 동해시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할머니가 화단을 정성스레 꾸며주었다. 여름 날, 한바탕 소나기 지나가면 마당에는 수국과 장미가 물이 빠져 희끄무레 한들거리고 나무의 잔가지들이 미풍에 살며시 빗방울을 흩뿌렸다. 뜰에 깔린 자갈돌은 막 물을 뿌린 것처럼 젖었으며 하늘은 씻은 듯 파랬다. 해가 쨍 나면 곧장 화단 옆에 돗자리를 폈다. 12년 키운 개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딜 벗어나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꼬릴 흔들며 주변을 맴돌았다. 개를 베고 누워 자다가 귀를 뜯다가 노닥노닥 말을 걸었다. 비스듬한 오후의 햇살이 머리를 쓰다듬고 저물 때까지 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몸이 불편한 아이는 나만의 ‘비밀의 화원’에서 그림책같이 놀았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머리를 빗기고 옷을 단정히 입혀 손녀를 골목길 의자에 앉혀두었다. 사람들 구경하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영희’를 구경했다. 아침나절 동네 할머니가 나와서 옆에 앉아 한숨을 쉬며 며느리 허물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내가 어린 니한테 뭔 소리니…”하면서 자리를 떢다. 오후엔 며느리가 와서 “심심하니?” 말을 걸었다. 시어머니 얘길 하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아이는 가만히 앉아서 한 집안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전해 들었다. 사람 사이 관계를 터득해갔다.

저녁식탁도 이야기가 풍성했다. 1남 4녀 중 맏이다. 부모님은 저녁 먹기 전에 형제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돌아가면서 말하도록 했다. 밥 먹는 시간이 길었다. 동생친구들 누가 싸웠고 상을 받았으며 어느 학교에 갔고 군대 가고 등등 이런 일 저런 일을 소상히 들었다. 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애 있고 경우 바르게 사는 법을 배웠다. “지금도 사람들과 잘 친해지고 공감하는 바탕이 그 때 형성된 것 같다.”

사춘기의 외로움은 어찌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중학교 들어가고부터 동네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를 기다리다가 체념했다. 혼자였다. 집안에 박혀 책을 읽었다. 글을 썼다. 동네 라디오 지역방송에 사연을 보내서 소소히 상품도 탔다. 교도소 재소자에게 편지도 썼다. 하루에 4시간씩 책상에 붙어 꼬박 편지를 썼다. 신문 간지 하나라도 꼼꼼히 챙겨 읽었다. 금성출판사 전집류를 보고 삼촌이 읽던 러시아문학전집을 읽었다. ‘보드카’는 또 왜 그렇게 자주 나오던지. 작고 작은 하얀 벌레가 기어가는 책속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전화상담, 장애여성과 공감하다

스물다섯 어느 날, 비밀의 화원을 나왔다. 영세를 받고 천주교 장애여성기도공동체를 알게 되어 부산으로 갔다. 장애여성들을 만났다. 비장애인에 의해 관리되는 장애인은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공동체를 이끌었다. 혼자 서는 주체적 삶과 장애운동의 필요성을 알았다. 95년 장애여성운동단체 ‘빗장을 여는 사람들’에서 운동가로 첫 발을 내딛었다. 25년간 시냇물처럼 고요하던 삶이 격류에 휩싸였다.

“처음 장애인 여성모임에 갔는데, 다들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고 와, 대단해요. 그들만의 리그가 있더라고요. 나는 라이벌이나 경계대상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전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했어요. 가장 단순한 전화 거는 일이었죠. 전화로 많은 일 했고, 장애여성들의 의견에 공감하다보니 나는 그들의 아픔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죠. 어느 순간 조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고요.”

내남없이 장애-여성의 현실은 매우 척박했다. 그러나 여성계에서 그것은 장애인 문제라고 치부하고 장애계에서도 그것은 여성문제라고 외면했다. 남성 중심의 운동판에서 싸움의 방식도, 현실을 말하는 방식도 버거웠다. 아무도 말해줄 수 없는 우리 이야기를 직접 하자며 97년 장애여성운동단체 ‘공감’을 만들었다. 단지 장애인일 뿐 아무도 여성으로 보아주지 않는 세상에 ‘장애여성’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냈다.

차별과 배제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투쟁과 활동이 거셌다. 살면서 온몸으로 느낀 억압적 현실은 그대로 주장이 되었다. 말하는 순간 자유가 되었다. 장애인 이동권 싸움과 활동보조인 싸움에서도 가장 먼저 철로에 눕고 가장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저항했다. 장애여성들이 흉금을 터놓는 둘도 없는 언니에서 엄마가 되어간다. 박김영희는 현재 ‘공감’ 대표이자 장애인이동권연대 공동대표, 진보신당 부대표를 맡고 있다.

등급제, 장애를 경쟁하다

지난 7월 21일 국회도서관에서는 ‘장애등급제의 문제점 진단과 복지전달체계 대안모색을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답답했다. “정부는 등급제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만 장애인등급제가 있다. 다른 나라에선 장애인의 개별적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복지가 제공된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예산’을 문제 삼는다. 장애인에게 복지선택권을 맡기면 엄청난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또 예산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 가짜 장애인을 골라내겠다고 벼른다. 이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의료보호대상자의 가짜 수혜자를 골라내겠다는 것, 무상급식을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만 선별해서 주자던 것과 똑같은 논리다. 정부는 항상 가짜를 빼고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며 ‘효율성’을 외친다. 이는 투입대비 산출의 극대화만 따지는 신자유주의 논리로 “사람이 없는 정책이다.”

장애인등급제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첫째 생존권 박탈이다. 지난 2007년 복지부가 장애등급 재심사를 실시한 결과 장애등급이 올라간 사람은 0.4%인 반면 내려간 사람은 36.7%였다. 정부가 추산하는 가짜 장애인은 5%인데, 그들을 골라내기 위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의 복지, 즉 활동보조서비스와 장애인연금을 등 생존 근거를 박탈하는 것이다.

둘째 경쟁 조장이다. 정부의 보편복지가 아니라 선별복지 체제에서는 ‘누가 더 장애가 심하느냐’를 따져야한다. 장애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남보다 더 비참해져야 한다. 다른 장애인을 눌러야 내가 산다. ‘쟤 땜에 내가 못 받는다’ ‘저 사람은 나보다 경증이다.’ 등등 서글픈 경쟁을 부추긴다. 원망의 화살은 정부가 아니라 장애인 서로를 향한다.

“장애라는 게 개인적인데 하나의 범위로 묶잖아요. 어떻게 사람 몸을 의료적 기능적으로만 판단해요. 내가 걸을 수 있느냐, 밥 먹을 수 있느냐, 화장실 가느냐도 달라요.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는 화장실 갈 수 없지만 집에서는 갈 수 있어요. 내 몸이 어떤 환경과 조건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데도, 전문가들이 정한 자로 재서 획일적으로 적용해서는 판단해선 안 되죠.”

주차요금할인, 비정상을 증명하다

그는 한 달에 180시간 활동보조인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진보신당 부대표로서 지방 출장이나 대외행사가 잦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다행히 나머지 부분은 당에서 배려해준다. 이렇듯 일하는 장애인, 학령기 장애인, 탈시설인 등 환경과 조건에 따라 서비스의 요구는 다를 수 있다. 또 한 사람의 욕구도 살면서 변화된다. 이 엄연한 차이, 삶의 순리가 정부의 정책에는 무시된다.

“일괄적인 장애등급 적용이 아닌 장애인 당사자의 기본권 확보 차원에서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판정 체제로의 전환해야 합니다. 가령 필요한 게 있다면, 내 몸에 맞는 휠체어를 상담을 통해서 구입하고 어디가 불편하면 의사 만나서 상담하고 판단에 따라 치료받고 보조기구 구입하고, 자연스러움에 따라야 해요. 장애는 결코 보여 지는 것만으로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장애인을 ‘비정상인’으로 묶어놓죠. 그들은 낙인하고 우리는 증명하고 표를 내야 해요. 공영주차장에서 다만 몇 백 원이라도 적게 내려고 카드 내보이면서도, 이렇게 해야 하나 싶어요. 외국에서는 주차요금을 낼 만큼 더 많이 보조해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별이 없어요. 국민들이 볼 땐 장애인이 엄청 많은 혜택을 받는 것 같죠. 자동차 살 때 면세되고 전기료나 전화요금 할인 받는 것들. 그런데 매번 ‘장애인’ 확인받는 거, 유쾌하지 않아요.”

소수자, 연대를 모색하다

장애인등급제 철폐. 그런 때가 오겠지, 막연했는데 “지금이 해야 할 때”라고 그는 말한다. 아마 큰 싸움이 될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정부도 예산도 아니고 장애인들이다. 정부가 그러하듯, 장애인 스스로도 등급제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억압과 차별이 길었던 탓에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과 용기를 잠식당했다. 내면화된 장애인등급제. 사유의 전환이 없다면, 절실함이 없다면 넘기 힘든 ‘벽’이다.

“사람의 등급화가 자연스럽게 여겨지죠. 만약 재심사 받은 사람들은 장애등급이 떨어지면 올리는 걸 생각하니까 장애등급제 자체의 문제가 선명해지지 않아요. 그런데 장애등급제 문제제기는 중요해요. 우리 안에서부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그 낙인이 규정되고 차별이 사람 사이에 높고 낮음 만들고 있어요. 이는 장애등급제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등급화’ 하는 문제로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대가 중요할 것 같아요.”

래디컬radical ‘근본적인, 과격한’ 이라는 뜻이다. 본디 근원에서 사유하는 사람은 과격하다. 전체에서 파악하고 문제의 원인을 뿌리까지 파고들어 거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그에게 ‘과격하고 까다로운 장애인’ 혐의는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가 장애인등급제 철폐 싸움에서 연대를, 소수자 연대를 말하게 된 계기가 있다.

장애운동을 하면서 다른 소수자의 삶을 접했다. 성적 소수자의 경우 그들의 아픔조차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다. 장애여성이 마냥 피해자만이 아니고 이성애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더 키우려고 노력했다.” 비정규직, 장애인, 성소수자, 극빈층 등 정상의 척도에서 제외된 자들, 이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은 삶의 뿌리에서 맞닿아 있음을 보았다.

“우리가 장애인 이동권 싸움할 때 지하철 점거했는데,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너희들 그러면 동정도 못 받아!” 그런데 저희가 싸워서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졌어요. 그 때 비난하던 할아버지들이 지금은 잘 타고 다니잖아요. 등급제 싸움도 결코 장애인의 일만은 아닐 겁니다.”

공공장소 경사로에는 휠체어와 유모차가 다니고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거동이 불편한 임산부와 어르신이 한 줄로 서있다. 우리가 일회용 종이컵을 쓰지 않을 때는 비정규직도 없었다. 학교에선 성적에 따라 기업에는 연봉에 따라 사람에게 서열과 등급이 매겨진다. 장애등급제와 대학서열화는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세상에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적어지는 것이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김현)이라고 할 때 그가 말하는 ‘소수자 연대’는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절반의 성공, 삶을 만들어가다

오는 가을, 그는 진보신당 부대표직에서 물러난다. 일반당원으로 돌아가 장애인운동 열심히 하고 글을 쓰며 지낼 생각이다. 장애여성운동은 평생 가져갈 일이고, 단기적으로는 등급제폐지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산 너머 산. 또 다시 큰 산을 향해 휠체어 방향을 틀면서도 그의 말하는 표정은 강물처럼 담담하다. 그저 내공의 힘일까. 그는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이라는 삶의 슬로건을 제시한다.

“뭐든 선택할 때 전부 얻을 수는 없는 거 같아요. 다 가지려 하지 않고 절반만 성공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손도 비어야 뭘 잡을 수 있잖아요. 절반의 실패는 곧 절반의 성공이다.”

‘삶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안주하려는 자신이다. 경험으로 자기를 고집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늘 애쓴다. 그런 점에서 장애여성학교 ‘공감’에서 글쓰기와 퀼트를 함께 가르치며 장애여성들과 보내는 시간이 퍽이나 소중하다. 또 노들야학에서 수유너머 식구들과 함께 하는 푸코세미나도 신선한 자극이다. “<비정상인들>은 말이 너무 어렵지만 재밌고 와 닿는다.”

어느 덧 50대다. 20대 초에 존재감이 없어서 죽음만 생각할 때도 있었고, 30대 초반 스스로가 길바닥에 풀풀 날리는 휴지 같아 괴로웠다는 그. 10년 간격으로 죽음과 다퉜다. 기나긴 고독과의 싸움에서 부당한 권력과의 투쟁으로 양상은 바뀌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방황하고 상처받고 부딪치고 좌절하고 일어서고 저항했다. 그러는 사이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삶의 기술이 늘었다. 사람 눈에 맞춰진 나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 나답게 사는 법을 익혔다.

박영희에서 박김영희로, 장애인에서 여성장애인으로. 작고 희미하던 존재는 맑고 향기롭게 본성을 꽃피웠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꿈을 묻지 않았던 유년시절과 달리, 지금은 모두가 그에게 꿈을 묻고 희망을 본다. 외려 “자판기처럼 발언이 나와서 걱정”이라며 깔깔 웃는다. 적합한 비유다. 누구에게라도 따끈한 차 한 잔, 시원한 청량음료 같은 이야기로 공감하고 치유하는 그를, 동료시민 박김영희를, 우리는 삶의 장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응답 2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lizom. lizom said: http://suyunomo.jinbo.net/?p=5154 장애인 등급제 폐지하고 개별 복지서비스 항목별로 장애 정도를 등급화하라 […]

  2. 말하길

    요즘 자주 뵐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푸코 세미나 하면서 푸코보다 오히려 선생님에게 더 많은 걸 배워요. 빨리 세미나 돌아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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