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천국의 속삭임>, 혹은 감각의 민주주의

- 황진미

<천국의 속삭임>은 현존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음향감독 미르코 멘카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2008년 함부르크영화제 최우수어린이영화상을 수상하였다. 1961년생 미르코는 8살 때 총기 오발 사고로 시력을 잃는다. 시각장애인에게 일반학교 교육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 법에 따라 미르코는 부모님과 떨어져 제노바의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에 입학한다. 가톨릭 기숙학교인 타소니는 시각장애인 학생들에게 직조기술과 배전기술 등 직업교육을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처음 약간의 시력을 가지고 있던 미르코는 점자판을 팽개치는 등 그곳의 교육을 거부하였지만, 비장애인 소녀 프란체스카와 선천적인 시각장애 소년 펠리체 등과 사귀면서 그곳 생활에 점차 익숙해진다. 프란체스카와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 도심의 시위 현장에도 나가보고, 한 번도 색깔을 본적 없는 펠리체에게 색깔의 느낌을 설명해주면서 그는 감각을 넘어선 교류에 점차 눈떠간다. 그는 친구들과 녹음기에 소리를 담아 과제를 제출하지만, 교장은 학교 기물인 녹음기를 함부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징계한다. 학교가 학예회 연극 ‘성모님의 달’을 준비하는 동안, 미르코는 연극연습에서 배제된 아이들과 함께 라디오 방송극 ‘백조의 왕자’를 녹음해나간다. 그러나 교장은 미르코를 퇴학시키려 하고, 그동안 미르코를 지지해왔던 담임 신부는 교장과 맞서 싸운다. 마침내 지역주민과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교장을 퇴진시키고, 미르코의 작품은 부모들에게 공개된다. 학예회 장, 부모들에게 안대가 지급되고 눈을 가린 비장애인들에게 시각장애인들이 만든 판타지 청각드라마가 시연된다. 영화는 1975년 정부가 장애인 교육법을 개정하여 일반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미르코는 16살에 타소니 학교를 떠나 이후 음향감독이 되었음을 자막으로 싣는다.

영화는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장애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첫째, 학예회 장면에서 보듯이 ‘비장애인 중심의 장애 극복’이 아닌 ‘장애인 중심의 감각 재편’이 절실하다는 것, 둘째, 교장과 담임 신부의 논쟁에서 보듯이 장애인의 교육과 노동에 관한 재사유가 필요하다는 것, 셋째, 마지막 시위 장면과 자막에서 보듯이 장애인 운동의 성공을 위해 지역사회와 노동계 등 다른 운동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것 등이다.

학교는 해마다 비장애인 부모를 모셔놓고 비장애인 교사가 짠 동선에 입각하여 반복 훈련시킨 연극을 공연했을 것이다. 그리고선 ‘앞이 안보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인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했다’는 품평을 최고의 찬사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장애는 흠결이기에 가능한 가려지고 극복되어 ‘정상인에 가깝게 흉내 내는 것’이 지상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시각장애인은 완벽하게 소외당한다. 오직 비장애인들에게 보이기 위한 공연에 동원될 뿐이며, 스스로 감상하거나 평가할 수도 없다. 그들을 연습시키고 감상하는 주체는 모두 비장애인들이요, 평가의 기준 역시 비장애인들이 쥐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눈을 가리고 청각에만 의존하는 방송극을 들을 때 시각장애인들은 실제로 장애(disable)이 없다. 오히려 가장 청각이 예민한 자들이며, 그들의 청각적 감수성은 상상력과 결합하여 가장 멋진 판타지 물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다른 능력을 지닌 자’들로, 창작의 주체이자 감상의 주체가 된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모두가 갑자기 눈이 먼 상황에서 원래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이들이 월등한 능력을 갖춘 자로 활약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 장애는 신체적 능력 유무를 규정하는 의료적 개념이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를 일컫는 정치적 개념이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하게끔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 중심적 감각체계를 재편하여 시각장애인들이 다른 감각을 활용하여 소통하게끔 사회적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 추구되어야 한다. 청각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학교 교육에서 수화를 제2외국어처럼 배운다면 청각장애인은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처럼 취급될 것이다. 그런데 왜 독일어는 가르치면서 수화는 가르치지 않는 걸까? 평범한 시민이 독일인을 만날 확률보다 청각장애인을 만날 확률이 더 많지 않은가?

영화는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장애인 교육과 노동에 관한 정책과 관념을 담고 있다. 1975년 비로소 장애인들의 일반학교 교육이 허용되었다고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어떨까? 1994년 통합교육이 법으로 명시되었지만, 일반고등학교의 특수학급 설치율이 38.3%에 불과하고, 그 결과 학령기 장애 아동의 25.4%만이 학교를 다니고 있고, 장애인의 45.2%가 초등학교 졸업이하의 학력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 교장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장래희망은 사치이고, 최소한의 자립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화는 교장의 주장을 극복해야 할 편견으로 다루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교장의 말 만큼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의 전체노동가능 인구 중 34.1%만이 취업하였으며, 이들의 소득은 전체 상용 종업원의 임금의 44%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장애인이 고용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은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의 노동권 주장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노동, 그것도 이윤을 창출하는 노동 능력만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자본주의적 가치체계에 의문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교장의 강퍅한 주장을 돌파하고, 복지마저 노동 능력과 연결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항하는 길일 것이다.

영화에서 타소니의 교장은 지역민들의 시위와 타소니 출신 제철소 노동자들의 용광로를 폐쇄하겠다는 협박에 힘입어 퇴진하고, 통합교육 법안이 통과된다. 실제로 유럽의 70년대는 68혁명의 여파로 장애인 차별 철패 운동이 급신장한 시기였다. 우리사회의 장애인 교육시설 문제는 훨씬 악질적인 형태로 현재 진행형이다. 1996년에 터져 나온 에바다 농학교 비리는 7년간의 투쟁 끝에 2003년에야 마무리되었지만, 그 후로도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공지영의 소설<도가니>로도 다루어졌다)등 수많은 비리사건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싸움들을 계기로 지역민들과의 연대투쟁의 경험들이 축적되고, 장애인 운동을 담당할 진보적인 장애인 주체들이 키워지고 있다. <천국의 속삭임>이 그저 감동적인 장애인 영화, 혹은 어린이 영화로 소비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대의 이탈리아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장애를 둘러싼 투쟁이 훨씬 첨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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