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영화, 수다, 우정

- 풍경지기 박혜숙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대책 없이 해피엔딩』, 김연수, 김중혁, 씨네21북스

“그 책, 엄청 재밌어. 영화 이야기보다도 두 남자의 수다가 더 재밌어. 아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지 못할 걸.”

평소 존경하는 선배교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7년 째 독서모임을 함께 하고 있는 선배교사였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시절에는 함께 책을 읽었다. 내가 읽은 책 중 좋았던 책을 그녀에게 빌려주었다. 얼마 뒤 그녀가 그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학교 정원에서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국어교사, 그녀는 지구과학교사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문과적 사고와 이과적 사고가 만나 어우러지는 기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닮아갔다. 나는 이전보다 이성적 사유를 하게 되었고 그녀는 감성적 사유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이런 변화를 보면서 한참 웃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 책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표현했다.

『대책 없이 해피엔딩』은 현재 문단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소설가 김연수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김중혁이 서로 번갈아 쓴 영화관람기이다. <씨네21>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연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나는 책 광고에서 ‘김연수’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책을 구입했다. 그 후 다른 책들을 읽느라 잠시 미뤄두었었는데 그녀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조바심이 났다. 그 책을 읽고 싶은데 책은 나를 잠시 떠나 있었다. 지난 한 주 동안 연수를 받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며 그 책을 내 옆자리 선생님께 빌려주고 왔기 때문이었다. 가끔 책을 빌려 드리곤 하는 선생님이었는데 그날은 마음 가볍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빌려달라고 하셨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빌려드렸었다. 일주일이 지루하게 지나간 후에야 나는 그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쉬는 시간에 복도를 걸으면서도, 혹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잠시 동안의 시간에도 나는 혼자 키득키득거리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책은 편안했다.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주는 편안함이었다. ‘희망찾기’라는 공부모임에서 두해 전에 고병권 선생님을 모시고 강연회를 열었다. 나는 울산에 도착하신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갈 때마다 인사를 드리긴 했지만 아직 편안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날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상하게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나보다. 갑자기 나에게 출생년도를 물으셨다. 이런 세상에, 나와 동갑이었다. 워낙 깊이있는 사유를 하시는 분이라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선생님께서는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일한 세대 경험 때문이었구나. 서로 태어난 고향이 다르고 자라난 곳, 공부한 곳이 다른데도 동일한 세대 경험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편안했다. ‘내가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김연수와 김중혁은 나와 거의 같은 또래였다. 두 사람의 수다 중 상당 부분은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부모님 세대의 ‘왕년에는…….’ 시리즈는 아니었다. 부모님 세대의 ‘왕년에는…….’ 시리즈에는 당신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그 시간은 너희 같은 젊은 세대는 견디지도 못했을 시간이라는 자부심이 녹아있다. 그러나 이 자부심이 오히려 부모님 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 책은 그런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시절의 이야기부터 현재의 이야기까지,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풀어낸다. 그리고 그 언어들이 무척 유쾌하다. 유쾌하게 웃다보면 ‘아, 맞다. 그 시절에 우린 그렇게 지냈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보낸 시간을 찍은 사진 속에 내 사진만 잘라 붙인다면 아무도 그 자국을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유머는 저절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의 고향은 경북 김천이었다. ‘어’와 ‘으’ 발음이 곤혹스러운,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곳이었고 선거철만 되면 한 가지 목소리 일색인 곳이었다. 나의 고향 경남 마산도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였다. 그 두 사람이 수다를 떠는 자리에 내가 가만히 앉아 듣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 영화관람기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 이야기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읽으면 아마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것이 장점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텍스트로 다루고 있는 책들 대다수는 좀더 진지하고 무게있게 영화를 다룬다. 깊이있는 사유를 할 수 있지만 그 방식이 가지는 단점은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경우 흥미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보다 우월한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영화를 설명하고 있구나 하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책은 영화 이야기를 가볍게, 편안하게 풀어낸다. 어떤 글은 영화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마중물 정도의 역할에 그친다. 영화 이야기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자리잡는다.

고향 친구와 함께 자란,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지난 시절들이 반짝이며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짐자전거에 묶여 영화를 보러 가던 김중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어린 시절 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무서워하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두 친구가 함께 ‘소설가’라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어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영화 잡지사에 응시하여 실패했던 김연수의 이야기와 또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던 김중혁의 이야기 속에는 교원임용시험에 실패한 후 여기저기 서류를 제출하던 아픈 시간이 떠올랐다. 그들이 나누는 수다 속에서 내 삶은 유쾌하게 복원되었다. 아팠던 시간도 그들의 유쾌한 대꾸 속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떠올릴 수 있었다.

그보다 더 값지게 와닿는 것은 그들이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서로 구박을 하면서 나누는 대꾸 속에 그들의 우정이, 그들의 시간이 참 잘 갈무리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글로 수다를 떨었으면 좋겠다. 책을 함께 읽고 수다를 떨면서 우리가 함께 살아낸 시간들을 채워가면 좋겠다. 그러면 각자의 삶이 만나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나가지 않을까? 이 책이 그런 꿈을 가지게 만들었다.

응답 3개

  1. 동그래미말하길

    풍경지기님~ 밥 먹고 연구실 뒤에 있는 남산산책에서의 ‘수다’도 강추합니다~

  2. 박혜숙말하길

    숲님, 감사합니다.
    저는 태화동에 근무하다가 올해 다운동으로 옮겼어요.^^
    이곳에서 가까이 생활하고 계신 분을 만나니까
    정말 반갑네요.

    부족한 글, 따뜻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3. 말하길

    혹시 저번에 중앙고 유도부 아이들 글을 쓰신 선생님이신가요?
    제가 태화동 살아서 반가운 마음에…
    샘님글 맘이 따뜻해지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희망을 보았거든요.
    감사한 마음… 따뜻해진 마음… 전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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