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미의 시경읽기

따스한 남풍이 남쪽에서 불어와

- 정경미

凱風自南 吹彼棘心 따스한 남풍이 대추나무 새순에 불어와
개풍자남 취피극심
棘心夭夭 母氏劬勞 대추나무 새순 싱그러우니 어머니 수고가 많으셨네
극심요요 모씨구로

凱風自南 吹彼棘薪 따스한 남풍이 대추나무 가지에 불어와
개풍자남 취피극신
母氏聖善 我無令人 어머니는 훌륭하신데 우리 중에 그런 아들 없네
모씨성선 아무령인

爰有寒泉 在浚之下 맑은 샘물이 준고을 아랫녘에 흐르네
원유한천 재준지하
有子七人 母氏勞苦 아들 칠형제를 두셨으니 어머님 노고가 많으셨네
유자칠인 모씨노고
睍睆黃鳥 載好其音 아름다운 황조가 고운 소리로 지저귀네
현환황조 재호기음
有子七人 莫慰母心 아들 칠형제가 있으나 어머님 마음 위로해 드리지 못하네
유자칠인 막위모심

-「개풍凱風」

시경 패풍邶風에 나오는 「개풍凱風」이라는 시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한 뒤, 주紂의 아들인 무경武庚(녹보祿父라고도 함)으로 하여금 은허殷墟에서 상나라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전 왕조의 후손과 유민들을 말살하지 않고 배려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는 반란의 싹을 남겨 놓는 일이어서 무왕을 불안하게 하였다. 그래서 무왕은 아우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곽숙霍叔을 이 무경이 다스리는 지역에 파견하여 은나라 잔존 세력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무경이 다스리던 곳을 패邶(주나라 도읍의 북쪽), 관숙이 다스리던 곳을 용鄘(주나라 도읍의 남쪽), 채숙이 다스리던 곳을 위衛(주나라 도읍의 동쪽)라 불렀다. 이들을 ‘삼감三監’(세 군데 관리지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후에 무경은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을 대신해 섭정을 한다고 관숙, 채숙, 곽숙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성왕은 이들을 평정하고 강숙康叔을 위衛 땅에 봉하면서 패와 용 지역까지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패와 용의 국경은 불분명해지고 이 지역을 통틀어 위衛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패邶 · 용鄘 · 위衛 삼풍이 사실은 모두가 위풍衛風이라고 할 수 있다.

모시서毛詩序에서는 이 시를 ‘효자를 기린 시’라고 하였다. ‘모시毛詩’란 ‘모공毛公’이라는 사람이 편집하고 해설한 시경을 뜻한다. 시경은 일찍이 공자孔子가 구전되는 시가 중에서 삼백여 편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런데 이 시경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졌을까? 한漢나라 초기 신배공申培公과 원고생轅固生, 한영韓嬰이 금문今文으로 된 시경을 전했다. 이를 ‘삼가시三家詩’라고 한다. 그러나 금문으로 된 이 삼가시는 유실되어 송대宋代 이후에는 고문古文으로 된 모시毛詩만이 전해진다. 이 모시의 편집자가 바로 모공毛公이며 모공이 전하는 시경을 ‘모시毛詩’라고 한다. 모공毛公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한 연대와 이름은 알 수 없다. 모시에는 각 시편마다 서序를 달아 시의 대의大義를 설명하고 있다. 송대宋代 이전에는 대체로 모시서의 풀이를 따랐는데 구양수歐陽脩 이후 정초鄭樵의 『시변망詩辨妄』, 주희의『시서변설詩序辨說』이후에는 모시서를 참고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개풍은 효자를 예찬한 시이다[凱風 美孝子也]” (모시서毛詩序) 이 시는 전체적으로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크고 은혜로운데 자식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개풍凱風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다. 시경에는「북풍北風」이라는 시도 있고, 「곡풍谷風」이라는 시도 있다. 북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사나운 바람으로 위衛나라의 학정을 상징한다. 곡풍谷風은 동풍東風이다. ‘곡谷’은 ‘곡穀’과 통용되는 말로서 ‘곡풍’은 곡식을 자라게 하는 고마운 바람이다. 그런데 「곡풍谷風」에서 동풍은 북풍보다 사납다. 동풍처럼 부드러워야 할 부부 사이가 그렇지 못하여 소박맞은 조강지처가 남편을 원망하는 시이다.

「개풍凱風」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처럼 은혜로운 어머니의 사랑, 그러나 이에 온전히 보답하지 못하는 자식들이 스스로를 자책하는 시이다.

凱風自南 吹彼棘心 따스한 남풍이 대추나무 새순에 불어와
棘心夭夭 母氏劬勞 대추나무 새순 싱그러우니 어머니 수고가 많으셨네

凱風自南 吹彼棘薪 따스한 남풍이 대추나무 가지에 불어와
母氏聖善 我無令人 어머니는 훌륭하신데 우리 중에 그런 아들 없네

이 시에서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은 짝을 이루면서 대조된다. 어머니의 사랑이 남풍으로 표현되고 있다. 대추나무 가지에 살랑살랑 불어와 새순을 돋게 하는 따스한 남풍. 이 남풍은 대추나무 ‘새순[心]’에 불어왔다가 대추나무 ‘가지[薪]’에 불어오는 것으로 변주된다. 따스한 남풍이 불어와 대추나무 새순을 돋게 하고 가지를 자라게 하는 것. 이런 어머니의 은혜로운 사랑을 ‘어머니 수고가 많으셨네’라고 감사하고 예찬한다. 나뭇가지 끝에 새순이 돋아나는 것을 ‘심心’이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딱딱한 껍질을 뚫고 돋아나는 여리고 싱그러운 새순이 바로 마음이다. 부드럽지만 강하다.

爰有寒泉 在浚之下 맑은 샘물이 준고을 아랫녘에 흐르네
有子七人 母氏勞苦 아들 칠형제를 두셨으니 어머님 노고가 많으셨네

睍睆黃鳥 載好其音 아름다운 황조가 고운 소리로 지저귀네
有子七人 莫慰母心 아들 칠형제가 있으나 어머님 마음 위로해 드리지 못하네

앞에서 개풍으로 비유되던 어머니의 사랑은 이제 마을을 적시는 ‘맑은 샘물[寒泉]’로 표현되고 있다. ‘바람’으로 표현되던 어머니의 사랑이 ‘물’로 변주되다가 이윽고 마지막 구절에 가서는 ‘아름다운 새소리[載好其音]’로 표현된다. 눈 튀어나올 현睍. 눈 휘둥그레질 환睆. 현환황조는 눈 튀어나오고 눈 휘둥그레질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새를 말한다.

이 마지막 구절을 주희朱熹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황조도 오히려 그 소리를 아름답게 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데, 우리 일곱 아들들을 홀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言黃鳥猶能好其音以悅人 而我七子 獨不能慰悅母心哉]” 즉, 새들은 아름다운 소리로 은혜에 보답하는데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렇게 위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따스한 남풍에 대한 보답으로 대추나무 새순이 싱그럽게 돋아나고 힘껏 가지를 뻗는다. 새들은 공기 한 모금 이슬 한 방울 마시고도 고운 소리로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보은報恩은커녕 배은망덕背恩忘德을 자행하지 않는가. 이렇게 자신의 불효를 탄식하고 있으니 이 시는 ‘불효자의 노래’인 동시에 ‘효자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의 불효를 아는 불효자는 오히려 효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간명하다. 어머니와 자식을 대조하면서 보은報恩하자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 효도하라는 거지? 알겠다 알겠어! 그런데 이 시는 읽을수록 고리타분한 도덕으로 느껴지지 않고 새로운 울림을 준다. 그건 뭘까?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보면 ‘조병수’라는 인물이 나온다. 조준구의 아들. 심성이 맑고 고우나 곱추라 수모를 당한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손재주가 있어 나중에 소목장이로 성공한다.

장년이 된 병수에게 어느 날, 늙고 병든 아버지 조준구가 찾아온다. 최참판 가 재산을 다 떨어먹고 일제 앞잡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온갖 몹쓸 짓을 다 했던 조준구. 아들에게도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내가 너 어릴 때 독선생 들어앉혀서 가르쳤으니 네가 이렇게라도 사는 게야. 애비 없는 자식 어디 있으며 뿌리 없는 나무 어디 있다더냐. 걸핏하면 ‘병신자식’이라고 욕을 하고. 호의호식 보약이다 뭐다 해서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은 몇 번이나 물리면서 아들의 살림을 거덜 내려 든다. 보다 못해 손자나 자부가 항의를 하면 눈 흰자위를 허옇게 드러내며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아온다.

집에서 부리는 여자아이나 아낙에게 추잡하게 굴어서 집안 망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일하는 사람이 집에 붙어나질 못한다. 중풍 앓는데 좋다는 약, 별의별 걸 다 구해 오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막힌 것은 ‘송장 썩은 물’을 구해 오라는 것. 또 한 번은 병수가 오물을 치우려고 방에 들어갔을 때 대변을 거머쥐고 있다가 아들 면상을 향해 던진 일도 있다.

이때 병수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퍼서 운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아버지가 가엾고 측은하여 통곡을 한다. 이런 병수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목련존자’라고 한다. 간악한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끝내 악한 본심을 돌이키지 못해 어머니를 위해 울었던 부처님의 제자 목련존자와 같은 자비심을 병수가 가졌다는 것.

효자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이야기는 아마 순舜임금의 이야기일 것이다.

요순시대를 태평시절이라고 한다. 요堯임금은 무위無爲의 정치를 했다. 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정치. 그래서 요임금 때 어떤 농부가 땅바닥에 막대기를 두들기며 불렀다는 노래 ‘격양가擊壤歌’를 보면 “내 밭을 갈아서 먹고 내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요임금은 백성들이 저마다 능력을 다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왕 노릇을 하기가 사실은 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요임금은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그릇도 안 되는 이에게 왕위를 맡겨서 제대로 못 하면 자기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다. 요임금에게 왕은 ‘권력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리더’였던 것이다.

공동체의 진정한 리더를 찾아서! 요임금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마땅한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간혹 찾아도 “왕이 되어 주시오” 부탁을 하면 손사래를 휘휘 저으며 달아나곤 했다. “나한테 왜 그런 궂은 일을 시키는 거요!”라고 하면서. 헐! 왕 자리가 ‘궂은 일’이라니! 오랜 동안 학살자에게 수난을 당해온 역사의 우리들로서는 뜻밖이다. 그러나 고대 성왕들에게 왕은 높은 곳에서 떵떵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천하를 위해 뼈빠지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시절을 태평성대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찾아다니다 요임금은 순舜을 만났다. 사람들이 모두 손사래를 저으며 달아나는 궂은 일-왕위를 순은 선뜻 맡았다. 그것은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는 순임금의 어리숙한(?) 성품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요임금이 순을 믿고 왕위를 맡긴 건, 순이 효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순의 아버지 고수瞽叟는 눈이 멀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다’는 상징적인 뜻도 된다. 진실을 올바로 보는 지혜가 없다는 뜻. 뺑덕어미에게 속는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가 그러하듯, 고수는 새아내의 간계에 동조하여 여러 번 착한 아들 순을 죽이려 한다. 창고에 올라가서 흙을 발라라 하고는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지른다. 하지만 순은 두 개의 삿갓으로 불길을 피해 창고에서 뛰어내려 도망친다. 우물을 파라 하고는 흙을 퍼부어 우물을 메워 버린다. 그러나 순은 몰래 파놓은 비밀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이렇게 어리석은 아버지 때문에 번번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순은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다한다. 자식이 잘못하면 때려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간악한 부모를 섬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순은 간악한 부모조차 덕으로 교화시켰다. 눈 먼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다면 만백성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민간의 한갓 이름 없는 홀아비에 불과했던 순을 요임금이 후계자로 선택한 이유이다.

순이 하는 모든 일은 순조롭다! 순이 가서 뭘 어떻게 한 게 아닌데, 그 자리에 순이 있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다. 때 맞춰 비가 오고, 나무에 싱그럽게 물이 오르고, 곡식이 알차게 여물고, 마을의 다툼이 바로잡히고, 짐승들의 눈빛이 유순해진다. 봄은 가장 봄답게 하고, 가을을 가장 가을답게 만드는 사람.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었고, 일이 있어 그를 찾으면 순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 사마천은 순을 이렇게 표현했다.

효孝는 모든 덕德의 시작이다.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선양한 것은 순이 효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효자라는 것은 순이 단순히 그의 부모형제에게 도리를 다했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간악한 부모형제에게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은 만백성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옛날 사람들에게 효도孝道는 인륜人倫의 시작이자 천리天理와 통하는 덕德이었던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지만물의 순환 또한 원활하게 할 수 있다. 효자는 어진 군주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진 군주의 이름 앞에는 ‘효孝’ 자를 붙였다. 효경제孝景帝, 효문제孝文帝, 효무제孝武帝 등등과 같이.

효孝는 구시대의 고리타분한 도덕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새로운 윤리이다. 현대인은 고독하다. 관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스승도 없고 친구도 없다. 치열한 생존 논리 속에서 싸워야 할 경쟁자만이 있을 뿐이다. 맹목적인 ‘자본’의 가치에 ‘관계’가 파괴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부모 형제 관계는 있지 않느냐고? 혈육도 능동적으로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관계이지 당연히 주어진 관계는 아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면서 서로의 목을 조이는 애증관계. 수동적으로 주어진 관계로만 받아들일 때 혈육만큼 끔찍한 구속은 없다.

대추나무 새순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따스한 남풍처럼. 마을을 적시는 샘물처럼. 넉넉한 은혜에 고운 소리로 화답하는 새처럼. <효孝>는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생명의 윤리로서 우리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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