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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파울로 – 고집스러운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가 사는 법

- 은유

<전선인터뷰- 미셸파울로 이주노조위원장>

그가 중환자실로 간 까닭은

‘G20을 빌미로 한 단속추방 중단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간 미셸 파울로(39) 이주노조 위원장. 그는 단식 12일째에 토혈증세로 병원에 실려 갔다. 중환자실에서 응급조치를 마치고 다음날 일반병동으로 옮겨야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는 트랜스젠더다. 서류상 여자로 표기된 그에게 병원 측은 여자병동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현재 남성호르몬을 투여 중인 그는 남자병동을 원했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다 결국 타협하지 못하고 중성지대인 중환자실에 이틀 더 머물렀다.

고집스러운 미셸. 그는 어릴 때부터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였다. 이웃 사람이 자신과 형제들과 차별할 때도 뒤돌아 울기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못 말리는 고집쟁이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아버지도 아프고 형도 아팠다.” 돈을 벌기 위해 5년 전 필리핀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이 공장 저 공장에서 ‘사장님’의 부당한 차별과 학대를 경험했다. 견딜 수 없었다. 순한 노예가 되길 원했던 그들에게, 나쁜 이주노동자는 본성을 드러냈다. 조목조목 따졌다. 개인적인 저항으로는 한계를 느끼고는 2007년 이주노조에 가입했다. 2009년 7월 이주노조 위원장을 맡았다.

긴 싸움이 시작됐다. 이주노동자는 ‘사회불안 요소’가 아니라 ‘꿈과 존엄을 지닌 사람’이란 것을 알려야 했다. ‘G20->추방’ ‘이주노동자=범죄자’라는 폭력적 도식을 끊어내야 했다. 8월 16일 향린교회로 찾아갔을 때가 농성 35일, 단식농성 23일차. 기력이 쇠잔해진 그는 농성장 바닥에 몸을 말고 누워있었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 친구들도 못 알아본다”며 빙그레 웃는다. 살은 내렸지만 눈빛은 형형하다. 소신은 투철하고 고집은 여물었다. “과거에는 무조건 고집을 부렸는데 지금은 내가 믿는 권리에 대해 싸우고 정의롭지 않은 일을 참지 않는다”고 미셸은 말했다.

G20과 미친 단속

# G20을 앞두고 추방이 얼마나 늘었는가. 이전의 단속추방과 다른점은 무엇인지.

= 원래 출입국관리소에서만 이주노동자를 단속했다. 작년부터 노동부, 경찰, 출입국관리소 세 군데 합작으로 단속을 실시한다. 5~6월 두 달 동안 6000명이 추방됐다. 이주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 지난 5월부터 특수경찰들이 이슬람 사원과 각 지역의 무슬림 교회를 수시로 드나들며 테러리스트를 찾아 제보하라며 들쑤시고 다닌다. 이주노동자들 끼리도 서로 신고하게 한다. 지난 7월 16일 새벽 인도네시아인 수십 명 단속됐다. 7월 15일엔 평택 서탄면 농장일대를 경찰 1소대(40명)가 수색을 벌여 태국 미등록이주노동자 40명이 붙잡혀갔다. 경찰은 실적을 올리려고 물건을 주은 뒤 돌려준 사람마저 범죄자로 둔갑시킨다.

# 농성은 언제까지 할 계획인가. 단속중단을 촉구하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추방의 빌미가 되니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으면 잠시 주춤하더라도 단속은 계속되지 않겠나.

= 이주노조의 농성은 4가지 목표가 있다. 단속추방 중단, 미등록이주노동자 합법화, 고용허가제에서 노동허가제도로의 전환, 이주노동 인정이다. 현재 이주노조는 고등법원에서 이기고 대법원 항고로 3년 5개월이 넘었다. UN과 ILO등 국제노동인권 단체가 합법화 권고안을 냈다. 머지않았다는 느낌이다. 지금이 적기다. 꼭 이뤄낼 것이다. 농성은 8월 말에 정리할 것이다.

여기서 고용허가제와 노동허가제의 차이점을 알아보자. 고용허가제에서는 이동의 자유가 없다. 3번 밖에 옮길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 사업장의 사장이 학대하는 상황에서 퇴사하면 미등록이 될 수밖에 없다. 4만7천명여명이 고용허가제 때문에 미등록노동자가 된다. 지금은 법이 약간 바뀌어서 사업자 책임으로 법 위반이면 횟수에 포함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위반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고용지원센터에 같이 가면 사장 얘기만 듣는다. 결국 사업주가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 처리해준다. 반면에 노동허가제는 사업장을 바꾸는데 제한이 없다. 머무르는 체류기간과 시간 등이 자유롭고 무엇보다 가족을 데리고 올 수도 있다. 한국에는 숙련기술자나 전문 지식인에 ‘노동허가제’를 적용하고 있다. EU나 독일 등에도 노동허가제가 있다.

필리핀노동자 ‘농장의 꿈’

# 필리핀에서 삶이 궁금하다. 어떤 일을 해서 밥을 먹고 살았는지.

= 여러가지 일을 많이 했다. 포장마차, 노점상, 캐셔, 비서, 오피스워크, 전기설치 작업, 야채 재배, 공사장, 주유소에서도 일했고 삼촌 가게를 돕거나 일용품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의 꿈이 무엇이었나.

= 돈을 벌어서 작은 농장을 갖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농장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세 번째 남편이다. 내가 원래 심플라이프를 좋아한다. 조그만 땅이라도 사서 농장을 하고 싶다. 그러면 농작물을 팔기보다는 자급자족하면서 살고 싶다. 남는 건 이웃과 나눌 것이다. 자본주의가 싫다. 필리핀은 기술은 수출하면서 쌀은 수입에 의존한다. 아이러니다.

# 필리핀에서는 농장을 가지려면 돈이 많이 드는가 보다.

= 1년에 32개의 태풍이 지나간다. 모든 농작물을 망치는 건 아니지만 피해가 막심하다. 단순히 농작물을 키우기보다 커뮤니티(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싶다. 필리핀에서 가장 필요한 건 음식이다. 싼 값에 먹을거리를 조달하고 싶다. 현지 음식 값이 비싸다. 쓰레기에서 음식물 건져서 요리해서 먹기도 하고 상황이 열악하다.

# 아까 자본주의가 싫다고 했는데 얄궂게도 이주노동자에 대해 착취가 유독 심한 자본의 나라로 왔다. 한국의 열악한 노동 여건에 대해 정보가 없었나.

= 알았다. 삼촌이 한국에서 겨울에 몇 달 체류했었다. 겨울에 보일러도 없는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느라 손발이 모두 동상 걸렸었다. 나중에는 여권 뺐기고 강제귀국 당했다. 한국의 상황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도 아프고. 동생도 아프고…그날 벌어서 그날 먹는 생활이었다. 한국에 올 때는 무슨 일이든 견뎌내겠다고 결심했다. 농장을 하기 위해 돈을 모아야한다는 꿈이 있으니까. 그런데 견딜 수 없어서 이주노조에 가입했다. (웃음)

# 필리핀 노동여건은 어떤 편인가. 노조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

= 전혀 없었다. 물론 필리핀에서 일할 때도 노동자들 함부로 대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장님들이 나쁘지만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동료들을 모으고 조직해서 운동하기보다 내 고집만 믿고 싸웠다. 권리 침해를 못 참는다.

이주노동자 ‘투사의 꿈’


미셸은 2006년 1월 한국에 들어와 줄곧 3D업종에서 일했다. 첫 일터인 울산의 범퍼업체를 거쳐 경기도 용인의 램 조립공장을 다녔다. 공장은 매우 더러웠고 위험했다. “사장님들”은 한국어를 모르는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을 미지급하고 수당을 깎았다.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공제와 부당한 대우가 많았다. 따지고 싸웠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말문이 막혔다. 언어도 법적 지식도 부족했다.

필리핀 동료가 부당해고를 당했을 때 우연히 이주노조를 알게 됐다. 그곳에서 정부와 악덕 사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배웠다. 학습도 조직도 열심히 참여했다. 돈 버는 것이 목표였던 그는 점차 이주노동자의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 변해갔다. 미셸은 고용허가제로 입국해 3년을 일했다. 재고용되기 위해 필리핀에 다녀와서 3년 더 일할 수 있다. 이주노조위원장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 폭행, 착취, 체불임금 등 이주노동자 탄압은 천태만상으로 안다. 가장 가슴 아팠던 사례가 있다면

= 용인에서 일할 때다. “반장님”이 필리핀 여성이 실수하니까 치면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했다. 인종차별적인 상황이 제일 힘들었다. 여성노동자를 야간노동만 시켰고 휴일은 한 달에 한번만 있었다. 퇴직금 수당도 잘 안줬다. 이름 모를 공제도 많았다. 필리핀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로 본다. 몸이 아파도 회사에 가서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보여주고 허락을 받아야 병원에 가야했다. 믿어주지 않는다. 회사가 산 아래 있는데 거기까지 버스 타고 가서 얘기하고 30분 버스 타고 돌아가야 했다.

# 트랜스젠더 이주노동자로 일하는데 불편함이 클 것 같다.

= 2006년 1월 한국에 왔고 2008년부터 호르몬주사를 맞고 있다. 사람들이 물어보면 말 하고 안 물어보면 굳이 말하지 않는다. 공장에서 가끔 묻는다. “여자냐, 남자냐?” 남자라고 대답하면 그럼 남자일을 하라고 시킨다. 기꺼이 한다. 호르몬주사를 맞기 전에부터도 필리핀에서 공사일, 집수리 등등 힘든 일을 많이 했다. 괜찮다.

# 커밍아웃을 한 계기가 특별히 있었나.

= 이주노조위원장으로 추대 받을 때는 공식적으로 말해야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해서 밝혔다. 이주노조 산하 노조원들 중에는 이슬람이나 네팔 등 종교문제로 성정체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이 있다. 나중에 문제가 될까봐 미리 밝혔는데 다들 진보적인 사람들이라 그런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른 불편함은 없다. 난 성격이 화나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편이다. 직접 차별 겪지 않더라도 차별하는 일을 얘기 들으면 바로 가서 얘기한다. 항상 자신감이 있다.

# 한국 생활이 고달플 때 주로 무얼 하는가. ‘사는 재미’가 궁금하다.

사 람 만나는 거 좋고, 낚시도 좋아한다. 한국, 필리핀, 타이완 등 친구를 많이 만났다. “뒷풀이”(웃음)도 좋다. 위원장으로서 미래의 이주노동자를 도울 수 있다는 기쁨이 제일 크다. 농성장에 실제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주노조 아닌 여러 단체에서 힘을 모으기도 했다. 연대가 가능하다는 게 힘이 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모여 활동한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 있다. 이번 단식농성은 나를 얼마나 이길 수 있는가 시험할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이 즐겁다.

두 개의 소수성, 외부로 향하다

미셸은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사장님” “반장님” “뒷풀이”는 정확히 발음했다. 세 마디 뿐이 아니다. 벽면에 붙은 무지개 빛깔 현수막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입을 뗐다. “동인연”에 가입했다고. 동인연은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줄임말로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가 모인 성소수자 인권단체다. 동인연을 소개하는 그의 표정은 흡사 천군만마를 얻은 장군처럼 행복해보였다.

성 소수자와 이주노동자. 우리사회에서 배제의 대상이 되는 두 개의 소수성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한계가 아닌 출구로 삼았다. 모순과 차별에 저항하면서 존재의 영토를 끊임없이 갱신, 확장했다. 추방의 땅에서 우정의 정원을 구축했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발명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키는 ‘고집스런 불침번’ 미셸.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부탁하자 예의 그 외유내강한 어조로 말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바란다.”

* 본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습니다. 통역에는 지성과 미모를 갖춘 ‘소하영’ 씨가 수고해주셨습니다.

응답 3개

  1. 이반해방전선말하길

    감동적인 인터뷰입니다^^

  2. 지성과미모의소유자말하길

    와우. 발번역을 이렇게 멋진 기사로 만드시다니. 미셸씨랑 언제 인터뷰 뒷풀이 해야되는데..ㅎㅎㅎ

  3. 걸어댕기는 죠스말하길

    인터뷰 후일담, 제가 기사를 미셀한테 보여줬더니 미셀 왈, 지금까지 인터주에서 나온 사진 중에 요기 나온 사진이 가장 맘에 든데요, 내용은 제가 전달할 영어 실력이 안되서;;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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