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시가 내게로 왔다

- 김대경

하루에 버스가 단 세 번밖에 오지 않는 산간 마을에 은둔(?)하며 지내고 있다. 운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제주 시내나 어딘가로 가려면 큰맘 먹어야 한다. 게다가 이번 여름은 어찌나 더운지 제주 도민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못 보고 못 느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기에 오래 기억에 남을 여행이자 칩거 생활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제주에서 가장 새롭게 느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자연이다. 서울에서 인공적으로 조작하여 얼핏 보면 완벽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싫증이 나게 만드는 자연이 아니라, 약간 엉성해 보여도 똑같은 모습을 거부하는 자연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변화무쌍한 즐거움을 준다. 마치 입체 영상 안경으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하늘의 구름(제주는 어딜 가나 시선의 절반 이상을 하늘과 구름이 차지하고 있다), 밤마다 방충망에 한참을 머물다 날아가는 수많은 곤충들(얼마 전에는 애기 주먹만한 풍뎅이를 보고 기겁을 하기도 했다), 새벽에 열어 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시린 바람(열대야는커녕 이불을 잘 덮고 자야 할 정도이다),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면 수없이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별들의 무리, 수많은 나무와 풀과 꽃과 나비와 바람(오름에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제주는 자연이 주는 풍성한 자극뿐만 아니라 나에게 삶의 방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해 준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규칙적인(?) 생활 패턴과 상품과 화폐의 틀로만 생각하던 삶을 여기서는 용납하지 않는다. 우선 주변에 가게가 전혀 없기에 다양한 문화 및 소비 생활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장 보러 가기까지는 냉장고에 남은 음식 재료나 밭의 작물을 적절히 조합하여 최대한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 마치 물건을 사올 때마다 무슨 구호 물품을 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매일 아침 마당에 빨래를 널어놓고 햇볕과 바람에 말라가는 것을 보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또한 내 삶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책도 지금 한 달 째 전혀 주문하지 않고 지낸다.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 몇 권을 싸 들고 온 책도 읽지 못하고 있으니, 원. 책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진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또한 여기서 누리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바로 ‘마실가는 것’이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이 동네 사람들은 서로 서로의 일상을 가족처럼 알고 지낼 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이 곳에 이사온 첫날, 뜨거운 햇볕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책을 읽고 있는데, 창 밖으로 어떤 아주머니가 ‘뭐 합서?’ 하며, 특별한 일 없으면 뒷집으로 놀러 오랜다. 그래서 뒷집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댁에 가서 수박도 먹고, 파 씨 거두는 모습도 구경하고, 자리돔으로 조린 찌개로 콩잎에 밥을 싸 먹어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게 한동안 일상이 되어 버렸다. 서울은 몇 달을 살아도 말을 섞어 가며 살아가기 힘든 곳인데, 이곳은 이사온 첫날부터 마치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말을 건네니, 사람사는 느낌이 팍팍 든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의 지혜와 부지런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듯하여,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연신 되돌아보게 한다.

또 하나, 제주에서 지내다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책을 거의 보지 않고 지낼 뿐 아니라, 인터넷조차 할 수 없어서 활자를 안 보고 생활한 지가 꽤 오래 되다 보니, 어쩌다 밥상에 펼쳐 놓은 신문 쪼가리만 보아도 평소에 관심이 없던 분야의 글조차 쑥쑥 읽힌다. 마치 잠을 엄청 많이 자고 푹 쉬고 나면 화장이 잘 받는 것처럼, 글을 오랜만에 읽으니 아주 몰입이 잘 된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얼마나 활자의 홍수 속에서 살았는지를. 굳이 알 필요가 없는 말과 글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바람에 결국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언어에는 오히려 무감해지곤 하지 않는가.

이렇게 지내다 보니, 위클리 수유너머의 글을 써야 한다는 감각조차 무뎌져 부랴부랴 책을 뒤지는 사태까지 발생하고야 말았다. 우연히 시동생 부부의 방에서 발견한 손택수의 시집 <나무의 수사학>을 본 순간 어찌나 반가운지. 미안한 말이지만 시집은 얇은 데다 글자 수도 적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그 시집의 세례를 아주 넉넉히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내가 말했던 제주에서의 새로운 삶을 다시 한번 재확인 시켜주는 책이 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내친 김에 아예 한라도서관에 가서 그의 다른 시집인 <목련 전차>까지 함께 읽었다.

우선 그의 시에는 자연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시의 공동저자로 나무와 새, 구름과 바람과 노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연을 담은 그의 시를 읽으니 제주에서 느끼는 자연과 오버랩이 되어 공감 지수를 한껏 올려준다. 역시 시는 답답한 교실이나 사무실에서 읽을 게 아니다.

게다가 그는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우리가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매제의 구두’라는 시에서는 상처투성이의 구두를 보면서 매제가 걸어 왔을 삶을 상상하며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구두에 솔질을 하고, 왕희지와 추사가 아꼈다는 쥐수염붓을 통해 불안한 삶에 일필휘지할 수 있는 삶을 고대하는 모습을 보면서(‘쥐수염붓’) 사물에 대한 상상력과 유추 방식에 감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서 풍성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감각언어였다. 다 아는 감각어지만, 이제는 일상에서 그다지 쓸 일이 없어진 그 단어들을 시인은 적재적소에 사용함으로써 삶의 감각을 일깨운다. 새 창호지에 물을 뿌려서 그늘에서 말린 다음에 듣는 수저 부딪는 소리, 새소리, 닭울음소리, 대나무 그림자, 코 고는 소리는 한 편의 합주곡을 연상시킨다(‘집장구’). 제비 한 쌍이 집을 짓느라고 떨어뜨리는 깨소금(‘제비에게 세를 주다’), 물오른 나무들 사이로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는 별들(‘화엄 일박’), 흙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날에 씨를 뿌리고 돌아오는 할머니(‘달과 토성의 파종법’), 임신 중에 홍어를 몰래 훔쳐 먹고 토해낸 엄마를 떠올리며 뱃속의 열 달을 더듬어 보는 시인의 모습(‘홍어’)을 표현한 부분에서 언어의 싱싱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제주에서 새롭게 느끼는 부분이나, 시인이 시를 통해 보여주는 세상이나 결국은 오래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있었던 것들인 셈이다. 다만 우리는 이제 그 생생함과 아름다움에서 한참 떨어져 그야말로 시를 읽기 힘든 시대, 곧 시답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거기에 국어 교사인 나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러한 삶에일조를 한 것은 아닌지 거듭 생각하게 된다. 작년 가을에 중간고사가 끝나고 학생들과 2주 정도 시집을 한 권씩 사서 수업 시간에 각자 읽고 좋은 시를 골라 교실 사물함에 붙여 두게 한 적이 있다. 예상 외로 조용히 앉아 시를 읽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답지 않은 문제들로 아이들을 고달프게 했던가 반성을 했다(시를 가지고 문제를 풀게 하다니…). “선생님, 시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라고 말하던 어떤 남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는 밑줄을 긋고 수사법을 적어가며 외는 게 아니라, 삶과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으로 읽어야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시는 결국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되살려 주는 것이다. 갈수록 난해해지는 참고서의 암기할 지식과 문제집의 홍수에서 벗어나, 시로 한바탕 목욕하는 일이 오늘날 더 필요한 교육임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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