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G20 VS 이주민, 당신은 누구를 환영하는가?

- 죠스(수유너머R)

미국 22개 주가 선거를 앞두고, 애리조나 주의 미등록 이주민 단속 및 처벌 강화 법안 입법을 검토하고 있다. 애리조나 주 이민법이 인종차별적 요소 등에 의해 핵심 조항들이 발효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올해 애리조나 사막에서 ‘불법 이민자’들의 시신이 150구 넘게 발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법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단지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며, 마치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추방해버리면 경제 위기 및 실업은 물론 범죄 문제도 해결될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이주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기세를 부린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어디서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및 처벌 강화’ 법안이 존재한다. 소위 이주민 100만 시대를 외치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G20 세계정상회의를 앞두고 서둘러 ‘버려야할 것들’을 추려내고 있다. 그 일차적 대상은 당연히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한 국가의 선거나 ‘국격’을 향상시킨다는 행사에 앞서 어김없이 대대적으로 이뤄진다. 폭력적인 단속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와 국제 외교·정치의 꽃밭인 G20 세계정상회의를 아름답게 피우기 위한 거름이라도 되는 양.

1. G20 환영 =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나는 요새 ‘G20을 빌미로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중단’을 위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농성장(향린교회)에 일주일에 두 차례 연극 워크샵을 하러 간다. 이주노조가 농성을 시작한다기에, 연극을 통해서 이주노동자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서 제안한 일이었다. 농성장에 들어서면 이주노조 위원장인 미셸,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2명의 이주노동자인 끼런과 뻼파, 그리고 갈 때마다 구성원이 다르긴 하지만 농성을 함께 하고 있는 내국인 활동가들과 상근자들이 나와 동료를 맞아준다. 인사가 끝나고 연극 워크샵을 진행할 준비가 되면, 이젠 나와 동료가 그들을 워크샵 프로그램으로 초대한다. 농성장 한 쪽 벽면에는 “우리는 G20이 아니라 이주민을 환영한다.”는 연대 단체의 문구가 적혀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환대한다.

이주노조의 농성 선포식

우리의 환대는 앞선 G20 환대 행위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올 봄부터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서둘러 G20세계정상회의를 알리는 광고를 시작했다. 그들은 온 길거리와 TV 광고에 G20 개최가 곧 한국의 국가 발전과 품격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하지만 대대적인 광고의 저편, 세계 정상들을 향한 “어서 오세요. 모시게 되어 몹시 행복합니다”라는 환대 행위는 내부의 이질적인 존재들을 솎아내 추방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2010년 5월 초 법무부는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노동자) 자진출국 지원대책’을 내놓았다. 내용인 즉, 5월을 미등록 이주노동자 계도기간으로 설정해 자진출국을 장려한 후, 6월부터 8월까지 정부 합동 강제단속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한편 경찰청은 ‘외국인 범죄 선제적 대응’으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들이 말하는 범죄에는 미등록 체류도 포함된다. 길거리나 지하철역에서 무차별 불심 검문을 해, 비자 없는 사람들을 범죄자처럼 잡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주노조 농성장 연극 워크샵 풍경

법무부와 경찰청의 조치는 모두 G20 회의의 안정적인 개최를 바탕에 두고 있다. 정부는 ‘G20 성공적 개최 = 외국인 범죄 소탕 = 불법체류자 단속 강화’, 다시 말해 ‘미등록 이주노동자 = 잠재적 범죄자’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것의 놀라운 효과는 그 전까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해 별 생각을 안 하던 사람들도 위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점이다. 선거처럼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절차나 G20처럼 국가 질서나 통합이 중요시되는 국제회의에 있어, 잠재적 범죄자를 구분해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치안’ 논리는 필수적이다.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2003년 11월 16일부터 실질적으로 집행되었다. 그 전에도 물론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존재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즉 정부가 이주노동자 정책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부터 단속도 시행되었다. 2003년 11월부터 2005년 9월말까지 2년 동안 단속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1987년부터 2003년 10월까지 16년 동안 적발된 인원보다 훨씬 많았다. 이주노동자 고용제도인 고용허가제도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불안정한 제도이기 때문에(사업장 이동 제한, 노동기본권 보장 어려움 등), 이주노동자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폭력적인 단속의 시행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2003년부터 정부가 시행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그 규모에서뿐만 아니라 단속전담반의 구성, 폭력성에서도 언론과 국가인권위원회의 비난을 받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범죄자 단속이 아니라 출국관리법 상 위반자를 단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속전담반을 법무부/노동부/중소기업청/경찰청/해양경찰청까지 동원해서 구성했다. 또한 단속은 장소를 막론하고 ‘토끼몰이식’으로 시행되어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법무부에 이에 대한 시정권고를 여러 차례 했으나, 2010년 현재까지도 폭력적인 집중합동단속은 계속되고 있다.(한겨레, 2010.6.30, “G20전 이주민 무차별 단속 ‘밤길이 무섭다’”)

2. 만들어진 미등록 이주노동자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범죄율은 1.3%로, 한국인 전체 범죄율 4%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정부가 그토록 신뢰하는 통계를 살펴보더라도, G20 개최를 위해 잠재적 범죄자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강화하는 정책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폭력적인 단속이 거듭 시행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계속 만들어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숫자를 유지하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이주노동자를 막기 위해 폭력적인 본보기 단속이 필수적이다. 또한 국가가 동질성을 가지고 운영되기 위해서 이질적인 요소를 계속해서 발명하고 그것들을 추방하는 행위 역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경제, 소위 신자유주의가 실현된다고 국가의 역할이 작아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국가를 통해서’ 실현된다. 금융 규제 완화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시장 정책이 국가를 통해 실현되듯이, 국경의 넘는 이주 노동의 통제 전락 역시 국가에 의해 실행된다. 물론 이러한 국가의 역할 덕분에 자본은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수급할 수 있게 된다. 자본은 국가를 통해 국내 인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3D 산업에 이주노동자들을 채워 넣는다. 이때 국경은 이주노동자들을 국적에 따라 합법/불법에 따라 효과적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 자본의 입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의 국적이나 합법/불법은 별로 중요치 않다. 그들은 싼노동력을 구입할 수 있다면, 그 노동자의 국적이 무엇인지 법적 지위가 무엇인지 개의치 않는다. 국가만이 그것을 신경 쓸 뿐이다. 국가에 따라 혹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국가는 이주노동자 통제 정책을 수행한다. 폭력의 독점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기, 곧 치안유지와 국가 내 노동력의 효과적인 관리가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 이유는 이주노동자의 유입에서부터 단속 추방까지의 과정으로 증명된다.

한국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 추방함으로써, 자신이 국제 행사를 품격 있게 치러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근본적으로 없앨 의향이 없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3D 산업에서는 유용한 노동력이고, 단속 추방의 시행은 적은 돈으로 전체 이주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은 물론 국민을 안심시키고 통합시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없는 ‘국가 행사’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도 되는 양 제시된다. 선거 때에는 실업률의 주범이며 잠재적 범죄자인 이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이 표심을 자극하고, G20 행사를 앞두고는 국가의 품격을 훼손하는 범죄자를 처벌한다는 정책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그렇게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만들어진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의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만들어진 이주노동자를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다. 하얀 얼굴이 아닌 검은 얼굴을 한 어눌한 말투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한 순간에 경제 위기, 실업, 범죄의 원인 제공자라는 꼬리표가 이주노동자 뒤에 붙어도, 단속 과정에서 다치고 죽는 이주노동자들을 보아도 우리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그들이 원인제공자로 주목받았을 때는 그들에 대한 증오를 감추지 않는다.

“… 증오는 그저 타자가 우리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소유할 때, (그들이 가진) 재산이나 자리에 대해 항의하면서 생겨난다. … 우리는 빼앗겼기 때문에 증오하고, 배제되었기 때문에 배제한다. 물론 그런 일이 벌이진다.” 실제로 건설업과 몇몇 3D 업종에 함께 고용되어 있는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상적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듯이, 배제의 쾌락은 우리가 차지한 자리들이 안락하고 안정적이라 하더라도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무조건 잡아서 내보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은 내국인의 일자리를 위협하니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비단 이주노동자와 이해관계가 닿아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인종주의, 국민 중심주의, 외국인 혐오증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디서든 떠오른다. 배제와 분열을 통한 단일성 혹은 합의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3. 우리는 G20이 아니라 이주민을 환영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20을 향한 환대 행위가 의도치 않게 이주노조의 농성을 불러일으켰듯이, 증오와 배제는 의도와는 다르게 불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정치’이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배제함으로써 기능하는 선거나 G20은 민주주의나 정치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의 폭력을 휘두르는 ‘치안’일 뿐이다. 치안의 질서는 이주노동자 관련 법-제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주노동자 관련 법-제도는 내국인 노동자로부터 이주노동자를 분리하고, 등록 이주노동자로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시행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정부는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미등록으로 그리고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 그들을 평등한 관계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바로 치안의 질서이고 국가의 통치 기술이다.

이 기술은 국가가 정한 법-제도에 불일치하는 주체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변화와 발전은 국가가 제시하는 ‘전체’ 안에서만 이뤄진다. 치안의 입장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도 노동자다’라는 외치는 것은 ‘소음’이고, 따라서 제거해야 할 불일치이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 혹은 ‘불쌍한 사람’들로는 가시화하시만, 그들이 놓여있는 주변부 노동시장, 법-제도 혹은 그들의 실제 삶은 비가시화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나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한낮 불평불만으로 만들어버린다.

랑시에르는 치안 논리의 반대로 정치의 논리를 제시한다. “정치의 논리는 부분들, 자리들, 그리고 직무들에(즉 치안적인) 셈에 포함되지 않았던 보충적 요소의 도입으로 정의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셈,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치안 논리에서 비가시적이었던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고 소음이었던 것을 담론으로 들리게 만든다.

한국 정부가 아무리 이주노동자들의 저항을 ‘소음’으로 취급하려고 해도, 그들의 목소리는 반향을 일으킨다. 그들의 농성은 나와 동료로 하여금 농성장 연극 워크샵을 진행하게 했다. 그들의 저항은 시민사회단체들을 연대하게 하고 지식인 및 언론인들로 하여금 시민권․노동권에 대한 새로운 담론들을 형성하게 했다. 이때 몫 없는 자들을 추방하고, 셈해지지 않은 자들을 배제하던 치안 논리는 멈칫하게 된다. “정치는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설립에 의해 중단될 때 실존한다.” 치안이 “공동체를 경영하는 기술”이라면, 정치는 “평등 전제를 현실화하는” 투쟁을 통해 치안의 질서를 중단시킬 때 발명된다.

G20은 소위 잘나가는 20개국 국가들의 경영 기술을 합의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합의는 통합, 질서, 국격을 내세우며 미등록 이주노동자, 노점상, 노숙인들의 추방과 배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들은 G20이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안겨줄 것이라고 주장하며, G20 개최 예상 경제 효과를 계산하고 있다.

다른 한편 G20을 계기로 추방되고 배제된 자들은 모여 ‘오래된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연대와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도 평등한 인간이고 노동자라고, 우리는 G20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지금도 ‘G20을 빌미로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반대’ 농성을 진행하며 단식 중인 이주노조 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단속 추방과 인종차별적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뜻을 보여줘야 한다. 정부가 강력하게 탄압하니 우리도 강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도 보여주고 싶다. 이주노동자 역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똑같은 인간이다. 우리도 인간 존엄은 물론 권리를 갖고 있다. … 이주노동자 역시 억압받는 노동자의 일부다. 한국 노동자 중에서도 억압과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비정규직, 해고자, 노점상, 노숙인, 퀵서비스, 4대강 문제 등 모두 삶터와 일터에서 밀려나는 이주민들이다. 우리와 똑같은 처지다. 따라서 연대가 중요하다.”

지금 전혀 다른 두 외침이 울리고 있다. 당신은 어떤 외침을 소음으로 듣고 어떤 외침을 감각적으로 나누고 있는가? ‘글로벌 코리아 G20으로 세계 중심에 서다’인가? ‘우리는 G20이 아니라 이주민을 환영한다’인가? 무엇이 당신을 멈칫하게,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가?

G20 VS 이주민, 당신은 누구를 환영하는가?

* 본 글은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2008) 및 그의 강연문들을 중심적으로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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