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얼굴에 담긴 무궁무진한 이야기

- 달맞이

달맞이의 책꽂이
『얼굴』노경실 저 / 김영곤 그림 / 을파소

거울을 보기가 겁이 난다. 나이가 들면서 더더욱 그렇다. 빼어난 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성형을 한 것도 아닌 데도, 얼굴은 볼 때마다 다르다. X-RAY선으로 마음속을 투사하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는 얼굴도 쭈그렁 마귀할멈이 되어 있다. 모처럼 옛날 친구를 만나 한바탕 수다를 늘어놓고 들어온 날은, 중학교 적 갈래머리 아이의 눈웃음이 살랑거린다. 뼈마디가 욱신거려 따끈한 아랫목만 자꾸 밟히는 날이면, 얼굴 가득 실뱀이 기어간다. 눈 꼬리도 실룩, 입 꼬리도 실룩, 여간 꼴사납지 않다. 그러니 하나의 얼굴이 수십 개의 얼굴로 변주되는 것쯤이야 다반사다.

얼굴은 이렇듯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스케치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의 경우, 십 중 아홉은 만신이 된다. 족집게처럼 아이 얼굴만 보고도 배가 고픈지, 쉬를 했는지, 잠이 고픈지 알아챈다. 첫 아이일 경우는 더 그렇다. 아마도 아이를 향한 간절함이, 아이 얼굴에 미세하게 나타나는 소망을 읽어내는 것일 게다. 그런데 그토록 구구절절 세세하게 알 것 같았던 내 아이의 얼굴도 언제부턴가 전혀 읽히지 않는다. 돋보기로 들여다봐도, 현미경을 동원해도, 고품질 사진기로 200배 줌인을 해도 도무지 해독할 수 없다. 그건 필시 아이를 향한 촉수를 거둬들인 내 탓일 게다. 그런데 난 때때로 ‘해독할 수 없음’을 ‘해독되지 않음’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킨다. 그리고선 내 무심함에 스스로 면죄부를 준다. 이 얄팍함이 어찌 내 아이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얼굴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중학교 2학년인 둘째는 거실에 놓아둔 백일 사진을 볼 때마다 기겁을 한다. 제발 좀 치워달라고 난리다. 삐쭉삐쭉 솟은 머리, 터질 듯한 두 뺨, 오동통하고 짤록한 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녀석은 지금 제 얼굴이 좋단다. 방학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각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든 얼굴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본다. 동네 어른들이 인사삼아 해 주는 ‘잘 생겼다’는 말을 마음 속 깊이 각인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을 받으려고 한다. 제발 그 만족할만한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음 좋으련만,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아이들 얼굴은 열두 번도 더 바뀌니까. 내가 기억하기에도 녀석 얼굴은 여러 차례 허물을 벗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얼굴은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기호다. 물질만능의 시대에서 얼굴은 다분히 나의 상품성을 결정짓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좀 더 높은 단계로 레벨 업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에, 우리는 때로 얼굴에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이 불문, 개성 불문의 얼굴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런 얼굴에서는 더 이상 그리움도 애틋함도 느낄 수 없다.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내 얼굴. 그런데 그런 내 얼굴은 기실 나만의 얼굴은 아니다. 가끔 거울을 보다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 아버지의 흔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삶의 격랑들이 나이테처럼 동심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얼굴은, 나만의 얼굴이 아니다. 내가 겪어온 시간들의 종합이다. 나를 이루고, 내가 이룬 가족. 내가 보듬어 안은 사람들의 종합이다. “사람의 얼굴이란, 자신의 지난 생을 적어놓은 상형문자라네.”라는 정미경의 독설이 섬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림책『얼굴』은 얼굴이 하나의 기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소리를 이미지로 보여 주는 놀라운 하나의 세계”라고 말한다. 얼굴에 대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짚어준다. 얼굴은 자기 자신이며, 내 마음이며, 가족이며, 시간이며, 그리움이며, 돋보기라고! 무엇보다 얼굴은 세상에 딱 하나뿐인 보물 상자라고! 그러니 귀히 여기라고.

책을 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 과연 지금 내 얼굴인가? 당신들이 보고 있는 그 얼굴이 과연 정말 나인가? 나와 당신들의 괴리, 알고 있음과 보고 있음의 거리. 어떤 얼굴이 진짜인가? 아니, 어떤 얼굴이 가짜인가?

응답 3개

  1. 아기새말하길

    선생님 글 맛깔스럽게 참 잘쓰시네요. 다시 읽어도 술술 잘 읽히고 재미있어요.

  2. 둥근머리말하길

    이 책 참 예쁘네요.ㅎㅎ ‘내가 알고 있는 내 얼굴’이 있기나 한 걸까 되돌아봤어요. 고맙습니다.

    • 달맞이말하길

      돌아온 거유. 얼굴 좀 보여주시게. 가을이 가까워지는데, 난 자꾸 숨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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