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마침내 스크린에서, ‘우리안의 타자’를 만나다.

- 황진미

-이주노동자를 다룬 영화 <로니를 찾아서>, <반두비>, <처음 만난 사람들>, <세리와 하르>–

2009년 여름에는 이주노동자를 다룬 한국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였다. 영화 <반두비>(2009)의 개봉을 전후하여 연전에 만들어졌지만 개봉하지 못하고 있던 영화 <처음 만난 사람들>(2007)과 <로니를 찾아서>(2008), <세리와 하르>(2008)들도 개봉관을 잡으면서 이주노동자 영화는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이전까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영화로는 인권영화프로젝트의 옴니버스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2003)와 <잠수왕 무하메드>(2006)가 전부였던 것을 감안하면, 의미 있는 변화로 꼽을 수 있다.

어쩌면 늦은 감이 있다.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가 만들어내는‘유니버셜’한 문제이다. 대한민국은‘세계화’를 부르짖던 김영삼 정부 이후, IMF 구제 금융과 자유무역협정 등을 거치면서 급속히 세계자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수가 100만을 넘는 글로벌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전혀 글로벌하지 못하다. 여전히 (단일민족 운운하는) 완고한 배타성이 남아있고, (백인에 대한 선망과 유색인종에 대한 멸시라는) 인종위계주의가 확고하다.‘다문화주의’를 홍보하는 국정홍보처 광고 (“김치를 사랑하는 한국인, 한국인의 아이를 낳은 한국인”)마저도 자문화중심의 흡수․동화정책과 결혼이주여성을 저출산 해결의 도구로 여기는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정책 역시‘우리 안의 타자’인 이들을 경제․사회적 필요에 의해 요청하면서도 법적․정치적 이유로 단속․추방하는 모순적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는 현재의 한국사회의 명암을 드러내는 가장 예민한 지점이며, ‘지금 여기’의 문제의식을 지닌 창작자라면 당연히 주목해야 할 ‘화두’가 되었다.

마침내 도착한 네 편의 영화를 살펴보면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들 간 가장 큰 차이점은 이주노동자와 마주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1. <로니를 찾아서>

이주노동자와 만나는 주체는‘대한민국 성인남성’으로 무려 ‘한국 체육관’의 태권도 관장이다. 이는 의도성을 띤 전형적 설정이다. 즉 대한민국에서 ‘타자성’을 성찰할 필요가 없는 ‘동일자’가‘타자’와의 충돌로 인해 존재가 재구성되는 이야기이다. 한편 이주노동자 캐릭터는 전형적이지 않다. 그들은 입체적이고 미스터리한 존재인데, 작품의 핵심적 가치가 여기에 존재한다.

로니를 찾아서


자율방범대 완장을 차고 좌판을 둘러엎은 인호에게 앙심을 품은 로니가 태권도 시범대회에서 인호를 한방에 때려눕힌다. 심리적,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인호는 로니를 찾아 나서고, 여정에 끼어든 뚜힌과 우여곡절 끝에 친구가 된다. 영화는 뚜힌을 통해 이주노동자에 대한 판에 박힌 인식에 균열을 낸다. 그는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다. 쾌활하고 변죽 좋고 적응력이 뛰어나다. 그의 유목적 능력은 기득권을 내세우는 한국인들을 고향땅에서 밖에 살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보이게 한다. 그는 멘사 회원이고, 완벽한 이중 언어 사용자이며, 배낭하나 달랑 메고 세계 어디서나 친구를 사귀고 살 수 있는‘세계인’이자, 노래 한곡에 꽂혀 이역만리를 유랑할 수 있는 풍류객이다. 영화는 한국사회가 ‘이주노동자’라는 딱지 속에 봉인해 넣고 더 이상 성찰하지 않았던 문제, 즉 이들이 누구인가를 살피는 문제를 (인호가 당했듯)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환기시킨다. 또한 그런‘인간’들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짐승처럼’ 다루는지도 보여준다. 인호 역시 뚜힌과 친구가 되지만, 다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으로 이민국을 불러들인다. 그 토끼몰이로 뚜힌이 부상을 입고 추방되자, 인호는 태권도장을 정리하고 방글라데시로 향하는데, 그 여정의 끝이 무엇인지는 생략되어있지만, 그의‘이방인-되기’가 상당한 각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읽힌다. 하지만 로니와 뚜힌이 한국에서 차별과 추방의 대상인‘이주노동자’였던 것에 반해, 인호는 그곳에서 친절의 대상인 ‘외국인 여행객’일 것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성인남성의 의식적 도약을 보여주면서, 그것의 지난함과 한계도 함께 보여준다.

로니를 찾아서

2. <반두비>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를 만드는 신동일 감독의 최근작 <반두비>는 역시 매우 논쟁적이다. 영화의 논쟁성은 이주노동자를 다루었다는 사실보다는 그와 만나는 주체가 여고생이라는 데 있다. 여고생은 성인남성이라는 동일자와 가장 대극에 서 있는‘타자’이며, 성적․정치적 주체로 간주된 적이 없기에 여고생의 연애는 그 자체로 불온하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이주노동자임에야. 영화는 소녀를 당당한 주체로 내세운다. 그녀는 노동하는 존재이고, 부모나 선생의 권위에 눌려있지 않다. 그녀는 남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가 카림을 통해 한국사회의 인종적 모순을 발견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영화의 맥락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녀는 악덕 자본가 집에 찾아가 “언제 인간될래?”야단치고, 인종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백인영어교사에게 “한국여자는 스위티”하지 않음을 입증하고, 보호소에 갇힌 카림에게 “결혼하자” 말하는 등 좌충우돌의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끝내 학교를 자퇴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길이 아닌 독자적인 길을 찾아 나선다. 그녀는 현실의 여고생을 초과하는데, 4.19이후 최초의 정치적 발언을 이루어낸 소녀-‘2008년 촛불소녀’-의 잠재적 현신으로 보인다.

반두비

반면 카림의 이미지는 평면적이다. 그는 성실한 노동자이나 1년간 임금을 받지 못한 채 체류기간이 만료된 불법체류자로, ‘차별받는 이주노동자’의 전형이다. 그는 지갑을 가로 챈 그녀에게 “경찰서 가자”고 말할 만큼 순진하고, 악덕사장이나 거짓 고발자들에게 강하게 대항하지 못하는‘순한 양’이다. 또 경건한 무슬림으로 그녀와 성적접촉을 원치 않는 금욕적 인물이다. 그의 모습은 이주노동자가 폭력적이거나 성적으로 문란할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치적으로 올바른’설정으로 보이지만, 인물의 생동감을 부여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그 결과 영화 속 이주노동자는 사회적 편견과는 반대의 지점에서 여전히 대상화 된 존재에 머물고, 주체의 자리를 할당받지 못한다.

3. <처음 만난 사람들>

이주노동자를 만나는 주체가 탈북자이다. 영화는‘이방인들끼리의 만남’을 통해‘타자성’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영화는 다소 촌스럽지만, 적어도 다섯 가지의 미덕을 지닌다. 첫째 카메라가 이방인의 시선을 대신함으로써 소수자의 심정을 체험케 해준다. 탈북자 진욱이 임대아파트를 둘러보고 싱크대에서 온수를 틀고 울컥해하는 장면이라든지, 대형마트에서 끝없이 펼쳐진 상품들로 아찔해하는 장면 등에서 진욱의 시선을 대신한 카메라는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는 탈북자 진욱을 대상이 아닌 주체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가장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영상화법이다. 둘째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소수성의 연대’를 보여준다. 길을 잃은 진욱과 밤새 함께 헤매준 택시기사는 정착 10년째인 탈북자 여성이며, 진욱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베트남 청년을 도와 끝까지 동행한다. 영화는‘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소외된 자가 다른 소외된 자를 돕는‘선한 사마리아인의 구도’를 그려 보인다.

처음만난 사람들

셋째,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베트남 청년은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 온 옛 애인을 찾아 무작정 한국에 온 것인데, 어렵게 성사된 재회는 발길질로 끝난다.“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 뒤에 놓인 국제적 매매혼의 광경에서, 흔히 논의되는 것은‘농촌 노총각의 비애’이다. 한편 결혼이주여성에 대해선‘시부모 잘 모시고 대를 잇는 착한 며느리’가 될 것인지 혹은 (사기결혼이었고 결국) 도망 칠 것인지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나 이들도 현지에선 누군가의 애인이었고, 결혼이주는 존재를 건 결단이며, 그녀들의 이주는 현지 남성들에겐 식민지적 박탈감을 안기는 뼈아픈 문제이다. 이 관계에서‘농촌 총각’은 상대적인 권력자가 된다. 영화는 이 지점을 포착해내며, 결혼이주문제에 대한 베트남 청년의 시선을 제공한다. 넷째,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고통을 통한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탈북자 남성과 베트남 청년의 ‘눈물의 여관방’ 장면이다. 둘은 각자 설움이 복받쳐 엉엉 우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자신의 사연으로 상대의 설움을 가늠하지만, 이들의 소통은 진실한 것이다. 다섯째 영화는 낯선 땅의 길 위에서 만난 이방인들 간의 공감과 연대를 전하면서, 내국인으로서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이방인이 아닌 형사는 체포한 베트남 청년을 놓아준다. 왜 그랬을까? 그가 탐문과정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의 억울한 실상을 안 것도 이유이겠지만, 영화는 다른 이유를 암시한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찍힌, 그가 중년여성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위로받는 장면에서, 그 곳은 집 거실이 아니라 술집의 룸이다. 그도 역시 ‘길 위의 삶’을 사는 자였다. 그는 자기 확신들을 버리고 회의하는데, 바로 이러한 회의가 그로 하여금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게 만든 것이다. 영화는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내부자라 할지라도,‘길 위의 삶’을 깨닫고 자기 삶의 기반을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소수자와 조우할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4. <세리와 하르>

영화에서 이주노동자를 만나고, 영화 전체를 끌고나가는 시선의 주체는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이다. 세리는 베트남 결혼 이주여성과 한국남성 사이의 딸이고, 하르는 필리핀에서 이주해온 불법 이주노동자부부의 딸로,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세리는 혼혈성이 뚜렷한 얼굴과 사회성이 떨어지는 성격으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하르는 방송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언할 정도로 똑똑하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추방을 염려해야하는 처지이다. 하르와 비교당하는 것이 싫은 세리는 엉겁결에 하르의 아버지를 단속반에게 알려주는 행위를 하고, 하르의 아버지는 하르가 방송에 나가 얻게 된 후원금으로 산업재해를 입은 세리 어머니를 돕겠다는 약속을 저버린다. 두 소녀를 둘러싼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둘 사이의 오해도 깊어진다. 안타깝게 어긋나던 둘의 관계는, 그러나 억압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다시 연대로 돌아선다. 영화는 결혼이주여성의 딸과 불법체류노동자의 딸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가 타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냉대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며, 둘 사이의 우정을 가까스로 살려낸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측면이 있다. 영화 속 가장 약자이자, 가장 불행한 일을 당한 이는 세리의 엄마이다. 그녀는 임신한 아이를 잃었으며, 악덕사장으로 인해 산업재해를 입고 장애를 얻었고, 자신의 친딸로 부터 엄마 대접도 받지 못한다. 영화 초반 세리는 집안에서도 엄마의 말을 전혀 듣지 않으며, 밖에서도 엄마를 창피하게 여기고 외면해버리는데, 이러한 세리의 행동은 친엄마가 아닌 것으로 오인할 정도이다. 영화 역시 세리에게 주목하느라 세리의 엄마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사도 거의 없으며, 세리가 엄마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생각하는 장면도 없고, 단 한 장면도 카메라의 시선을 그녀의 시선에 맞추거나, 그녀를 클로즈업하거나, 지그시 응시하는 숏을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후반에 병실에서 세리가 엄마에게 어릴 때 들었던 베트남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유일하게 세리 모녀의 정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는 세리의 엄마를 단지 세리의 소외를 구성하는 환경으로만 취급할 뿐, 통상 주인공의 엄마에게 부여되는 평범한 위상마저 할당하지 않는다. 영화는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 박세리처럼 되고 싶은 세리와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 소원인 하르를 통해 ‘국가’를 염원의 자리에 위치지우면서, 그로부터 가장 소외되어 변방에 위치한 결혼이주여성의 불행은 소모적으로 사용한다. 이는 중심과 주변을 위계적으로 구성한 채 어디까지 중심으로 흡수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중심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세리와 하르>는 소수자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지만, 시선은 여전히 중심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상 살펴보았듯 네 편의 영화는 단순히 ‘이주노동자를 다룬 한국영화의 출현’이라는 기사로 뭉뚱그리기엔 녹록치 않은 의미와 결을 지닌다. 신자유주의적 모순의 결절점이자 해방의 단초이기도 한 이주노동자문제에 관해 더 많은 관심과 통찰이 모아지고, 또 다른 영화의 제작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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