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슬픔과 우울증의 차이

- 은유

아내가 자살했다

지난해 쌍용차 파업사태에 있었던 일이다. 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된 날 낮에 쌍용자동차 노조간부의 아내가 자살했다. 4살과 생후 8개월 된 아들 둘이 있다고 한다. 비극적이지 않은 죽음이 없겠으나, 핏덩이 남겨두고 간 엄마의 죽음처럼 서글픈 게 또 있을까. 죽는 순간조차 미련의 긴 그림자가 쇠고랑처럼 발목을 잡아대니 얼마나 육신이 무거웠을까. 얼마나 고개 아프도록 뒤를 돌아봤을까. 죽어서도 나비가 되지 못하는 무거운 몸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약하고 여린 새끼를 두고 떠난 에미일 것이다.

“4일 전쯤 아내가 전화하더니, 울면서 그래요. ‘오빠, 거기 있으면 집도 다 뺏기고 감옥도 가고 회사에 다시는 다닐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처음으로 ‘나오라’고 애원했는데….”

<한겨레>에 따르면, 아내는 밝고 의연했다고 한다. 생활력도 강했다. 건설회사 경리출신으로 연애할 때부터 천 원 한 장 안 쓰고 영수증 하나 허투루 안 버리는 살림꾼이었다. 남편이 지난해 12월 노조간부로 뽑히고 60일 넘게 투쟁에 매진해도 믿고 따라주었다. 회사 쪽에서 집으로 소환장과 손해배상 청구 관련 서류를 보냈을 때도 ‘안전하게만 돌아오라’며 격려했다. 그런 아내가 길에서 사측 직원 부인을 만나 저런 험한 소리 듣고 남편에게 ‘왜 날 속였느냐’고 울며 전화를 한 것이다.

아내의 장례식장 모습. 출처:오마이뉴스 ⓒ 안승권

“둘째 아이 백일 때 제가 케익이라도 사자고 했는데, 아내가 월급도 안 나오는데 대출이자도 못 낼 형편이니 안 된다고 한사코 말렸어요. 그래서 둘째는 백일도 못 치렀습니다. 심지어 백일날 가족 사진 조차 못 찍고….”

그렇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안간힘 쓰고 노력했던 아내였기에 더 허탈하고 막막했을 것이다. 집도 뺏기고, 남편이 감옥에 가고 직장도 잃는다는 것은 아내에겐 ‘삶의 존립 기반의 와해’ 곧 ‘자아의 상실’이다. 살뜰히 돈 모아 대출 끼고 겨우 마련한 집이 없어지는 것은 자기가 헌신해온 과거에 대한 부정이며, 당장 어린 것들 데리고 몸 뉘일 집한 칸 없고 아빠는 감옥살이 신세가 된다는 것은 현재의 생존에 대한 공포이고, 가장이 실직자가 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잃었다. 사람은 고통스러울 때 죽지 않고 희망이 없을 때 죽는다.

사측에서는 아내의 죽음을 ‘우울증’ 탓으로 몰아갔다. 올해 초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신 것과 남편의 파업 참여를 엮어 여러 악재가 겹쳐 우울증이 되었단 것이다. 쌍용차가족대책위에서는 사측에서 집집마다 방문해 집도 빼앗고 고소한다고 협박했다며 “회사가 죽였다”고 말한다.


‘상실’에 대처하는 슬픔과 우울증의 자세

여기서 우선적으로 우울증의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 우울증은 사측에서 얘기하는 ‘영혼의 감기’ 차원의 관념적인 병이 아니다. 우울증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표적 질병이다. 오는 2020년이면 허혈성 심장질환, 우울증, 교통사고가 3대 질병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리나라만 해도 무한경쟁의 칼바람 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스러져 가는가. IMF 이후 신용불량자, 조기퇴직자, 백수, 빚더미에 나앉은 서민,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우울증을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울증을 낭만화 하는 사회에 반대하고, 우울증은 이 시대의 고질병이라고 말해야 한다.

출처: 한겨레

프로이트의 논문 <슬픔과 우울증>을 참고로 우울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우울증은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대상에 한때 리비도를 집중시켰던 기억이나 기대상황에 대해, 현실은 이제 그 대상이 없다는 판정을 내린다. 쌍용차 아내의 경우도 그렇다. 둘째 아이 백일잔치까지 미루고 대출금을 갚으며 아등바등 살았던 아내는, 집 가압류-> 남편의 투옥 -> 해고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접하며, 단란한 가정의 꿈과 그것을 영위할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소중한 것(직장, 애인, 재산)을 잃었다고 해서 누구나 우울증에 걸리진 않는다. 대상 상실은 우울증의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상실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슬픔과 우울증이 갈린다. 슬픔은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난다. 잘 떠나보내기. 즉 애도작업에 성공한 것이다. 이같은 애도성공 사례로 우리 조상들의 전통장례식을 들 수 있다. 소중한 사람의 떠남에 대해 펑펑 울면서 감정을 표현한다. 그리워함은 물론이요 원망하고 애통해하는 등등 할 말을 쏟아내며 감정을 분출했다. 여기서 ‘증오감정의 표출’이 핵심이다. 상실한 대상에 대해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았다. 깨끗이 감정을 수습했다. 그랬기에 ‘상실의 경험’은 자아의 풍성함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반면에 우울증은 일단 상실한 것에 대한 리비도 철회에 반발하고 집착을 유지한다. 상실한 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한다. 대상 사랑을 동일화로 대체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적 질병에서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상실한 대상에 대한 ‘애증병존’의 양가감정의 상태에서 그것이 사라졌으니 가슴에 꽁기꽁기 묻어두었던 ‘증오감’을 표출할 대상도 없다. 길 잃은 분노가 자아를 향하게 된다. 대상상실이 자아상실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인 열등감의 망상에 빠진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고 자아를 공격한다. 자아에게 환원된 가학과 증오로 자애심이 급격히 추락한다. 자아빈곤감에 휩싸인다. 이처럼 슬픔의 경우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 바로 ‘자아’가 빈곤해진다. 그러니 우울증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시 제대로 애도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우울의 자리를 창조적 공간으로!

우리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의 장이다. 사람을 이윤창출의 수단과 공부기계, 실적기계로 대상화한다. 삶의 척도가, 좋은 삶과 행복한 인생의 기준이 획일적이다. 하나의 관문을 통과할수록, 목표한 바를 손에 넣을수록 결핍을 느낀다. 스카이대를 들어가도 취업걱정. 취업해도 승진걱정. 결혼해도 내집걱정. 출산해도 교육걱정. 끝이 없다. 원래 자본주의는 채무감의 원리로 굴러간다. 대부분이 ‘대출금’ 갚기 위해 평생을 저당 잡히고 허덕이니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TV에 나와 “엄마의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간접흡연의 피해와도 같다”며 “엄마의 정서적 안정이 중요하다”고 떠들어 댄다. 뭘 어쩌라는 얘긴가. 탁아시설도 마땅치 않고 고용불안은 심하고 먹고살기는 어렵다. 언론에서는 사회구성원이 정서적 안정감을 갖고 살 수 있는 제도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전문가 내세워 과학적 통계를 곁들여 근엄한 얼굴로 우울증을 진단하고, 아이 망칠 것이고, 노후는 암울하다고 을러댄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우울증을 어떻게 개인 탓으로 돌릴 것인가. 우리가 크는 동안 수학공식은 배워도 고통에 대처하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개인마다 처한 상황도 고통을 느끼는 강도도 다르다. 우울증에 따른 자살을 두고, 더 한 일을 겪고도 혹은 더 처지가 딱한 사람도 산다고 ‘고통을 일반화’ 해서 쉽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이들의 성실함을 배반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한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에 자기애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우울증을 계기로 내 우울적 자리를 창조적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인간은 삶을 자신의 신체에 맞게 구성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삶의 가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존재의 가치를 내 집, 일류대, 높은 연봉, 스펙 등과 등치시켰던 자본적 삶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는 대형공사다.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서로 이웃과 친구가 되어 용기와 자극과 웃음을 주고 도와야 한다. 우리가 현재를 담보하고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장밋빛 미래’가 대체 무엇인지. 어떤 ‘환상’을 보고 살았는지.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성찰하고 비판하고 원망하고 잘 떠나보내야 한다. 그리고 눈물로 씻긴 그 자리에서 삶을 창안해야 한다. 우울증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한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삶이여, 다시!”(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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