彼采葛兮 칡 캐러 가세
피채갈혜
一日不見 하루를 못 보면
일일불견
如三月兮 석 달을 못 본 듯
여삼월혜彼采蕭兮 쑥 캐러 가세
피채소혜
一日不見 하루를 못 보면
일일불견
如三秋兮 삼 년을 못 본 듯
여삼추혜彼采艾兮 약쑥 캐러 가세
피채애혜
一日不見 하루를 못 보면
일일불견
如三歲兮 세 해나 못 본 듯
여삼세혜-詩經 王風 「采葛」
시경詩經 왕풍王風에 나오는 「채갈采葛」이라는 시. 칡을 캐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시경에는 쑥을 캐면서, 물풀을 뜯으면서, 사냥을 하면서··· 일하는 고단함을 잊고 흥을 돋우기 위해 불렀던 노래가 많다. 이 노래들에는 진솔한 삶이 묻어난다.
이 시는 아주 간결하다. ‘칡을 캐네’ ‘쑥을 캐네’ ‘약쑥을 캐네’ ··· 비슷한 구절이 반복된다. 칡[葛]이 쑥[蕭]으로, 약쑥[艾]으로 바뀐 거 빼고는 똑같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도 마찬가지. ‘하루를 못 보면 석 달을 못 본 듯[一日不見 如三月兮]’ ‘하루를 못 보면 삼 년을 못 본 듯[一日不見 如三秋兮]’ ‘하루를 못 보면 세 해나 못 본 듯[一日不見 如三歲兮]’ ··· 석달[三月]이 세 번의 가을[三秋]로, 세 해[三歲]로 달라지면서 변화를 주지만 뜻은 비슷하다. 떨어져 있는 잠시 동안이 아주 길게 느껴진다는 것. 하루가 석 달처럼, 세 번의 가을이 지나는 동안(즉, 삼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맞아! 어쩜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지? 같이 있을 때는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지나가더니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는 이별의 시간은 이렇게나 길다니! 그래서 황진이는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어/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고운님 오시는 날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너 없으니까 하루가 삼 년 같다. 글자가 몇 개 쓰이지도 않은, 특별히 꾸미거나 복잡한 설명 없이 금방 와닿는 이 평범한 구절이 반복되면서 「채갈采葛」의 울림은 커진다.
이 ‘단순함의 미학’이 시경의 중요한 특징이다. 중국의 고대 시를 북방문학, 남방문학으로 나누어 이야기 한다. 황하강 유역에서 전해지는 시경詩經을 북방문학이라 하고, 남쪽의 양자강 유역에서 발달한 초사楚辭를 남방문학이라 한다. 초사의 대표시는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이다. ‘근심을 만나다’라는 뜻의 「이소離騷」는 굴원이 초나라 회왕懷王 때 모함을 받아 벼슬길에서 물러나면서 지었던 시이다.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데 혼탁한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 세상에 뜻을 펼칠 수 없으니 차라리 은나라 때 충신 팽함彭咸과 같이 물에 몸을 던져 고결한 뜻을 지키겠다. 이러한 내용을 역사상의 많은 인물 · 신화 · 전설 · 조수 · 초목 등을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 373구句 2490자字이다. 9句 36字의 시경「채갈采葛」과 비교해 보라. 우찌나 긴지! 북방문학인 시경은 간결한데 비해 남방문학인 초사는 장황하고 수사가 많다.
그렇다. 단순함과 평범함이야말로 시경이 오랜 세월 살아남은 비결이라 할 수 있겠다. 쉬워서 금방 따라 부르게 되고,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오래 마음에 남는다. 시경은 가歌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詩이다. 이 시에는 공동체의 기억이 풍요롭게 남아 있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는 공통감각 같은 거. 시경에는 그런 게 있다.
「채갈采葛」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네가 없으니 하루가 삼 년 같다. 평범한 이 한 구절의 말. 이별의 느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시를 만약 굴원이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너는 어떻게 해서 떠나게 되었고, 네가 떠난 후 나는 어떤 심정인지를 온갖 비유를 들어 장황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시詩가 가歌의 전통에서 멀어질수록, 공동체와 분리된 개인의 창작이 되면서, 시는 점점 말이 많아진다. 말 없이 통하던 공통감각을 상실하고, 그 부재의 자리를 말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 말이 서로를 통하게 하기보다 오해와 불신을 쌓는 경우가 더 많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하지만 시경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적은 말에 많은 느낌을 전한다.
너와 함께 있는 삼 년은 하루처럼 짧고
네가 없는 하루는 삼 년처럼 길다
여삼추如三秋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니, 삼년이 하루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하루가 삼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니, 시간이 고무줄인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게? 하하, 그렇다! 표준시계는 편의를 위해 정한 우리의 약속일 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표준시계로 규정할 수 없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을 갖는다. 우리는 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다른 우주를 살고 있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사건에 함께 참여하게 되어 우리는 만난 것이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체험된다. 같은 하루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금방 지나가 버리고, 싫어하는 일을 할 때는 한없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채갈采葛」에서 ‘여삼추如三秋’라는 말은 시간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시간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체험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로 보르헤스의 단편 「비밀의 기적」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흘라딕’은 희곡을 쓰는 작가이다. 그는 필생의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총알이 날아오는 순간, 시간이 멈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무한히 늘어나, 그 사이 흘라딕은 원고를 두 번이나 고치고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단어가 떠올라 마침내 작품을 완성한다. 총알이 날아오는 순간. 이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무한하게 늘어나다니! 그러므로 절대적 시간은 없다는 것. 시간은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늘 새롭게 체험된다는 것! 그러므로 「채갈采葛」에서 ‘여삼추’는 과장도 비유도 아닌, 사실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헤어진 잠시 동안 세 번의 가을이 지나가다니! 어째서 만남의 기쁨은 그다지도 금세 지나가고 이별의 괴로움은 이다지도 오래 남을까?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괴로움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고, 기쁨은 금세 괴로움으로 변한다. 양자는 같은 존재의 다른 두 측면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중의 한 측면만을 좋아하고 그 상태만 지속하려고 고집하기 때문에 괴롭다. 만남의 시간은 짧은데 이별의 시간은 길게 느껴지는 것은 전자는 살아‘지는’ 시간이고 후자는 살아‘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만남은 수동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기쁨은 기쁨이 아닌 것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능력, 이별에서 새로운 만남의 계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한용운, 「님의 침묵」) 붓는 시간. 진정한 기쁨은 어쩌면 만남보다 바로 이, ‘이별의 능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채갈采葛」은 이별을 노래하고 있지만 비탄에 빠져 있지 않다. 하루를 못 보면 석 달을 못 본 듯. 하루를 못 보면 삼 년을 못 본 듯. 하루를 못 보면 세 해를 못 본 듯. 단순한 구절이 반복되면서 헤어져 있는 잠시 동안이 아주 길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탄식이 무겁고 비탄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볍고 경쾌하다.
하긴, 이 시에서 이별은 잠깐 헤어진 거니까 그다지 심각할 건 없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경우-애인이 전쟁터에 끌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거나, 남편과 사별死別한 경우, 혹은 헤어진 게 아니라 아예 버림받은 경우라면 이별의 느낌이 「채갈采葛」과 또 다를 것이다.
같은 이별도 상황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채갈采葛」에서 이별은 새로운 시간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여삼추如三秋’라는 것. 하루면 그냥 하루인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져 있는 동안의 하루는 삼년보다 길게 느껴진다는 것. 「채갈采葛」에서 이별은 상실감의 비애라기보다 표준시계에 갇혀 있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생성의 기쁨으로 노래된다. 만남의 축복은 이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