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신자유주의 시대, 우울증으로 답하다

- 고병권(수유너머R)

1.

‘모든 나쁜 것은 신자유주의 탓’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더 나아가 모든 병이 사회적인 것이고 시대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에서 생겨난 것인지, 혈통이나 유전의 문제인지, 자연환경의 문제인지, 사회문화적 특성 탓인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탓인지, 그 유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신체가 개별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아닌 한에서, 우리가 앓는 병은 우리가 섭취한 음식, 우리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만큼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제도나 정책에 연동되는 것도 사실이다. 맑스의 표현을 빌자면, 유기적 신체만큼이나 ‘비유기적 신체’도 우리 자신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고유한 질병, 아니 최소한 우리 시대와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 질병은 존재한다. 나는 ‘우울증’에 그런 혐의가 있다고 본다.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파업 중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2008)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런 건 딱히 없어요. 없는데요. … 그냥 그래요. 우울해요. 우울해요. 내가 언제 갈지… 나 죽으면 와서 절이나 해요(웃음). 어떤 보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보람도 없고요. 투쟁을 하면 뭔가 좀 결과라는 게 나오면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 그냥 그 자리니까요.”(140쪽)

원인이나 대상을 딱히 지목할 수가 없는데도 기분이 우울하고 무력감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 나와 인터뷰를 한 어느 노동자는 “아침에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딸 아이 얼굴을 보다 갑자기 이유 없이 한 숨이 나올 때가 있다”고 했다. 농성 중이던 KTX의 어느 여승무원은 강연이 끝난 다음날 농성장을 청소하는 게 그렇게 서럽다라고 쓰기도 했다. 다음 날 해가 뜨면 ‘기약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되기 때문이란다.

2008년 노동건강연대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파업 중이던 이랜드, 코스콤, KTX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해서 발표했는데 그 결과가 아주 심각했다(<비정규직 투쟁사업장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 노동자가 35%로 일반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고, 전문의 진료가 필요한 질환의심군이 18.3%로 일반인에 비해 7배 이상 높았기 때문이다. 전체의 35.9%가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봤고 96%는 그냥 ‘매사에 걱정이 많다’고 했다. 특히 우울증, 강박증, 적대감 등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이날 발표 자리에서 KTX의 한 지부장은 도무지 개선될 줄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이렇게 표현했다. “울고 싶어도 마땅히 울 공간도 없다. 화내고 싶어도 화 낼 사람이 없다. 자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울고, 샤워하다가도 눈물이 난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이랜드노조의 위원장은 자신이 현재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주변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도 분노를 폭발시키고, 집안의 물건들을 완벽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3일에 한 번씩 집안을 다 뒤집어놓았다고 밝혔다. “투쟁의 전망은 날이 갈수록 불확실한데, 수십 명이 해고되고 수배당하고 체포되고 수백억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아내까지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고 했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했을 때 그는 내게 의사로부터 파업 중에 받은 스트레스로 뇌신경 일부가 손상을 입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위 보고서는 장기파업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실태조사였지만, 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이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하나의 영속적 구조로 자리잡은 구조조정, 언제 어떻게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잠정적으로만 이루어진 고용. 공동체 안전망의 부재에 대한 자각. 나를 위협하는 상황에 대해 내가 어떤 통제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느낌. 이 모든 것들이 불안(precariousness)의 감정을 낳는다.이 불안 감정은 일종의 두려움이지만, 잘 구조화되고 정돈된 공동체가 적으로 규정한 존재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 감정은 규정된 존재가 아니라 ‘규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내쳐져 있음’에 대한 두려움, 그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며 그에 대해 나는 아주 무력한 존재라는 자각이 주는 두려움이다.

구체적 대상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나’와 ‘세계’ 뿐이다. 아니 무엇보다 ‘나’와 ‘세계’가 무규정적인 것으로 상실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딱히 무언가를 콕 집어서 이야기 할 수 없는데 우울하다고, ‘나 죽으면 절이나 하라’고 말하는 노동자, 딸의 얼굴을 보면 이상하게 한숨이 나온다고 말한 노동자, 울고 싶어도 화내고 싶어도 딱히 그 대상이 없고 자다가도 샤워하다가도 눈물이 나온다고 말하는 노동자, 물건을 완벽하게 정리하려고 3일에 한 번씩 집안을 뒤집어 놓는 노동자. 이들은 모두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의 시대적 도래를 증언하고 있는 게 아닌가. 때로는 통제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고 정돈에 대한 강박증을 앓고, 때로는 이유도 없이 주변의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 자기 자신의 못남에 대한 비난으로 회귀하는 이 상황이 나는 시대적으로, 너무나 시대적으로 다가온다.

2.

한국의 자살률은 현재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2009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인구10만명당 자살자수)은 26명, 총자살자수는 12,858명, 전년 대비 684명이 증가했다. 매일 35명 정도가 자살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살률은 계속 증대하고 있는데, 대체로 80년대에 비해 90년대 중반 이후 두 배 정도 늘었다. 자살률 역시 그 요인은 매우 복합적이겠지만, 97년 IMF 이후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자살은 분명히 사회적 타살의 측면을 갖고 있다. 실제로 자살증가율과 실업률 추이를 비교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경향에 있어서는 일치하는 부분을 꽤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자살과 실업이 우울증과 곧바로 연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고용이냐 실업이냐’의 문제가 아니라(사실 과거에도 실업 문제는 존재했다), 고용과 실업이 불분명한 상황,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기반이나 척도가 붕괴된 영속적인 불안정의 상황이다. 우리 시대는 그런 불안정 속에서, 그런 불안정한 상황으로 대중을 내몰면서 권력과 이윤을 축적하는, 아주 질이 나쁜 시대이며, 우리의 병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4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www.hira.or.kr)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9년 사이 우울증 진료인원은 매년 4%씩, 진료비는 10% 남짓 증가하고 있다. 2005년 우울증 진료인원은 43만 5천명이었던 것이 연평균 1만 8천 명씩 늘어 2009년에는 마침내 50만 명을 돌파했다. 자문을 맡은 정신과전문의는 우울증 환자 증가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명예퇴직이나 감원 등의 사회적 압박”을 들고 있다.

우울증 진료 인원과 진료비 추이(2005-2009)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우울증, 그리고 자살. 이 삼항의 비극적 연관관계는 분명해 보인다. 2008년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파견직 노동자가 백주대로에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다. 그때 일본의 어느 비평가는 내게 일본 사회의 높은 자살률을 언급하며, 일본 사회에서는 스스로 죽거나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자신을 죽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 해 3만 명 가까이 이렇게 죽는 것은 전쟁 못지않은 끔찍한 학살이라는 말과 함께.

우울증과 자살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제레미 홈스는 칼 메닝거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 바 있다. “칼 메닝거는 세 가지 소망이 자살을 실행에 옮기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 소망이란 살해하고자 하는 소망, 살해당하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죽고자 하는 소망이다.”(제레미 홈스, <<우울증>>, 이제이북스, 69쪽) 아마도 우리는 신자유주의와 우울증, 그리고 자살이라는 항목들에 이어 ‘묻지마 살인’의 증가도 첨가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3.

프로이트의 짧은 논문 <슬픔과 우울증>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극단적인 ‘자기애의 상실’인 우울증이 사실은 깊은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에 집중된 리비도가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지 않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 그래서 자기 안의 한 부분을 ‘사랑하는 하지만 미워하게 된’ 대상과 동일시하고, 자신을 떠나버린 사랑하는 대상인 양 공격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움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자기 멸시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지극한 자기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

어찌 보면 우울증 환자의 자기 포기에는 포기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증이라는 이 비극적 상황 속에서, 아니 그렇게 지독한 자기 파괴의 질병으로 발전하지만 않는다면 이 ‘우울’의 정서 속에서, 이 시대에 대한 불화와 저항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이 끔찍한 시대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어떤 욕망과 사랑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금 <위클리 수유너머>에 번역 연재 중인 <<다가오는 봉기>>의 저자는 우울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울증에 빠져 있지 않다. 우리는 지금 파업 중이다. 관리받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우울증(depression)’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이행이며, 정치적 탈퇴(désafilliation)를 향한 작별인사(au revoir)이자 회피이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 시대의 명령에 ‘깊은 침묵’으로, 심각한 ‘기능부전’으로 대답하는 우리 신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우리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의 저 끔찍한 명령에, 어떤 극단적인 ‘무력감’으로, 깊은 ‘어둠’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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