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

– 유토피아도 없는 세대

수유너머N이 있는 북 아현동은 장마가 끝나자 마자 재개발이 될 것이다. 연구실이 이사 온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또 다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는 지은 지 30년쯤 된 건물들에서부터 갓 지은 건물들까지 용도, 종류가 다양한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있다. 언덕을 오르면 맞은편 아현동 고개와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 멀쩡한 건물들, 이제 막 익숙해지기 시작한 골목들이며, 가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니 현기증이 난다. 이제 ‘뉴타운의 고장 서울’의 재개발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 이 동네 사람들도 다른 오래된 동네 사람들처럼 화분에 꽃 보다는 먹을 것을 심어 빽빽하게 늘어놓았다. 스티로폼 박스를 화분 삼아 심어 놓은 고추, 잘 열리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 좁은 화분에 심은 호박은 시들어 누렇게 떠버렸고, 가지에, 오이에 집집마다 경쟁하듯 좁은 대문 앞에 계단 난간에 햇빛 들어오는 곳이라면 어디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키우느라 난리인데, 나는 이것을 ‘농경본능’이라고 부른다. 이 화분농사는 단순히 몇 가지 작물을 싸게 먹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힘들고, 유기농 재배를 하려는 것이라고 보기도 힘든, 그저 땅에서 뭔가 기르는 게 좋아서 하는 것이다. 골목에 즐비한 고추 화분들을 보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아줌마 아저씨들의 정서의 균열을 본다. 그들은 낡은 동네를 싹 밀고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지만, 아직 시골에서 느꼈던 흙이 주는 안락을 작은 화분에서라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화분농사에서 보듯이, 농촌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왔던 부모세대에게는 목가적 여유를 즐기는 삶이라는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그런데 도시에서 태어나, 대형 쇼핑몰과 마트에서 여가를 보내며 소비의 미덕을 교육받은 세대에게 유토피아는 무엇일까? 지속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사회일까?

일본의 시인이자 운동가 타니가와 간은 50년대 후반 일본 고도 경제 성장에 의해 자신이 실천하였던 코뮨의 이상이 위협 받고 있던 시점에서 ‘다양한 모순을 품고 있는 세계를 한 점으로 응축시켜 보는 것은 가능할까 어떨까. 세계를 응축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 현대시의 역사적 자각 1958년 7월) 라고 토로 하였다. 특히 구소련 붕괴 후 타니가와 간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체제를 넘어 서로 의존하고 보완하는 하나의 권력 시스템을 낳는다. 발전과 변혁을 향한 희망을 삼키면서 성장해 가는 다두의 히드라, 거대한 아나콘다.’ (1990년, 개인 기록풍의 예감)라는 표현으로 괴물에 먹혀버린 세계를 묘사한다. 그렇다면 아나콘다 뱃속 안에서 태어난 도시 세대들이 유토피아를 그리는 게 필요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고향이라 할 만한 곳도 딱히 없고, 낙원의 이미지도 없는 도시세대가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대체 무슨 장치가 필요한 것일까?

– 특성을 버린 남자

오스트리아 사람 로베르트 무질도 백 년 전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특성 없는 남자’는 1930년대 합스부르크 왕국이 무너져가고 1차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 모든 전통적 가치관이 소멸되어가는 상황에서 비엔나의 한 특성 없는 남자가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세밀한 보고서이다. 사람들이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는 시대, 자본이 모든 가치를 빠르게 대체 하고 있는 시대, 군인이 더 이상 용맹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그냥 직업이 된 시대에 그는 산산이 부수어져 가는 시대를 단단히 묶어 줄 무엇인가, 아니 본인만이라도 열중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인 무엇인가를 찾아 ‘인생 휴가자’로써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특성’ 혹은 ‘어떠한 인상’ 이라는 것은 일상 세계 속에서 사회와의 관계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지만 주인공 울리히는 한 발짝 떨어져 나와 사회적, 도덕적 구애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특성 없는 남자’가 된다. 특성 없는 남자의 무대는 카카니엔 왕국(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 이 왕국에서는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의 즉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대축전을 독일에서 준비하는 것을 보고, 이에 질세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 대 축전을 독일과 병행하여 대대적으로 계획하는 국가 대 국가의 경쟁사업인 ‘평행선 운동’이 추친 되고 있었다. 이 운동을 전 국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지도 이념을 찾아 혈안이 되어 정치인들 문화인들이 모여 토의 하지만 구체적 계획은 나오지 아니하고 소모적이고 공허한 논쟁만 이어지자 이에 괴리감을 느낀다. 울리히는 평행선운동에 염증을 느끼고 경직된 현실에서 물러나고자 했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동안 왕래가 없어 잊고 있었던 누이동생 아가테를 만나게 된다.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곧 파멸을 맞고 울리히는 또다시 새로운 중심을 찾아 떠난다. 이 소설은 무질이 20세 때 구성하여 64세에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600페이지를 넘게 집필하였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이 시대의 중심을 잡아 줄 가치를 찾는 여정에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어차피 무리이자 억지가 아니었겠는가. 저자의 죽음으로 소설 마무리하기는 아마도 세밀하게 고안된 계획일 수도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의 집, 현대의 초상

소설 초반에 묘사되는 특성 없는 남자의 집은 이 소설의 구조와 종착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울리히는 평범한 집을 혐오했기 때문에 외곽의 성을 한 채 구하여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 양식의 정원을 지나면 사냥 혹은 사랑을 위해 지었던 웅장하지 않은 작은 성이 나온다. 본관은 17세기의 것, 정원과 1층은 18세기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건물의 겉은 19세기에 개축하였고 조금 손상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체적인 인상은 서로 겹쳐 찍힌 사진처럼 약간 불안하였다 … 그의 집을 그가 손질하기 시작했을 때 성경에서 말하듯이 사실 그가 지금까지 기다리기만 했던 하나의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그의 작은 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 속이 후련한 상태를 맞이했던 것이다. … 현대인은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는다. 그렇다면 그는 병원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제안을 어느 훌륭한 건축가가 그에게 던졌으며 실내디자인의 다른 개혁가는 건물 내부의 벽을 고정시키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럴 것이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며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발전해야지 서로 떨어져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어느 순간이든 가능하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은 이미 세 가지 양식으로 보수된 상태였으므로 그런 현대식 요구를 다 수용할 여지가 없었으며 이것은 울리히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결국 집안 가구를 미래식으로 손수 디자인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육중한 인상의 의자를 생각했다가, 좁고 합목적적 가구가 생각이 났고, 콘크리트 양식이 떠올랐다가 갑자기 소녀같이 가냘픈 양식을 떠올렸으나 결국 디자인을 결정하는 대신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심 없는 이동에 불과했다. 이것은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증식하는 현대의 특징이며 그 특이한 기하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그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방만 더 생각해 냈다.

앙리 르페브르의 고민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 재빠르게 소비 사회로 변하는 프랑스의 60년대, 상품으로 가득한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르페브르가 천박한 유행의 시대를 넘기 위해서는 양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혁명을 ‘축제’로써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축제는 구성원들의 감각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축제는 단발적이고 산발적이다. 매일 매일이 축제라면 그것이 축제이겠는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지 어떤 양식으로의 회귀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회귀했던 러시아 혁명기의 미술은 결국 구태의연한 키치가 되어 버렸다. 순간적 안락을 주는 복고주의를 경계하고, 중심 없는 이동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아나콘다 뱃속을 찢고 나오려면 지금 도시세대에게 필요한 감각이란 무엇일까.

응답 3개

  1. 공감남말하길

    특성없는 남자를 통해 나를 보는거 같은 느낌은 뭘까? 아마도 나도 그렇게 특성없는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 가고 있는듯…

    오랜 고립으로 인한 사람들과의 소통의 어려움. 그것으로 부터의 탈피의 노력 장시간의 걸친 고립이라 소통의 방법을 익히려면 아마도 그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글 덕분에 500페이지이상의 특성없는 남자를 읽을 목록에 추가시켰다.

    마지막으로 박은선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가 어떤것일까 궁금해진다.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eunseon park, eunseon park. eunseon park said: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 http://suyunomo.jinbo.net/?p=5316 […]

  3. 지나가다말하길

    무엇일까요? 아나콘다 뱃속을 짖고 나오기 위해 우리 도시세대에게 필요한 감각이. 글 지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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