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새벽 길 전철에서

- 김융희

처서가 지나면서 밤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여름철 하지 무렵엔 네 시경이면 벌써 밖이 환해 졌는데, 오늘 아침엔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아직도 밖이 한 밤중처럼 깜깜합니다.
요즘 계속된 비는 지금도 천둥 번개와 더불어 세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세찬 비바람에 어둠이 깔린 이른 새벽에 교회를 나서려니 귀찮아 언짢습니다.

아직은 승객들 많지 않아 한가한 전철입니다. 부족한 수면을 채울까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지내다말고 눈을 뜨니 바로 건너편에 할머니가 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조그만 종이쪽지를 열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팔십은 되어 보이는 곱게 늙으신 작달막한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나의 졸림은 멀어지고 호기심으로 점점 긴장됩니다.
할머니의 그 작은 종이쪽은 복사된 찬송가의 낱 장이었습니다.
열심히 읽고 또 읽고 계십니다. 깊이 속으로 계속 찬송가를 부르고 계신 듯
싶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진지합니다.

한참을 그리 하시던 할머니는 드디어 곱게 그리고 아주 작게 쪽지를 접었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뒤지더니 크기는 담배갑 만큼의 그러나 부피는 두 배도 넘어 보인
책자를 꺼내어 조금전 작고 곱게 접은 종이쪽지를 책갈피에 끼워 넣습니다.
이처럼 그 할머니를 바라본 나는 어느새 열심히 살피는 관찰자가 되었습니다.

그 작은 책자를 가방에 넣으리란 나의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책자를 펼치더니 읽기를 시작합니다. 읽다 말고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
진지하게 읽는다 했더니 아닙니다. 읽으시다가는 입을 벌리시고 웃으시는 모습이
자주 반복됩니다. 그 모습이 너무 변화 진지하여 마치 신들린 무당의 경지였습니다.

무었이 그리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면의 웃음을 만들어 내고 있을까???….
그 담배갑같은 책자는 놀랍게도 손으로 베낀 성경이었습니다.
아마 손수 쓰시어 만든 사경책자일 듯 싶습니다. 이렇게 한 시간여.
아직도 그 할머니의 책읽기는 계속되는데, 나는 전철을 내려야 했습니다.

날은 밝아졌는데 아직도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책읽는 할머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떠오릅니다. 빗길을 걸으면서
어쩐지 나는 마음이 계속 무겁습니다.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나를 돌이켜 보자니 갑짜기 할머니 앞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아무렴 낮에 땀흘려 일을 좀 하였기로, 요즘처럼 긴긴 밤을 거추장스럽게
보내면서 나는 벌써 책읽기를 멀리 한 것이 이미 오래전이었습니다.
억수 장마속 무성한 잡초에 지친 바쁜 일상이라며 타령만을 계속했습니다.
아주 당연한 것 같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름을 내내 보내면서 나의 생활 리듬은 많이 변했습니다. 일 주일이면
너뎃 차례의 서울 나들이가 주일에 교회를 말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만나는 일, 찿는 일도 줄었고, 그저 집에서 작물을 돌보고 잡초를 뽑는 일로
긴 여름을 보냈던 것입니다. 너무 단조로운 일상이었드랬습니다.

그동안 교회생활을 돌이켜보면 나의 믿음도 타성에 베인 거의 형식이었을
뿐입니다. 팔십 대의 할머니의 열성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여 나는 그 할머니가 성모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이른 새벽 교회를 가는 길에 할머니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나이 팔십의 고령임에도 할머니의 전혀 흩트러짐 없는 꿋꿋함이
아름다웠습니다.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다시 생활 리듬을 찿아 나도 일상이 바뀌어야 겠습니다, 저 할머니처럼!
나는 좀더 진지하며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겠다고 줄곧 다짐합니다.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응답 2개

  1. 김융희말하길

    추장님 제주 계신가요? 전혀 몰랐던 일이었슴니다.
    궁금합니다…………. 더 알아보고 연락 드릴께요.
    금년은 태풍도 잦은데, 조심 조심 하시고 꼭 뜻 이루시길_()_

  2. 고추장말하길

    선생님 건강하시지요? 제주에 내려와 그나마 한 일이라는 게 김장 무를 조금 심어본 것이어서-그나마 대부분 벌레와 태풍에 빼앗겼지만- 지난 번 선생님의 배추와 무 심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더니, 오늘은 제가 맘으로 한 결심을 선생님 글에서 다시 보게 되네요. 선생님께서 삶의 리듬을 되찾고 더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걸 보며, 제 얼굴이 많이 붉어졌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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