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아이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 풍경지기 박혜숙

풍경지기의 책이야기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휴먼 앤 북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2004년 어느 날, 체격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1학년 때부터 3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체격검사를 하는 날은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자랐구나!’ 하고 감동하는 날이 된다.

우리 교실이 시끌벅적하다. 웃음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우스갯 소리가 들린다. 우리 반에서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아이가 저울에 올라선 것이다. 우리 반 최고 기록을 보려고 아이들이 몰려든다. 저울에 올라간 아이는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줄여보려고 손가락마저 긴장한 채 눈금을 내려다보고 있다. 장난기 가득한, 한 아이가 저울에 올라선 아이 몰래 저울 위로 자기 발을 살짝 올려 눈금을 더한다. 우리 반 최고 기록이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나도 한참을 웃는다.

모의고사 시험을 치른 날이면 오후에 채점을 한다. 채점을 한 후에 친구와 점수를 비교해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친구와 장난치다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는 장난꾸러기의 기념사진을 찍고 긴장한 채 수능 원서를 쓰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체육대회에서 씨름하는 모습, 축제 때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모습 등 아이들 모습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는다.

처음에는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마다 도망가거나 피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제 할 일을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찍힌 사진보다도 카메라를 들고 자신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아이들 모습을 흑백필름에 담은 후 필름을 현상하고 암실에서 인화를 한다. 인화용액 속에 담긴 인화지에 서서히 아이들의 환한 모습이 드러나면 아이들과 마주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흑백사진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김영갑 선생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으며 그때 기억들이 떠올랐다. 김영갑 선생은 충청도가 고향이다. 한때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그곳 풍광에 매료되어 아예 제주도에 정착했다. 그의 사진 작업은 고행이었다. 돈이 없는 그는, 밥값을 아껴 필름과 인화지를 샀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방을 구하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도 뭍에서 온 그에게 방을 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역사적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낯선 그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해안가 마을에서 중산간 마을로 옮겨가면서 사진 작업을 했다.

힘들게 작업한 그의 사진 속에는 섬에 대한 애정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리고 섬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삶을 존중하는 마음이 소중하게 담겨있다. 그는 제주도와 제주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옛 방식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주로 만났다. 그들은 척박한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는 그들이 들려주는 제주도의 삶을 만났고 그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노인들을 따라 들로 나가 일을 도우며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과정은 제주도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노인들과 지내는 동안 내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럴수록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제주도의 유명인이나 예술가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노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내겐 더 좋았다. 제주 사람들의 삶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질수록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카메라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내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무덤이 보이고 동자석이 보였다. 바람과 싸우며 척박한 땅에서 살아온 그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유배의 땅에서 변방의 고달픈 삶을 극복하기 위해 토박이들은 ‘이어도’라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러면 이어도의 실체가 무엇인가. 무덤을 이해하지 않고는 실마리를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덤을 찍었다. 무덤을 찍다보니 장례식과 굿판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무덤을 찾아다니다 오름들을 만났다. 그렇게 나의 제주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중략)

제주의 노인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기 몫의 삶에 치열하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몫의 양식은 스스로 해결하는 노인들을 통해 나는 해답을 찾곤 했다. 노인들은 나에게 답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만난 노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크든 작든 한 덩어리의 한을 간직하고 있지만, 묵묵하게 자기 몫의 삶에 열중한다. 온갖 두려움과 불안, 유혹 따위를 극복하고 삶에 열중하는 섬의 노인들은 나의 이정표였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내 삶의 길라잡이」중에서

이렇게 그는 섬을 담아간다. 제주도의 바람, 구름, 오름, 억새, 들판, 바다 그리고 노인과 해녀……. 그의 사진을 보고, 그의 글을 읽노라면 바람 부는 들판에서 카메라를 인연의 끈으로 그 풍광과 진정으로 만나고 있는 그를 상상하게 된다. 이런 경험, 이런 시간 속에서 그는 제주도 사람들이 꿈꿨던 이어도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꿈꾸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닐까?

섬을 담아가던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루게릭 병이란 진단을 받는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병은 진행된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병마와 싸우던 나날들 속에서 그는 쓰러지는 그날까지 하루하루를 희망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사진 갤러리를 만드는 일에 몰입한다. 다른 사람들은 만류했지만 결국 그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사진 갤러리 속에 담아내게 되고 그 곳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에 그는 그가 정성껏 만든 두모악 갤러리에서 고이 잠들었다.

내가 존경하는 분의 소개로 김영갑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김영갑 선생의 사진을 보며 ‘겸손하다는 것, 낮춘다는 것의 의미’를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하늘을 담은 사진을 보자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그곳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마음을 담아 찍은 사진작품들 속에는 그곳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 그곳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이 온전히 담겨있었다. 그에게 카메라는 제주도의 자연 속으로, 그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사진을 배우던 시절, 흑백 사진에 매료되었다. 컬러 사진의 화려한 색감이 따라갈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아이들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고 행복했다. 카메라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낯설어 하던 아이들이 그들의 삶을 조금씩 열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조금씩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해 학생의 날에 아이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일년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밤늦게까지 게시판에 전시할 수 있도록 준비 했다. 다음날 아이들보다 일찍 학교에 가서 교실 벽면마다 준비한 사진을 붙였다. 그런 후 평소처럼 아이들을 맞았다. 아이들 반응은 예상외로 무덤덤했다. 괜한 짓 했나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반에 수업을 하고 나오신 선생님들마다 감탄을 하시며 아이들 반응을 전해 주셨다. ‘우리 담임 쌤이 선물해 주셨어요.’하고 자랑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했다.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사진을 떼려고 하니 아이들은 며칠 더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쉬는 시간이면 다른 반 아이들이 와서 구경을 하고 갔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아이들이 졸업하는 날 다시 전시를 했다. 아이들의 졸업식을 축하하기 위해 오신 부모님들이 아이들 사진을 보시며 무척 행복해하셨다.

지금 나에게 그때의 사진이 주는 의미를 어렴풋이 알겠다. 내가 아이들을 대상으로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에게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갑 선생의 사진에 담긴 의미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