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카메라 들고 떠난 그들의 색계(色戒)

- 은유

3년 전 즈음, 잿빛 톤의 잔잔한 격정이 흐르는 포스터에 끌려서 본 영화가 있습니다. 니콜키드먼 주연의 <퍼>입니다.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울프의 생애를 보여주었던 그녀가 또 한 번 위대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완벽하게 그려냈더군요. <퍼>는 사진가 디앤아버스Diane Arbus(1923-1971)의 자전적 영화입니다. 디앤아버스는 꽤 유명한 사진작가입니다. 장애인, 기형아, 성전환자 등을 ‘대놓고’ 찍었거든요.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허문 사진가로 불립니다. 다큐사진을 거대담론에서 한 개인의 심리로 옮겨왔다고도 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질문을 던졌다고도 평가됩니다.

<퍼>는 디앤아버스의 생애를 전부 담지는 않습니다. 잘 나가는 패션사진가 남편의 어시스턴트이자 두 딸의 엄마였던 디앤이 사진작가로 서기까지의 3개 월 간 초기단계를 담습니다. 디앤이 ‘내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먹는 최초의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공식석상에서 남편 옆에서 근사한 모피 숄을 두르고 ‘누구의 아내’로 인형처럼 서 있는 그녀에게 한 부인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요. 그러자 “모델의상도 챙기고 다림질도 하고 남편을 돕는다”며 머뭇머뭇 말하다가 울컥합니다. 그 자리를 뛰쳐나갑니다. 그 부인이 무심코 던진 돌이 그녀를 흔들어놓습니다. 때가 무르익었기에 그렇게 강한 통증을 느꼈겠지요.

축제였던 인생이 느닷없이 숙제가 되어버린 디앤. 단호한 표정으로 까맣고 무거운 카메라를 하얀 목덜미에 척하니 걸칩니다. 카메라는 등 떠미는 힘이 있습니다. 문을 열죠. 그런데 삶의 무대가 집안이었던 그녀는 난감합니다. 어디로 가야하나요. 그런 그녀에게 열쇠가 떨어집니다. 하늘에서 운 좋게 떨어진 게 아니라 억척스런 그녀가 발견합니다. 세면대에 물이 막혀서 배수구를 고치던 중 홈통에 걸려 있던 털 뭉치와 열쇠를 힘껏 뽑아냅니다. 그 열쇠를 들고 나섭니다.

털뭉치의 주인공은 다모증에 걸린 위층 남자 라이오넬입니다. 그는 얼굴과 온몸이 온통 털로 뒤덮인 짐승남이고 그녀는 공주님 같은 원피스 입은 상류층 부인. 미녀와 야수처럼 둘이 사랑에 빠집니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는 한 계단 위, 길 밖 세상으로 자꾸 이끌립니다. 길 아닌 곳으로 들어서지 말라는 계(戒)를 깨버립니다. 그 곳에서 삶에 색(色)을 얻습니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천재성을 일깨워갑니다.

그녀는 라이오넬을 있는 그대로 감쌉니다. 어설픈 연민도 차이의 ‘승인’도 아닙니다. 둘은 차이를 ‘생산’으로 승화합니다. 서로에게 감응하고 촉발합니다. 디앤은 라이오넬의 친구들인 난장이, 거인, 성전환자 등과 친구가 됩니다.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파티도 벌입니다. 그녀는 변해갑니다. 남편은 온통 ‘서커스단 같은 무리들’ 뒤치다꺼리하는 당신이 낯설다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내가 당신에게 사진 찍으라고 했지 집안 내팽개치라고 했느냐”고 소리도 칩니다. 순간, KBS드라마 <사랑과 전쟁>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외려 이해받지 못하는데 영광이 있다는 듯 의연합니다. 고집스런 예술가의 기질이 돋보입니다. 우리는 상대편에게 무엇인가 말해주고 싶어 할 만큼 충분히 다르지만, 또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비슷하다는 걸 그녀는 잘 압니다. 디앤은 자신의 출구가 되어준 라이오넬을 단 한 번 원망합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고백하는 라이오넬에게 시린 눈물 뚝뚝 흘리며 말합니다. “이러려고 날 사랑하게 했나요.”

그러려고 사랑했죠. 라이오넬은 디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많은 친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의 소명을 다하고 그는 갔습니다. 이 세상에 라이오넬은 없지만 그녀는 혼자서도 갈 곳이 많아졌죠. 카메라 들고 또 다른 수많은 라이오넬을 만나러 디앤은 길을 떠납니다. 뒷모습이 아름답고 강렬합니다. 라이오넬의 온몸을 덮었던 털로 만든 긴 망토를 걸쳤거든요. 디앤아버스의 완벽한 ‘소수자-되기’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32호 위클리 수유너머에서는 소통(되기)의 예술 ‘사진’을 다룹니다. 20여년 길없는 길을 떠돌며 인식의 ‘계’를 깨고, 레닌부터 만화까지 사진의 ‘색’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다큐사진가 이상엽을 전선인터뷰에서 만났습니다. 또 이번호부터 ‘임종진의 사진공감’이 새로이 연재됩니다. 그가 캄보디아에 머물며 찍은 사진들과 <한겨레> 재직 시 지면에 싣지 못한 위험한 B컷을 공유합니다. 자기 안에 들끓는 소수성을 셔터로 폭발시키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진가가 ‘디앤아버스’라네요. 카메라 들고 떠난 그들의 색계, <퍼>만큼 감동 돋는 사진들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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