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5

- 김융희

코스모스야 고맙구나

태풍 “말로”가 남해안을 지나고 있다는데, 이 곳은 맑고 쾌청한 날씨입니다.
많은 상처를 남기고간 “곤파스”도 이 곳엔 비만 좀 내렸을 뿐, 조용히 지나가 주어
다행중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이 너무 많은 상처로, 특히
농작물과 과일의 피해지역 농가를 생각하면 나만의 무사함이 버거운 마음입니다.

제발 이제는 그만! “농사일지” 때마다 <짖궂은 비, 무성한 잡초로 바쁘고 힘들다!>
이들 낱 말을 더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인용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모처럼 쾌청한 날씨가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두 번째 심어놓은 배추 무우 싻이
모두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는데도 상관 없습니다. 저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처럼 멀리 멀리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참아 그럴 수도 없나봅니다. 녹아 없어져버린 저 허전한 빈 공간들,
터질 듯 튼실한 결실의 늘어선 풀씨를 보면서 금방 생각이 뒤바뀌고 맙니다.
절충의 대안으로, 손봐야 할 농기구들… 예초기, 전기 톱등을 챙겨 싣습니다.
기계치인 나는 늘 그의 신세를 지곤 하는데, 오늘 그 친구가 바빠서 걸린 일이
없기를 빌면서…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짖고있는 손재주 있는 친구를 찾아갑니다.

벌써 고개 숙인 나락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풀섶에 마구 자란 메밀도 꽃이
한창이고, 논둑에 심은 콩의 열매가 터질 듯, 나르는 메투기도 자주 보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푸른 창공입니다. 무더위에 아랑곳없이 찾은 계절의 순환,
가을. 아직도 무더위에 지쳐 한 여름이라며 착각하며 지낸 내가 무안했습니다.
모처럼 나들이를 잘했다는 생각으로 콧노래라도 불러보고 싶습니다.

마침 집에 있던 친구가 반갑게 맞아줍니다. 나는 가져온 농기구들 이것 저것을
꺼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맞은 그는, 찾는 나보다 더 반가웁나 봅니다.
하긴 당연하지요. 인적이 드문 민통선 안의 생활이란 찾아준 사람이 늘 그립기
마련입니다. 그런줄 알기에 이처럼 예고도 없이 당당하게 찾은 발걸음이였습니다.

그는 시원한 냉수와 함께 벌써 먹거리부터 내어 가져옵니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이런 곳 생활은 도시에 비해 참 편리해 좋습니다. 아무리 크고 넓은 집이래도
도시생활은 한 사람의 손님을 맞기에도 부담이 가지만, 농촌은 단촐한 살림에
초라한 작은 집에서도 손님맞이가 별 부담이 없습니다. 그것이 시골생활의 매력으로
우리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요, 더불어 사는 참 길이라 여겨집니다.

묵은 김치 있겠다, 이곳 저곳을 흩어 쌈거리를 마련하고, 고추밭에서 풋고추를
따오면 금방 지은 밥맛이 꿀맛이요, 여기에 반주로 막걸리 아님, 소주라도 한 잔
나누다 보면 그동안의 밀린 하곺은 이야기들이 실타래도 명주 실타래처럼…..
이제는 이야기를 끝내야 가져온 나의 농기구들을 손볼 터인데…

잘 손봐준 농기구들을 다시 챙겨 싣고 나는 집으로 향합니다. 아쉬운 듯
그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보이지 않는 큰길에 들어서니,
올 때는 보지 못했던 꽃길입니다. 코스모스 같은데, 잎이 매우 싱싱해 보이며
작달막한 키에 하늘거림이 달리도 보인, 매우 깜찍하고 예쁜 꽃무립니다.
살펴 보았더니 코스모스였습니다. 신품종일까? 너무 예뻐 보였습니다.

집에 오자말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는 길 코스모스가 너무 예쁜데
신품종 같으니 꼭 꽃씨를 많이 받아주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간곡한 부탁을 그는 너무 싱겁게 받아드린 것 같았습니다. 필요하면 우리 집
주위에 꽃씨를 받으램니다. 귀찮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꽃씨를 받아 두었다가 내년 늦은 때(말복 무렵)에 심으면 그처럼 작게
자라며 싱싱한 잎에 예쁜꽃을 피우게 된답니다. 더욱이나 요즘 여름이면
벌써 피어버린 것과는 달리, 가을 정취의 코스모스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오해부터 했던 내가 또 민망스럽습니다.

이것 말고 민망스러운 일이 나에겐 또 있습니다. 여럿이 모여 여름에 피는
코스모스꽃이 화제가 되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여름에 피는 코스모스를 보고 말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나는 시침을 때고 말했지요. 코스모스에게 물었더니,
“옛날엔 가을이 참 좋았기에 긴 무더위의 여름을 참고 기다려 아름다운
계절에 꽃을 피워 가을을 함께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을도 개떡같이
변한 계절을 위해 그 고통을 무릅쓰고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
많은 구박질중에도 더러는 말은 된다고 생각해주는 이도 있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있게 말했고,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써먹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 보니 코스모스는 나의 잘못을 질책한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지극히 인간다운 잘못된 말이랍니다.
무언가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랬을 뿐, 이처럼 조건에 맞는 것을 인간들처럼
일부러 심통을 부리는 짖은 아니랍니다. 역시 가을엔 코스모스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맞춰 피워준 너의 모습이 정말 고맙다. 코스모스야!

군청의 도로 손질 짖, 제초제로 사라져버린 집앞 코스모스길.
코스모스 씨앗이 익으면, 나는 그 길을 위해 꼭 많이 꽃씨를 따모을 것입니다.

응답 4개

  1. 김융희말하길

    쉽게, 쉽게 오는 계절보다
    어쩜 더 쉬울, 쉬웠어야 할 우리들
    요즘 너무 편리한 교통에
    지척에 있으면서도
    머뭇거리며 망설이며
    그저 멀리 서서…………….

    우리 근간에 탁주 한 잔. . .
    곧 연락하지, 기다려요.

  2. bada말하길

    가을맛 지대로인 선배님의 글을 보며 흥얼거리는 노래-

    ‘여름은 벌써 가 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3. 김융희말하길

    불편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니 다행, 고맙습니다.

    이곳에 코스모스가 한참입니다. 가을의 코스모스길이 좋습니다.

    시간 되시면 오세요. 꽃길도 좋고, 길옆에는 순대국, 막국수등… 먹을만한 음식들도 있습니다. 제가 안내할게요.(010-3399-6622)

  4. 말하길

    정신이 산만하고 괜히 마음만 바쁜 날들이었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정말 순식간에 가을이 왔네요. 코스모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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