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가족’의 비극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 안티고네

테네시 윌리암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희곡의 배경은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한 집에 모인 떠들썩한 가족의 모습이다. 형님 내외인 구퍼와 메이는 다섯 아이를 대동하고 곧 여섯째가 될 아이를 임신했다. 반면 동생 내외인 마거리트와 브릭은 학생시절부터 연애를 했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결혼한 젊은 부부다. 브릭은 한때 잘나가던 축구 선수였지만, 지금은 부상을 입은 채 스포츠 중계일도 그만둔 상태. 마거리트는 여전히 아름답고 조금은 앙큼한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상냥하고 좋은 아내. 하지만 브릭과 마거리트는 아직 아이가 없다.

영화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1985

자수성가를 이루어 미시시피에서 이름난 부자가 된 아버지의 예순다섯번째 생신. 경사스럽고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는 은밀한 긴장감이 흐른다. 사실은 오늘이 아마도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에게는 그냥 경련증이라고 말해 두었지만 사실 말기암을 앓고 있는 아버지는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것이다. 따라서 이번 생일파티는 어쩌면 마지막으로 모든 가족이 모이는 자리가 될 것이고, 이 집안의 두 며느리인 메이와 마거리트는 아버지의 유산을 두고 사나운 고양이처럼 안달복달하며 신경전을 펼친다. 메이는 자기네들은 아이가 많으니 농장을 물려 달라고 할 셈이다. 반면 마거리트는 아직 아이는 없지만 충분히 아이를 가질 수 있고, 또 아버님이 자신의 남편인 둘째 아들 브릭을 편애한다는 것을 무기로 내세운다.

이야기의 초점은 브릭과 마거리트에게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아이가 없을까? 여기서 테네시 윌리암스는 조심스럽게 브릭의 어떤 우정에 대해 말을 꺼낸다. 브릭에게는 학창시절부터 친구였고 같은 풋볼클럽에서 환상의 콤비로 활약했었던 ‘스키퍼’라는 친구가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단순한 친구사이가 아니라는 점. 그렇다고 해서 흔히들 상상하는 동성애 관계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브릭이 너무도 진실하고 순결하게, 스키퍼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데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자신 인생에서 단 하나의 진실은 아내 마거리트와의 사랑이 아니라 스키퍼와의 우정이었다고 고백한다.

마거리트 또한 남편과 스키퍼의 관계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브릭과의 말다툼 중, 마거리트는 무서운 사실을 고백한다. 남편과 스키퍼 간의 긴장감을 견디다 못한 자신이 축구 시즌 중에 스키퍼에게 접근해서 다음과 같은 위험한 말을 했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당신과 브릭이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와 자요.’ 문제의 그 밤 이후, 스키퍼는 이 사실을 브릭에게 고백하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희곡 상에서 대략 브릭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마거리트와 동침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과 유산 분배의 신경전을 펼치는 와중에, 마거리트는 브릭에게 외친다. 그때 자신과 스키퍼는 “우리 둘은 서로 상대방을 당신-브릭-이라고 생각하고 잤다”고 말이다. 이제 죽은 스키퍼를 제발 잊고, 늘 스키퍼와의 관계가 오해받지 않도록 방패용으로 내세웠던 살아있는 고양이 매기-자기-를 좀 봐달라고. 우리는 유산을 위해 지금이라도 아이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여러 가지 일들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난 깊은 밤, 희곡은 브릭과 마거리트 간의 화해를 암시하듯 이 둘을 침대로 이끌며 끝이 난다.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가족 간의 갈등, 소통의 부재 혹은 이 둘의 화해보다도 마거리트가 브릭에게 외친 그 말이 더 강하게 와 닿았다. 유산상속은 이성애 가족제도의 핵심이다. 족외혼으로 여성을 교환하고 자식을 낳아서 부계를 보존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가문의 재산을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함이다. 바로 그 긴장이 흐르는 밤, 애써 외면하던 남편의 비밀을 들추며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마거리트의 분노에 떨린 한 마디. “우리 둘은 서로 상대방이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짓을 했어.”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긴장된 순간, 유산과 자녀 유무라는 이성애의 그림자가 가장 진하게 드리워진 공간에 날아든 이 한마디 말. 마거리트의 이 말은 아버지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강제적 이성애를 중심으로 한 가족 안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는 브릭의 불안정한 지위를 단번에 드러낸다. 그리고 스키퍼와 마거리트가 보낸 그 슬픈 밤의 진실을 보여준다.


지주의 아들이라는 배경, 미남자, 왕년의 풋볼스타. 이 모든 우월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이너다. 바로 자신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스키퍼와의 관계 때문에. 애초에 스키퍼와의 관계를 오해받지 않기 위해 결혼한 마거리트와의 얄팍한 행복도 스키퍼의 자살 이후로 부서져버렸다. 이런 그를, 가족에 매어둘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또한 스키퍼는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님을 따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브릭 또한 터부시 되는 동성애를 저지른 적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아내를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스키퍼에게 마거리트는 그토록 사랑하지만 실제로는 단 한번도 연결된 적 없는 브릭과 맺어져 있는 존재였다. 즉 그와 마거리트의 결합의 순간 마거리트는 스키퍼에게 자신을 안아주는 브릭이었다. 반면 마거리트에게 스키퍼는 단 한번도 자신이 받아 본적 없는 브릭의 진정한 사랑을 받은 존재였다. 그녀는 스키퍼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끊어냄과 동시에, 남편을 소유하기 위해 브릭과 연결된 존재로서 브릭이 자기 자아처럼 사랑한 존재와 결합했다. 이처럼 스키퍼와 마거리트의 맺어짐은 성과 젠더, 동성애와 이성애가 뒤섞는 일이었다.

스스로도 퀴어였던 테네시 윌리암스. 그의 이 희곡은 흔히 ‘가족의 비극’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싸우고 갈등하고 추한 물욕에 시달리는 가족의 비극이 부각 될 때, 그 비극적인 가족이 생산하는 또 하나의 비극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족이라고 불릴 수 없고 사랑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없는, 이성애를 강제함으로써 유지되는 가족이 배제하면서도 생산해내는 퀴어의 비극이 말이다. 극 중 브릭은 항상 자신과 스키퍼가 ‘추잡한 동성애’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원정 경기를 가서 한 숙소에서 묵을 때조차, 잘 자라는 가벼운 악수 외에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았다. 이성애의 기준을 뒤흔드는 동성애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하지만 브릭의 지나치게 투명한 태도가 그의 특별한 친구 스키퍼의 목을 조르고 말았다. 쥬디스 버틀러는 사실 동성애는 이성애를 패러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패러디로 드러나는 것은 이성애 또한 원본없는 패러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석하게도 브릭이 자신과 스키퍼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특별한 관계나 특별한 성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했던 추잡한 동성애와도 혹은 기존의 이성애와도 구별되는, 브릭이 단지 우정이라고 부른 그런 형태의 사랑은 사실 없다. 오히려 브릭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과 스키퍼 사이에 이성애를 모방한 동성애적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스키퍼를 잃고 방황하던 브릭은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의 예순다섯번째 생일날 밤, 결국 아내 마거리트에게 이끌려 이성애 속으로, 가족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자기 사랑을 잃고, 자기를 부정하면서. 슬프지만, 가족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고 재생산을 해야 하고, 가업은 이어져야 한다. 스키퍼, 풋볼…. 모든 소중한 것들을 잃고 묘하게도 초연한 패배자의 매력을 지닌 브릭은 결국 가족 관계로 재편입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족’의 비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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