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즐겁게 존재하기

- 김대경

한달여 일의 제주에서의 체류를 마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제주로 떠날 때는 그동안 하고 있던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찜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약간 충격을 받기도 했다. 돌아와보니, 별일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동안 왠지 모를 께름칙함이 또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일까? 제주에서는 누리고 싶어도 누리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서울에 오니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는 데도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인터넷 당일배송을 통해서나 주변 가게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무슨 문제가 있으면 경비실이나 관리실에 연락하면 되고, 아이의 영어 공부도 주변의 학원들 중에 얼마든지 선택해서 학습할 수 있으니, 정말 완벽한(?)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제주에서는 그런 편리함과 선택적 행위가 불가능했기에 사실 많이 불편했었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포기하는 순간 마음이 덜 힘든데, 서울에서는 얻으면 얻을수록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털어버릴 수가 없다. 자발적 선택인 것 같지만 누군가에 의해 강요당하거나 조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제주에서 오름과 올레길, 한라산을 누비고 다니면서 마음이 갑갑하다거나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마음 속에서 꽉 쥐고 있던 무엇인가가 스르르 풀려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그 빈 자리를 자연의 소리와 감각이 채우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지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며 그 불편함과 이상함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지나치게 소유양식적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다고 한번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지독한 소유양식적 삶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려운 고전으로만 여기던 이 책을 나는 우연히 어느 논술 교사 양성과정 수업 시간에 접하게 되었다. 강의를 진행하는 선생님이 미리 이 책을 읽어오라고 했지만, 읽으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다 책장도 들춰보지 못하고 수업에 나갔다. 그런데 선생님이 ‘소유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잊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선생님은 억지로 기억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더 잘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잊는 것은 잊을 만하기에 잊는 것이고, 현재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나 강렬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잊으려 해도 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 책의 2장인 <일상경험에 있어서의 소유와 존재>를 함께 읽어나가셨다. 그 부분에는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 지식, 신념, 사랑’에 대해 소유양식으로 사는 사람과 존재양식으로 사는 사람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소유양식에 젖은 학생들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즉 배운 것을 잘 기억하거나 또는 노트를 소중히 간직함으로써 ‘배운 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생산하거나 창조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오히려 어떤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고나 개념에 다소 당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정한 양의 지식에 의혹을 만들기 때문이다. (중략) 존재양식을 가진 학생들의 학습과정은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며,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들으며, 자발적으로 그들이 듣는 것에 응답하면서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집으로 가져가서 암기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 개개인은 강의를 통하여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다. (‘학습’ 부분)

교사들의 관찰에 의하면, 강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받아 적는 학생은, 자신의 이해력을 믿으며 최소한 요점만 기억하는 학생보다 십중팔구 이해력이나 기억력에 있어서 떨어진다. (중략) 문맹자나 글을 겨우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산업화된 국가의 잘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멕시코에서 관찰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은 읽고 쓰는 능력이란 결코 흔히 주장되고 있는 것과 같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기억’ 부분)

소유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형의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 또 기탄없이 반응할 용기만 있다면 새로운 어떤 것이 탄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한 집착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 없으므로 대화 속에서 충분히 활기를 갖는다. 그들의 활기는 쉽게 전염되기 때문에, 가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토론’ 부분)

학생들은 학교교육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최소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한ㄷ. 그들은 저자의 주요 사상을 외울 수 있게 하는 독서교육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을 ‘안다’. 이른바 우수한 학생이란 여러 철학자들이 각기 말한 것을 가장 정확하게 외울 수 있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박물관 안내인과 비슷하다.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특정 지식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철학자에게 질문하고 그들과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독서 부분)

앗,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책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느끼고 생활하는 삶의 문제를 너무나 신랄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책이 발간된 지 꽤 세월이 흐른 걸로 아는데, 현재진행형으로 읽히는 것을 보니, 역시 고전은 고전인가 보다. 그리고 이 책은 지나온 내 삶의 궤적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해 준다.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줄곧 범생(?)으로 살아왔다.(어떤 사람이 교사가 되는지 생각해 보라) 그때의 스타일이 그대로 교사로서의 내 삶에 전이되면서 나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학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알게 모르게 강조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 즉 ‘소유’하는 지식이 늘어가면서 어느 정도 내 직업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도 가지게 되었다. 강남의 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부터는 숱한 강남 학원 강사와 비교당하며 평가와 수업에 완벽한 교사가 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고, 그동안 해 왔던 독서지도 경험이 쌓이면서 이곳저곳 연수나 관련 행사에 나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줄곧 가지고 살았나 보다.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던 일들에 흥이 나지 않고 오히려 부담과 의무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자꾸만 완벽해지려는 나 자신이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올해 휴직을 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수십 년 동안 공부하고, 책을 읽었지만, 왠지 공허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그동안 줄곧 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면서, 나 자신을 질책하고 변명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여지를 자꾸만 지워 가면서, 미뤄 가면서 살아왔다. 이제는 간절히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뿐만 아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감당하기 힘든 스펙의 무게에 짓눌려 즐거운 공부 대신, 엉덩이가 짓무르고 수없이 암기해야 하는 수험서의 문제들을 풀면서 현재를 견뎌내고 있지 않은가. 어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대치역에서 우르르 내리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보았다. 저마다 손에는 입시학원 문제집을 들고 있었다. 온갖 현란한 약력을 소유하고 있는 학원 강사의 수업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성격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오늘날 사회의 성격을 ‘시장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분주함’과 ‘능동성’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소외된 능동 즉 진정으로 활동하는 ‘나’ 대신 외부적 혹은 내부적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염려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유 중심의 사회적 성격이 지속될 경우에는 결국 모두가 파멸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어려운 길이지만, 비슷한 사람들끼리 연대하고 공감하면서 길을 만들어간다면, 우리의 교육 풍토와 사회 현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희망해 본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존재적 삶의 방식을 실천해 보고, 습관을 바꾸어 봐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진정으로 즐겁게 존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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