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사진이 아니야! ‘보이지 않는 폭탄’이지!

- 김형석(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우리는 모니터에서 밥 먹는 사람을 보고 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차명진 의원이다. 아니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차명진 의원을 찍은 사진을 보는 것이다. 이 사진은 지난 7월 24일 차명진 의원 홈페이지에서 태어났다가(?) 원본은 금세 사라지고 복제된 이미지만 인터넷에서 무수히 떠돌고 있다. 크기가 480×320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디지털 이미지는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져 사람들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하는(그래서 분노하게 하는) 거대한 폭탄이 되었다. 이 사진 폭탄은 이제 그 방향을 잃어 무작위로 인터넷 이곳저곳을 가리지 않고 터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그냥 흘려보면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봐야 폭탄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 사진 한 장은 폭탄이 되었을까?

이 ‘잘 찍은 한 장 사진’을 무서운 폭탄으로 본 사람들이 있다. 사진 폭탄은 2주 전 서대문 충정로 아랫마을 3층 홈리스 행동 사무실 테이블에 올라왔다. 홈리스 당사자분들과 함께 홈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임에서 9월호 거리 신문 ‘홈리스 뉴스’의 ‘사진댓글 기사’를 쓰기 위해 최근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고 가슴 아프게 했던 사진을 인터넷에서 한 장씩 골라서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사람들이 고른 몇 장의 사진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지난 7월 ‘최저생계비한달나기희망 UP 캠페인’에참여해 “6,300원짜리 황제의 삶”으로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았다’했던한나라당 국회의원차명진의원의 사진. 만장일치였다. 이 사진을 두고 기자모임에 참석한 네 사람은 1시간 동안 자신들 마음을 무참히 터트렸던 이 ‘폭탄’을 무장 해체시키고 사진에 역공습을 펼쳤다.

폭탄은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폭탄? 먼저 사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찾기로 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사물, 몸짓, 표정, 배치, 시선 등 화면 구석구석을 샅샅이.

사진에서무엇을 찾으려면 먼저 말을통해서 꺼내야 했다. 사진을 보면 모든 게 보이는데 굳이 왜 말로 해야 하나? 하지만 억지로라도 말을 해서 끄집어내야한다. 사진은스스로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면(읽는 것은 약하다) 사진 속 그 무엇은 ‘선명하게 보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기에’ 영원히 사진 프레임 안에 갇혀 밖으로나오지못한다.

보여주기 위한 ‘잘 찍은 연출 사진 한 장’?

<사진 폭탄스펙>

-크기:320X240 전후
-카메라:디카
-재질:디지탈
-주의:언뜻보면보이지 않음. 자세히보면폭탄이터짐
-폭탄의 방향성:무작위 무대상
-출처:차명진의원홈페이지(“쪽방촌 체험수기가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른 사진으로 교체되었고, 체험 수기 역시 이전과 새롭게 바뀜. 마음먹으면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음)

: 까만안경을쓴중년의남성이숟가락을뜨고있어요. 쌀밥을푼숟가락엔갈색덩어리가올려있다. 사진에서는입보다숟가락에올라온밥이더커 보여요. 그리고바로입에 닿지 않고 중간에 걸려 있어요.

팔라이트: 눈은감겨있고, 숟가락이입으로가기전에딱멈춰서있다. 카메라와시선은 마주 치지않았다. 반팔티를입었고, 왼쪽손은 앉은뱅이 책상 밑에있다.

: 이마에 주름이있고, 입은 크게 입을벌린것처럼보인다. 눈썹이양쪽으로높이 올라가있다. 혼자방안에서먹고있다.

토끼: (사진 안에서 보이는것만 말하기로 했는데 토끼는 사진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구 꺼내기 시작한다) 김치 종지도 없다. 김치 정도라도 올려놓고. 그럼 저건 너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찍었다. 너무 없이 먹는다는 것을. 실제로 우리가 저렇게 쪽방에서 혼자 밥 먹다보면 김치 하나 정도는 올려놓고 먹거든. 반찬으로 김치라도 놓고 먹는다는 일종의 만족으로. 사람이 배가 고프면 다 먹을수도있지만, 저렇게는 맨 날 못 먹지. 전혀없는 사람들도 김치 정도는 사서 먹거든. 김치는사놓으면 나중에 먹어도되니까. 그런데 저기 위에 뜬밥은 아래 섞여있는 밥이랑 달라 보이네. 내 생각에는 맨밥을 떠서 반찬을 따로올린거야. 그러니까 저기 밑에 양푼 안에 있는 밥과 숟가락으로 뜬밥이 다르잖아. 저장면은 숟가락에 뜬밥을 차마 입에 넣지못해서 괴로워하는 표정이아닐까? 우리가 저거 먹어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거 한그릇 다못 먹어. 김치나 닥꽝(단무지)없이는 퍽퍽해서. 한두 숟갈뜨고 느끼해서. 저게 황제의 식사보다 낫다고 한다면 저것은 저 밥을 먹지도 않고하는 소리야. 저거 도저히 못 먹는다고. 생사의 기로에서 억지로 먹어야 한다면 먹지. 진짜 죽지않기 위해서. 그래야 목에 넘어가는거지.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저거는 최저생계비 체험에 참여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떤 애환이나 처지를알고자 하는 취지가 하나도 없는 거지.

: 그러고 보니 덩어리가 숟가락 가운데 딱 있구나.

고요: 어떻게 저걸 딱 가운데 뜰 수 있지?

토끼: 저 사람 왼손잡이인가? 나는 왼손잡이라 양손으로 다 먹는데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왼손으로 저분(젓가락)을들지. 근데 저분이 없잖아. 저분없이 저렇게 먹을 수 있을까?

고요: 아! 저분이 없구나. 저분은어디로 같을까?

: 보좌관이 곁에서 올려놓은 것이아닐까? 하하하(함께 웃음) 그래도 저는저사람이 저 밥을 다먹긴먹었을것같은데. 뭐몇 번먹다말았을수도있지만.

팔라이트: 그냥 체험에 참여했다고말로 하면 돼지 왜 굳이 사진을 찍었을까? 결국 보여주기인가? 보여주기 위한 연출사진? 처음엔 잘 못 느꼈는데 지금 토끼님 이야기 들어보니 정말 저 사람이….

차 의원은 진짜 밥을 먹었을까?

사람들 시선은사진정중앙에 있는 숟가락과 사진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젓가락(젓가락은 상 밑에 떨어져 있거나, 상 위에 있는데 사진에 찍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에 모아졌다. 숟가락과 젓가락 이야기는 이후 차 의원이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체험 활동의 인증 샷을 찍기 위한 사진이다’, 그리고 차 의원은 ‘이 사진을 찍고 숟가락을 그냥 내려놓았다’, 그래서 ‘차 의원은 진짜 밥을 먹었을까?’라는 놀라운 상상력(?)까지 더해졌다.(차 의원은 이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험을 보여주기 위한 인증 장면을 찍을 때는 동영상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차 의원이 숟가락을 뜨는 ‘사실’을 찍은 장면을 밥을 먹었다는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사진은 ‘그 때과 그 곳’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사실’로 찍었으니 당연히 ‘진실’을 담았을 텐데….

사진은 사실을 찍지만 꼭 진실을 담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사실과 진실을 같게 만드는 모호한 마력이 있다. 사실과 진실을 동일하게 만드는 사진의 무섭고 위험한 힘. 그 힘은 사진 자체보다도 사실을 진실로 오해하는 사람의 보는 눈, 생각에 있다. 우리는 차의원 사진을 보고 다음 장면을 자연스럽게 미리 예상(저숟가락위에있는밥을 바로먹었을것이다)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멀 수 있게도 할 수 있다.

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거 먹어보니 황제의 밥상이라고 하는 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야유를하는것이지.

토끼: 저 사람은 한 끼만 먹은 거야? 하루를먹은거야?

고요: 아니 이 사람이 한 끼만 먹었더라도, 생각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리고 상식이 있다면, 참 이런 생활이 힘들구나 고생이 많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먹고 어렵게 사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위선일망정 황제의 밥보다 낫다라고 그렇게 표현해서는 안 되지. 나는 이사람이 도대체 상식을 가졌다고 생각을 하지 못하겠어. 그래서나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사진과 체험수기가 올라온 기사에 댓글을 달았겠지. 뭐 “너이런거 한 끼라도 먹어보고 하는거냐?”, “실제 그렇게 사는 사람들 심정을 아냐” 등등.

: 난 이 사진을 보면서 끔찍한 게 뭐였냐 하면 고요님 말대로 예전에 가난에 대해 이야기 할 땐 어느 정도의 상식선이 있었어요. 옛날에 보면 정치인들이 가난한곳에 가서 그곳 사람들 도와주고 뭐 사진찍고 그랬잖아요. 금방 사진만 찍고갈망정. 그것이 그나마 상식선이었는데. 이제 지금은 그 위선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아요. 대놓고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사람 체험수기 보면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겠지. 나중에는 사람들이 뭐라하니 금방 사과하고 수기 내용를 바꾸었지만.

고요:그런 것 같아요. 보면 볼수록 사진이 야유, 야유로 들려요.

팔라이트: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다른 곳에서 저 사진을 보았을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토끼: 불쌍해 보일거야.

: 불쌍하다고요.?

토끼: 언젠가 어떤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식탁에 빵 하나를 접시에 올려놓고 옆에는 물 한잔 있는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는 장면이었는데….그 사진은 보면 불쌍하다기 보다는 한 끼식사의 경건함 같은 것을 느꼈는데 이 사진은….

고요:불쌍하지요. 저 사진이 차명진의원이 아니고 어떤 개인의 실제삶을 담은 사진이었다면….

고요가 들은 ‘야유의 소리’는 사진으로 찍혀지지 않았다. 사진에는 소리 없는 침묵뿐이다. 그런데 고요는 사진에서 어떤 야유의 소리를 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시각은 청각으로, 보이는 것은 들리는 것으로 전환되었을까? 소리는 과연 시각으로 바뀔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시선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시선. 그 시선은 누구에게나 따갑게 혹은 강렬한 찌름으로 다가 오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만, ‘폭력’으로 다가온다. ‘사진의 폭력’ 아니면 ‘폭력의 사진’인가? 들리지 않던 소리는 엄청난 폭음의 야유 소리로, 보이지 않던 것은 무시무시한 폭력의 시선으로 증폭되어 다가온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는 즈음 기사에 대한 제목을 짓기로 했다. 많은 제목이 오갔는데 누가 최근 영화 제목 ‘악마를 보았다’를 제안하였다.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정말 무엇을 보았을까? 황제! 아니면 악마! 당신은 어떻게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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